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포포항기계중앙교회 담임목사
서정주 시인은 `푸르른 날`에서 가을을 이렇게 노래한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 저기 저기 저 가을 꽃 자리 / 초록이 지쳐 단풍 드는데….”

역시 가을은 단풍이 있어서 그리운 사람을 더 그립게 한다. 초록이 지쳐서 단풍이 든다는 표현이 익살스럽다. 단풍들도 어쩌면 고단한 인생인지도 모른다. 단풍은 잎의 색이 붉은색 또는 노란색, 갈색으로 변하는 현상을 말하지만 그 이면에는 인생과 견줄 만큼 깊은 의미가 녹아 있다.

첫째로 단풍은 처절한 생존 경쟁의 한 부분이다. 가을에 단풍이 드는 것은 나무 자신이 살아 남기 위해서다. 즉 나무를 살리기 위해서 초록의 잎이 단풍이 되어 떨어진다. 그리고 일교차가 심하면 단풍이 더욱 빨갛게 타오른다. 단풍은 생존을 위한 고통을 겪는다. 사람들은 이런 나무의 고통스런 몸부림을 잊은 채, 단풍놀이를 즐긴다.

사계절이 뚜렷한 나무일수록 나무는 단풍과 이별 연습을 해야 한다. 나무는 자신이 살아남아서 이듬해 또 다른 잎새를 피우기 위해 냉정하지만 물길을 막아버린다. 영양분을 받지 못하는 낙엽은 체념을 배우며 끝내 단풍이 되어 떨어진다.

둘째로 단풍은 자신을 희생시켜 또 다른 생명을 잉태시킨다. 단풍은 자신을 아낌없이 준다. 자연의 질서에 순응하며 다음 세대를 위해 밑거름이 된다. 이것이 단풍의 숭고한 희생정신이다. 단풍은 떨어져서도 나무에게 이불이 되고 거름이 된다. 사람은 자신이 가진 것을 붙잡으면 붙잡을수록 초라해진다는 사실을 떨어지는 단풍을 통해서 배워야 한다.

세 번째로, 단풍은 자연의 질서대로 움직인다. 단풍은 높은 데서 낮은 곳으로 번져간다. 단풍은 북쪽에서 물들기 시작하여 비교적 따뜻한 남쪽으로 옮겨간다. 단풍에도 질서가 있다. 단풍은 알고 있다. 자신이 떠날 때가 언제인지를…. 단풍 속에도 엄숙한 절대자의 섭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떨어지는 잎새를 통해 배운다.

네 번째로, 단풍은 저녁노을 배경으로 보면 더 아름답다. 저녁놀은 장엄하다. 엄숙하다. 붉게 물든 단풍은 또 하나의 석양이고 저녁노을이다. 문득 석양을 바라보고 있으면 순간이란 무척 빠르다는 분명한 인식과 함께 이상하게도 영원을 그리게 하는 심정을 느끼게 한다.

단풍을 보면서 생각하게 되는 것은 사람도 “죽을 때는 단풍처럼 아름답게 깨끗하게 죽을 수 있어야 할 텐데” 라는 바람이다. 생각해보면 사람이 단풍보다 못함을 느낀다. 지나친 탐욕과 욕심 때문이다. 인생의 계절이든, 계절의 변화든 차가운 바람 앞에서는 누구나 어떤 색을 가지고 있던 반드시 한번 떨어져 자연으로 돌아가는 과정이 남아 있다. 그렇다면 마지막 멋있는 색깔을 남기기 위해 겸허한 자연의 법칙 앞에 겸손해 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섯 번째, 단풍은 떨어져도 나무는 항상 곧은 자세로 세월을 지켜가고 있다. 우리들도 나무처럼 변하지 않고 언제나 그 자리를 지키는 또 하나의 나무가 되어야 한다. 단풍을 보면 때로는 눈물이 난다. 그것은 동정의 눈물이 아니다. 그것은 초월하는 의지가 눈물겹다는 뜻이다. 사람도 나무처럼 살 수는 없을까? 누군가 인간이 여행을 계속하는 것은 언젠가는 떠나온 곳으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인생과, 단풍은 긴 여행을 마치고 결국은 떠나왔던 최초의 그 장소로 돌아간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여행에서 예외일 수 없다. 19세기 미국의 헨리 소로는 붉은 단풍의 빛깔을 보고 `자연의 훈장`이라고 극찬했다. 무엇보다 가을 산은 너무나 아름답다. 가을은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그래서 파스칼은 인생을 생각하는 갈대라고 했는지 모른다. 우리 인생은 한번 왔다 가는 것이다. 가을 단풍이 인간에게 주는 교훈은 시간 여행이다. 결국 이 가을이 우리에게 던지는 의미는 영원하지 않은 것을 영원한 것으로 착각하고 살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결국 인생도 또 하나의 단풍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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