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욱 포항 효자성당 주임신부
허균과 허난설헌의 스승으로 알려진 손곡(蓀谷) 이달 선생은 조선 중엽 농촌 생활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시들을 남겨 주셨습니다. 그중에 박조요(撲棗謠:대추따는 노래)를 들어볼까요.

`옆집 어린아이 대추 따는 것을 보고/ 할아버지 문을 나서며 아이를 쫓네

어린아이 오히려 노인에게 말하길/ 내년 대추 익을 때까지 사시지도 못할 걸요`

대추서리를 하러 온 아이와 아이를 쫓으시려는 할아버지가 옥신각신합니다. 애초에 상대가 안 되는 싸움입니다. 대추나무 주인은 엄연히 할아버지이시고, 연륜이며 지혜에 있어서도 감히 어르신께 견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서슬퍼런 호통에 놀라 달아나던 이 아이도 보통은 아닌 모양입니다. 약이 오를 만치 올랐는지 한 마디 쏘아 붙입니다. `내년까지는 사시지도 못할 걸요` - 결국 시간은 내 편이라는 맹랑한 한 마디에 전세는 단 번에 역전입니다. 아이는 기세 등등이요, 할아버지는 망연자실입니다. 하긴 지나가는 세월을 어찌 당하겠습니까. 옳고 그름도 시간과 망각의 힘 앞에서 맥을 못 춥니다.

그래서일까요. 망각- 잊어버림은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책임을 회피하는 수단으로 쓰이기도 하고 의롭지 못한 일을 고집할 때도 동원됩니다. 독일의 전범 아돌프 히틀러도 `대중의 수용 능력은 매우 한정 되어 있고 이해력은 부족한 대신 망각력은 크다`고 말했다지요.

이렇게 망각으로 무너지는 정의를 지키기 위해 고대 그리스인들은 기억을 꼼꼼히 기록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기록을 토대로 재판정에 온 양측의 주장 중에서 무엇이 옳은지를 따지고자 했습니다. 정의와 불의를 가리기 위한 탐구와 조사, 이것이 오늘날 `역사`를 뜻하는 영어 단어 `histoty`의 어원인 희랍어 `히스토리아`입니다. `진리, 진실`을 뜻하는 희랍어 `알레테이아`는 이런 `히스토리아`를 거쳐서 얻게 된 결과물입니다. `망각의 강 레테`를 건너지 않는 것, 잊어버리지 말아야 할 것을 잊어버리지 않는 것, 이것이 `진리`라고 봤던 것입니다.

슬슬 송년회 약속이 잡힐 시기가 되었습니다. `송년회`라는 이름과 더불어 `망년회`라는 이름을 쓰고 있는 것은 그만큼 잊고 싶은 것이 많은 까닭일 터입니다. 세상은 온통 죄의 먹이사슬에 얽혀 있어서 알고 짓는 죄 뿐만 아니라 모르고 짓는 죄도 만만치 않지요. 그러다보면 차라리 잊고 싶은 일들이 많기도 할 것입니다. 죄를 짓지 않는 것만 해도 언감생심이요, 살면서 남을 돕는다는 것은 복 받은 일인 세상 속에서 망각 속으로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왜 없겠습니까. 하지만 지난 일을 기억하고 소화하는 작업이 없는 곳에 진리가 있을 리 만무합니다. 힘겹고 고통스러운 기억을 그냥 잊어버리기보다, 내가 아팠던 것을 남들은 아프게 겪지 않도록 기억해 두는 편이 훨씬 건강한 일입니다. 내가 모자랐던 점을 겸손하게 받아들이고 기억하면서, 남들은 그런 실수를 하지 않도록 되새겨 주는 일도 필요합니다. 그런 기억이 모이고 모여서 역사를 이루고, 이 역사 안에서 진실이 탄생하는 법입니다.

저작권자 © 경북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