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광순 / 제2사회부
1950년 9월, 안동지역은 갑자기 들이 닥친 인민군이 점령해 미처 피난가지 못한 주민들의 목숨은 풍전등화와 같았다. 이어 주민들을 보호하지 않고 후퇴했던 군과 경찰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주민들을 인민군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집단학살하는 비극을 낳았다.

그동안 유족들은 `빨갱이`가족이라는 차가운 시선을 받으며 60년이란 무심한 세월을 보냈다. 영문도 모르고 억울하게 숨진 가족들을 보면서 철없이 울던 어린 자식들은 이제 주름진 얼굴에 백발이 되었다.

진실·화해위원회 조사 결과 안동은 7개면에서 양민 64명이 군, 경찰에 의해 학살당한 것으로 밝혀졌고, 밝히지 못한 희생자도 수백 명에 이른다.

지난 주말, 진실화해위의 진실규명 결정서를 토대로 피해자가족 김춘매(81·일직면)할머니를 만나 당시의 학살 장소와 정황를 취재할 수 있었다.

가장 피해가 심한 일직면 광음리 암산골 희생지에는 여섯 번이나 강산이 변할 세월이 흘러 잡초와 우거진 숲으로 뒤덮여져 그때의 악몽과 같은 흔적은 찾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포승줄에 묶여 마지막으로 절규하는 희생자들의 아비규환이 절로 떠올랐다.

오빠를 잃은 김할머니 가족들은 당시 산에 오르면 반란군으로 오인돼 몇 달 후에야 시신을 수습했다. 이후 광음리에는 집집마다 해마다 같은 날`떼제사`를 지내는 모습이 반복되고 있다.

다양한 사건기록과 진술은 경악과 전율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일직면 망호리의 희생자 중에는 피난을 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수복해 오는 국군을 환영하러 갔다가 인민군이 발급한 통행증을 소지한 혐의로 각각 총살된 사람도 있었다. 심지어 경찰에 구금된 아들을 위해 밥을 해 면회를 갔다가 항의하자 일가족 4명 모두 인근 골짜기에 끌려가 집단살해된 경우도 있었다.

당시의 참상을 회상하며 한동안의 오열에 이어 손 흔들며 배웅하는 김 할머니를 뒤로 한 채 돌아오는 길에 한국전쟁을 겪어보지 못한 기자는 착잡한 상념에 젖었다. 동족 간 이념의 갈등과 세계적 패권주의로 인해 평생 가슴에 응어리를 안고 살아온 사람들을 위해 정부가 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일은 위령탑이나 추모공원 건립일 것이다. 이념의 잣대로 이를 시비해 망자와 유족들을 또다시 울리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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