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 대한 호불호는 읽는 이의 취향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내가 별로라고 한, 어떤 책을 빌렸다가 돌려주며 지인이 말했다. 이 책을 왜 안 좋아해요? 그럼 어떤 책을 좋아해요? 당황한 나는 잠시 침묵으로 변명할 시간을 벌어야했다. 나는 이 책이 좋은데, 그럼 댁은 대체 어떤 책을 좋아하냐는, 도발과 힐난의 뉘앙스가 묻어 있는 그 질문을 곱씹으며 내 독서 취향을 점검해본다. 나는 어떤 책에 몰입하는가?

요즘 김경욱 작가의 매력에 빠져 있다. 그의 `천년의 왕국`(문학과 지성사·2007)은 아무리 봐도 혼자 읽기에 아깝다. 주관적이기만 한 `혼자 읽기에 아깝다`는 생각은 그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지 못한데 대한 독자로서의 안타까움의 표현이기도 하다. 우리에겐 박연으로 알려진 네덜란드인 벨테브레의 조선 생활 접수기를 소설화한 작품인데 첫 페이지부터 독자를 압도한다.

개인적으로 조선 효종 때 조선을 다녀간 네덜란드인 하멜에 관한 관심이 많았다. 하멜 관련 책을 읽다 보면 자연스레 벨테브레까지 연결이 된다. 벨테브레 일행은 하멜 일행보다 약 삼십 년 먼저 우리땅을 밟은 네덜란드인들이다. 17세기 조선에 표착했다 일본을 거쳐 다시 네덜란드로 돌아간 하멜의 `하멜 표류기`에 기록된 한 줄 역사가 소설의 모티프다. 그것을 소설적 상상력으로 접수한 작가의 재능이 부럽기만 하다.

소설의 시작은 하멜과 벨테브레의 우연한 만남이지만 주요 내용은 벨테브레를 비롯한 일행 셋의 조선생활 기록기라 할 수 있다. 이방인이 본 조선 후기 사회학은 오리엔탈리즘이란 프리즘을 통과해 재구성된다. 조선을 `시의 나라`로 읽고, 조선인을 슬픔과 울음과 호기심이 많은 이방인으로 보는 벨테브레의 시선에서 그것을 읽을 수 있다. 당시 서구 사회는 중상주의, 종교개혁, 과학발달 등으로 이미 문명 세계라 자처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런 시각이 가능했을 것이다.

서구인이 본 이방인 조선에 대한 고찰로도 훌륭한 소설이지만,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두 가지 면에 눈길이 갔다. 인간 보편성과 문장이 그것이다. 세상에 잘 쓰는 작가는 많다. 그 작가들 때문에 희망과 절망을 오가는 나날이지만 책 읽는 즐거움이 뭔지를 알게 해주는 이런 작품들을 만나면 마지막 책장 넘길 때까지 설레기 일쑤다.

벨테브레 일행의 개별성과, 조선조정이란 집단 사이의 긴장과 갈등은 시공간의 경계를 허무는 인간 본연의 문제이기도 하다. 과거를 이야기하지만 그 안에서 인간의 보편성에 대한 현실을 만난다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소설이다. 그 때문에 김경욱 작가가 매력적으로 보이는지도 모르겠다.

또한 그가 조직하는 문장은 가멸차기 이를 데 없다. 끊임없는 직설과 대구, 조각조각 분해되어 이어지는 단문의 현란함에 아찔하기만 했다. 짧은 문장으로 승부하는 글이 이토록 강열할 수 있다는 것은 김훈 작가 이래 다시 맛보는 짜릿함이었다. 시대적 배경이 비슷한 김훈의 `남한산성`이 감각적이라면 김경욱의 문체는 지적이란 느낌이 들었다.

`이교도들은 세계의 끝에서 세상의 중심을 숭배했다. 우리의 육체와 영혼을 자신들의 심연 속에 가둘 것이었다. 이 은둔의 왕국을 빠져나갈 수 있는 것은 바람과 구름과 새뿐이었다. 새로 만나는 이교도가 늘수록 나의 불안은 붉게 달궈졌다. 달궈진 불안은 내 영혼과 심장을 갉아먹었다. 이교도의 초대를 받으면 나는 전날부터 굶었다. 나는 이 은둔의 땅에서 배부른 광대로 죽을 것이다.`

맛보기 밑줄 그은 문장을 읽으면서 처음으로 돌아가자. 나와 독서 취향이 다른 지인이 묻는다. 그럼, 어떤 책을 좋아하세요? 삼초 간 호흡을 가다듬은 나는 대답한다. 시대를 초월하는 인간 보편성을 노래하는데다, 흡인력 있는 문장이 받쳐준다면 절로 빠져 들게 되지요.

빼어난 책이라도 독자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경우가 있다. 천년의 왕국, 이야말로 그런 책 중의 하나이다. 훌륭한 책이 반드시 베스트셀러가 되라는 법은 없지만 `천년의 왕국`이 묻히는 건 안타까운 일이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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