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시에서 `붉은 밭`은 “풀 한포기 내밀지 않기로 작정”한 기억 속에 있는 상처의 굳은 딱지로 남은 황무지다. “육체는 감옥이라서”(`비행기 떴다 비행기 사라졌다`) 그 붉은 밭은 내 몸에 구불거리며 계속 살아있다. 이런 황폐화된 마음속의 붉은 밭이 시인으로 하여금 끝없이 언어를 만지게 한다. 몸에 상처의 기억을 많이 새겨져 있는 시인은 행복하다. 최정례의 시는 의식 혹은 무의식이 밀어내고 있는 지난 삶의 얼룩들을 무질서하게 흩어놓고만 있는 책임 없는 난해시는 결코 아니다. 시의 모티프는 기억 속의 파편화된 삶에서 가져오지만 시인은 그것을 시라는 형식에 안착시킬 때는 고도의 시적 전략 속에서 진행시킨다. 최정례의 시를 거듭해서 읽어보면 산문시에서도 시의 율격을 강하게 느낄 수 있다. 고도의 계산된 어법으로 얻어내는 시의 리듬, 그리고 냉정하리만큼 감정을 절제한 구문들 모두 그의 시를 훌륭하게 떠받치고 있는 시적 장치들이다.

<시인>

깜빡 잠이 들었었나 봅니다 기차를 타고 가다가 푸른 골짜기 사이 붉은 밭 보았습니다 고랑 따라 부드럽게 구불거리고 있었습니다 이상하게 풀 한포기 없었습니다 그러곤 사라졌습니다 잠깐이었습니다 거길 지날 때마다 유심히 살폈는데 그 밭 다시 볼 수 없었습니다

무슨 일 때문인지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엄마가 내 교과서를 아궁이에 쳐넣었습니다 학교 같은 건 다녀 뭐하느냐고 했습니다 나는 아궁이를 뒤져 가장자리가 검게 구불거리는 책을 싸들고 한학기 동안 학교에 다녔습니다 왜 그랬는지 모릅니다

타다 만 책가방 그후 어찌했는지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 밭 왜 풀 한포기 내밀지 않기로 작정했는지 그러다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수 없습니다 가끔 한밤중에 깨어보면 내가 붉은 밭에 누워 있기도 했습니다

최정례 시집 `붉은 밭`

(창작과비평사,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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