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꽃이란 닉네임을 가진 분이 메일을 보내왔다. 딱히 보낼 곳도, 애타게 기다리는 소식도 없는 나날이라 메일 계정을 방치하다시피 했는데, 수신확인을 기다리게 한 게 미안해 서둘러 개봉했다. 첨삭을 부탁한다는 인사말과 함께 수필 네 편이 첨부되어 있었다.

첫 편부터 눈길을 끌었다. 몸과 마음을 열어 이웃을 품는 글쓴이의 진심이 잔잔한 울림으로 다가왔다. 자신의 가게에 드나드는 이웃을 관찰한 일상사인데, 그 바탕에는 인간에 대한 한없는 이해와 사랑이 깔려 있었다. 가게를 열자마자 분식점을 하는 옆집 친구가 커피 마시자고 건너오면, 예쁜 딸을 둔 방앗간 안주인도 합세한다. 정담이 무르익기도 전에 문지기 역할을 하는 수다쟁이 할머니가 끼어들면 본격적인 인간사 희로애락이 변주된다. 그들이 풀어놓는 음악 같은 일상사는 필명 눈꽃의 눈을 거치는 동안 따뜻한 동화가 되고 마침내 거룩한 신화가 된다.

동네가 공단 주변이라 외국인 노동자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는데, 그들조차 누나라고 부르면서 어려운 일이 있으면 도움을 요청한다. 캄보디아의 젊은 새댁이 진통을 하자 생업인 가게 일마저 팽개치고 병원으로 한걸음에 내닫는 장면에선 눈물이 핑그르르 돈다. 눈꽃의 고백처럼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라면 그렇게 못할 것이다. 누가 말하기 전에, 눈꽃은 스무 살을 갓 넘긴 캄보디아 새댁이 되어 있거나, 새댁의 친정 엄마 입장이 되어 보는 것이다. 하루 종일 순산을 기원하며 병실 앞을 서성이다 돌아와 허기진 배를 이웃과 채우는 모습은 부럽기까지 하다. 울다 웃다, 를 반복하며 네 편의 진솔한 글을 읽는 동안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하는 반성문이 이 글을 쓰게 했다.

언젠가 한 모임에서 어떤 이가 얘기했다. `내겐 진정한 친구가 없어. 요즘 같은 세상에 친구 한 명 만들기가 얼마나 어려운데. 마음 터놓을 사람이 없어.` 그 때 다른 친구가 말했다. `좋은 친구가 곁에 없다고 푸념할 필요가 없어. 좋은 친구가 되어주면 니는 절로 좋은 친구가 되어 있는 거야.` 좋은 친구를 원하기 전에 좋은 친구가 되어 주라는 그 친구는 몇 해 전 이사를 갔다.

나는 그 전에도 그 친구를 좋아했지만, 그 평범한 말을 확신에 차서 말하던 그 친구가 더욱 좋아졌다. 그 후 재주 많은 그녀가 손수 갈무리한 자신의 새 아파트에 내가 선물한 시계가 걸려있을 때 무척 기분이 좋았다. 그 친구는 먼저 좋은 친구가 되어주라, 는 자신의 명언을 내가 엿듣고 있었음은 지금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눈꽃의 글에서 나는 좋은 친구를 갖고 싶다면 좋은 친구가 되어주라, 는 내 친구의 `말씀` 을 실천하는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아무나 그렇게 살 수 있는 건 아니다. 나 같이 개인적이고, 자발적 격리를 자청하고, 때론 사회적 관계를 피곤해하는 스타일은 대체로 그렇게 하지 못한다. 부러워하되 실천하지 못하는 이 천성적 불관용을 나는 반성하고 또 반성한다.

마침 주중에 내가 읽은 책은 장영희의 `문학의 숲을 거닐다`(샘터, 2005)였다. 독서 토론 과제 때문에 읽은 책이지만, 그 책의 주요 뿌리 역시 인간에 대한 따뜻한 이해와 관용 즉, 좋은 친구 되기라고 할 수 있다. 한 권의 책을 읽으면서 글은 곧 사람이라는 결론을 새삼 느낀다. 어쩌다 한 번 착한 척하거나, 어찌하여 그럴싸한 관용을 이야기할 수는 있다. 하지만 초지일관 인간에 대한 깊은 신뢰와 사랑을 이야기하기는 어렵다. 그건 천성과 환경과 노력이 가져다 준 축복이다. 넘어져도 웃고, 따돌림 당해도 씩씩하고, 아파도 견뎌라. 끝내 아름다운 것들이 승리하는데, 그 아름다움은 인간에 대한 무한한 너그러움이다, 라고 작가는 말하고 있다.

덧붙이자면, 눈꽃의 글에 내가 할 첨삭은 없었고, 그미가 내 인생에 첨삭할 것은 많은 하루였다. 나는 조심스레 답장을 썼다. 글이 사람을 울게 한다는 걸 믿고, 사람이 사람을 움직이게 한다는 걸 확신한다고. 이 두 가지 명제를 체험하게 한 당신이 있어서 충만하다고. 그리고 허락 없이 이 잡문에 당신이 등장한 것은 당신 인품의 승리이니 용서하시라고.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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