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추를 뽑아 보면서 안스럽게 버티다가

뽑혀져 나온 뿌리들을 살펴보면서

나는 여지껏 뿌리들이 흙 속에서 악착스럽게 힘을 주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뿌리는 결국 제 몸통을 따라올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배추를 뽑아 보면서 이렇게 많은 배추들이 제각기

제 뿌리를 데리고 나옴을 볼 때

뿌리들이 모두 떠난 흙의 然함은 어디서 오는 걸까

배추는 뽑히더라도 뿌리는 악착스리우리만큼 흙의 血을 몰고 나온다.

부러지거나 끊어진 배추 뿌리에 묻어 있는 피

이놈들은 어둠 속에서도 흙의 肉을 물어뜯고 있었나 보다

이놈들은 흙 속에서 버티다가 버티다가

독하게 下半身을 잘라 버린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뽑혀지는 것은 절대로 뿌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뽑혀지더라도 흙 속에는 아직도 뽑혀지지 않은

그 무엇이 악착스럽게 붙어 있다.

흙의 肉을 이빨로 물어뜯은 채.

조정권 시집 `虛心頌`

(영언문화사,1985)

나는 시집 `산정묘지`를 통해서 조정권 시인을 처음 알게 되었다. 시집 `산정묘지`가 뿜어내는 높은 시정신과 시인 근성(根性)에 매료되어 조정권의 시집들을 차례로 구입하여 읽었다. 그 가운데 시집 `虛心頌`(영언문화사,1985)에서 시 `근성`을 만났다. 시집에는 청년 시절의 시인이 한 老시인과의 나이를 떠난 우정과 사랑에 관한 말들이 옹골차게 심어져 있다. 그 노시인은 젊은 시인에게 시와 사상적 영향을 많이 준 고(故) 김달진 시인이었다. 밤늦도록 이 시집을 읽은 그 다음날, 진해에서 열린 `김달진문학제`에서 조정권 시인을 만났다. 진해 웅동의 김달진 생가에서 선생을 추모하는 헌시를 낭송하던 조정권 시인의 모습이 참 아름다웠다. 시 `근성`은 그의 시를 평하는 다른 책 여기저기서 몇 번 읽은 것인데, 이 `虛心頌`에 수록되어 있는 줄은 몰랐다. 배추를 뽑다가 끊어진 배추 뿌리를 보면서 얻은 시 `근성`은 시인으로서의 자기 다짐과 의지의 표현으로 읽혀진다. 그러고 보면 이 시는 `산정묘지`를 펴낸, 오늘 날 한국의 중견 시인으로 밀어올린 조정권 시인의 초창기 시론으로 봐도 되겠다. 뽑히더라도 악착스리우리만큼 흙의 血을 물고 나오는, 뽑혀지더라도 흙 속에는 뽑혀지지 않는 흙의 肉을 이빨로 물어뜯은 채 붙어있는 배추 뿌리의 그 근성으로 조정권 시인은 여기까지 걸어 온 것이다. 그렇다, `근성(根性)`이 필요하리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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