간밤에

마당에 내놓은 의자 위에 흰 눈이 소복이 내렸다

가장 멀고먼 우주로부터 내려와 피곤한 눈 같았다, 쉬었다 가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지친 눈 같았다

창문에 매달려 한 나절,

성에 지우고 나는 의자 위의 흰 눈이 쉬었다 가는 것 바라보았다

아직도 더 가야할 곳이 있다고, 아직도 더 가야한다고

햇살이 퍼지자

멀고먼 곳에서 온 흰 눈이 의자 위에 잠시 앉았다 쉬어 가는 것

붙잡을 수 없었다

유홍준 시집 `나는, 웃는다`

(창비, 2006)

미당 서정주 시인은 “마흔 다섯은/귀신이 와 서는 것이/보이는 나이.”(`마흔다섯`)라고 했는데 유홍준 시인도 나이 마흔 다섯을 넘기면서 귀신을 보았던 것인가. 그래서 “나는 의자 위의 흰눈이 쉬었다 가는 것 바라보았다”고 노래하고 있는가. 시 `의자 위의 흰 눈`은 하늘에서 내려온 눈(雪)만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 햇살이 퍼지자/ 멀고먼 곳에서 온 흰 눈이 의자 위에 잠시 앉았다 쉬어 가는 것/ 붙잡을 수 없었다”는 유홍준 시인이 말하고 있는 저 “피곤한 눈”, “지친 눈”은 기실 이 세상에 한 생명(生命)으로 왔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야 하는 운명적 존재인 그 누구일 것이다. 그 누구는 유홍준 시인 자신도,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또 지금 이 시와 글을 함께 읽고 있는 독자 여러분도 다 포함하는 말일 게다. 그 누구도 예외일 수가 없다. “붙잡을 수 없었다”는 마지막 시행(詩行)에 내 마음이 탁, 걸려 넘어지고 다친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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