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간 한번도 당 옮기지 않은 `골수 한나라당 맨`

한나라당에 입당한 지 어언 25년이 지난 이상학(50) 한나라당 수석전문위원은 요즘 한나라당 행정안전위원회 수석전문위원으로 국감을 치르느라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이 수석전문위원의 남다른 경력은 다름 아닌 당료로서 20여 년을 지나면서도 한 번도 당적을 옮기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지난 1984년 신한민주당 경북도당 선전부장(현재의 홍보부장)으로 입당한 이래 통일민주당, 민자당, 신한국당, 한나라당으로 당명만 5번째 바뀌었으나, 한 번도 당을 옮긴 적은 없는 골수 한나라당 맨 이다.

한나라당 경북도당 사무처장과 대구시당 사무처장을 연달아 지내는 흔치않은(?) 경력을 가진 이 수석전문위원을 만나 고향에서의 추억과 꿈들, 당료로서 지난 시절, 그리고 앞으로의 포부 등에 대해 들어봤다.

<편집자주>

1983년 민추협 중앙인권위원으로 정치 활동

국감서 시위대 박격포 위험성 알리는데 `한 몫`

내 길 가기위해 내년 지방선거 총선출마 준비

-고향인 영천에서 지낸 어린 시절 얘기가 궁금합니다.

▲영천시 대창면 조곡리 소농의 집안에서 2남3녀 가운데 둘째로 태어났습니다. 가난한 농촌에서 유년시절을 보냈고, 영천 대창초등학교와 영창중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이색적인 것이 있다면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중학교 때까지 반장을 잇달아 계속하면서 학생회 간부로서 활동을 많이 했다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적으로 조직이나 단체의 리더로 활동을 많이 하게 됐습니다. 흔히 말하는 골목대장 노릇을 많이 한 셈입니다. 그러다 보니 정치 쪽에 관심을 많이 가지게 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본격적으로 정치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어떤 것입니까.

▲대구 대건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계명문화대를 다닐 때 연합서클 회장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서거한 직후인 80년의 봄이었습니다. 그때 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덕룡 특보를 대구 모 호텔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김 전 대통령은 “열심히 도와달라”고 당부했고, 저도 열심히 도왔습니다. 학생으로서 대통령 후보를 만났으니 기념비적인 사건이었죠. 더구나 당시에는 김영삼 전 대통령이 바로 대통령이 되는 줄 알 때였으니 기대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전두환 전 대통령이 총을 들고 나와서 대통령이 되고 말았죠. 그 후 군대에 입대했을 때는 대학 때 전공(축산과)을 살려 농장을 할 생각도 있었습니다.

군 제대 후 전경환씨가 소고기를 수입해서 소 값이 떨어져 농민들이 난리를 칠 때였습니다. 그때 다시 김덕룡씨와 만나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고, 1983년 민추협 중앙인권위원으로서 본격적으로 정치활동에 나섰습니다.

-정치가로서 보다는 당료로서 생활이 더 많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당료로서 월급을 받다 보니 오히려 출마도 마음대로 하지 못한 점이 있습니다. 1983년 민추협 중앙인권위원회에 가입한 뒤에 김대중 전 대통령과 통합해 신한민주당이 됐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탈당해 나간 뒤 통일민주당, 그 뒤에 노태우(민정당) 김영삼(통일민주당) 김종필(신민주공화당) 등 3당이 합쳐서 민주자유당이 됐습니다. 민자당이 신한국당을 거쳐 한나라당으로 바뀌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한나라당 경북도당에서 청년 직능 총무 홍보 조직 등 모든 부장 보직을 다 맡아 본 뒤에 한나라당 대구시당에 내려가 9년 정도 조직부장과 시당 사무부처장을 지냈습니다. 그 후 경북도당 사무처장을 맡아 일하다 다시 대구시당 일을 맡아봐 달라는 요청에 따라 2004년 8월부터 올 초까지 대구시당 사무처장을 지냈습니다.

-야당시절에는 이런저런 어려움이 많았을 듯한 데, 에피소드가 있다면.

▲통일민주당 창당방해 사건인 용팔이사건이 많이 기억납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과 노태우 전 대통령이 선거할 때 민정당의 사주를 받은 폭력배들한테 테러를 당했던 일이 기억납니다.

당시에는 정치가 매우 살벌했고, 무서웠습니다.

-재정적으로는 당 살림은 어땠습니까.

▲실제로 어려운 시절의 야당 10년을 후원금 한 푼 없이 끌고 왔습니다. 그래서 일정부분 당에서 보상을 받고 싶은 마음도 듭니다. 이제 여당으로서 후원금 부담 같은 것이 전혀 없는 호시절은 이렇게 서울에서 전문위원을 맡아 지내고 있으니 이런저런 감회도 없지 않습니다.

예전에 여당 사무처장을 지냈던 황윤기 전 의원이나 이민헌·한명환씨 같은 민정당 사무처장을 지낸 분들은 민원도 쉽사리 해결되고, 정치자금 마련도 손쉬웠던 시절을 보냈습니다. 사무처장을 지내다가 시장이나 청와대 수석으로 올라가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았고, 이의익 전 대구시장 같은 분도 전문위원으로 와서 차관 장관으로 이어지는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는 대통령이 당총재였던 시절이어서 그럴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대통령이 평당원으로 돼 있어 정당이 힘을 잃은 셈입니다.

-그러면 당이 힘을 잃게 된 데는 당·청 분리가 원인이라는 얘기입니까.

▲결론적으로는 그렇게 된 셈입니다. 박근혜 전 대표가 당 대표를 맡았을 때 홍준표 전 원내대표에게 한나라당의 개혁과 쇄신을 맡겼는데, 이때 당·청 분리를 해야 한다는 내용이 포함됐습니다. 그래서 한나라당이 집권하면 당과 청와대가 분리하겠다고 약속했고, 지금 그것이 지켜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껏해야 당과 청와대가 정책 공조밖에 되지 않는 이유가 바로 당·청 분리 때문입니다.

-그밖에 정당생활을 오래 하면서 특별한 경험이 있다면.

▲대구·경북지역의 경우 지방선거에서는 야당이란 느낌을 크게 느끼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재정적인 어려움은 많았습니다. 특히 이회창 후보가 대통령 선거에서 처음 떨어지고 난 뒤 대구·경북지역 한나라당 후원회원들은 모두 잘나가는 상공위원들이었는 데, 선거 끝난 뒤 1주일 만에 모두 탈당계를 다 가져왔습니다. 그 이후 재정적으로 누구에게 하소연도 못하는 야당생활을 해왔다. 그때 당명은 신한국당이었는 데, 대구지역의 경우 야당 하면 모두 죽는 줄 아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당직자 중 돈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때 김학봉 고문이 당을 지켰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이 되면서 민자당이 신한국당 만들었고, 총재는 조순, 후보는 이회창씨로 해서 한나라당을 만들어 10년 야당을 하다가 결국 여당이 된 것이다.

-10년 동안 야당 생활 동안 살림을 어떻게 꾸렸습니까.

▲당직자들 가운데 지방정치에 뜻을 가진 사람들이 당직을 많이 가졌습니다. 굵직한 사람들은 죄다 여당으로 가버렸습니다. 그래서 중소기업인들이 주축이 돼 당직을 가지는 양상이 벌어졌죠. 그래서 야당이 되면서는 재정적 뒷받침을 제대로 받을 수가 없었고, 심지어 3년 동안 후원회를 못할 지경이었습니다. 그래서 강재섭 전 대표가 사재를 털어서 하기도 했고, 그 당시에는 제 월급을 한 번도 가져가 보지 못했던 기억이 납니다.

-당직자들에 대한 처우는 어떻습니까.

▲민자당 때는 그래도 여당이었기 때문에 경북도당의 경우 20명 정도가 월급을 받았고, 괜찮았습니다. 그러다가 신한국당 때는 8~9명으로 줄었고, 야당이 되면서 각 시도에 4~5명이 월급을 받는 정도로 크게 살림살이가 줄었습니다.

지금은 정당법에 사무처 요원이 시도별로 5명씩 규정돼 있는 데, 국회의원 14명 이하는 4명, 15명 이상은 5명으로 규정돼 있습니다. 따라서 대구시당은 4명, 경북도당은 5명이 되는 거죠. 그리고 중앙당 사무처 요원은 200명, 시·도당을 합해 100명을 초과했을 때는 초과인원에 대한 급여는 다음 분기에 국고보조금 받을 때 깎고 주도록 돼 있습니다. 예를 들어 310명에 대해 급여를 주면 다음해에는 10명의 급여는 빼고 주도록 규정돼 있죠. 지금은 다시 여당이 됐으니 야당 때 비해서는 좋아졌다고 해야겠죠.

-한나라당 수석전문위원은 국감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습니까.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 정책위원회 소속으로서 한나라당 의원들이 중복된 질의를 하는 게 있는지, 또 제대로 당심을 반영하고 있는지 등을 모니터해보고, 의원들이 국감을 제대로 잘할 수 있도록 자료도 제공하고, 야당의 질의에 대한 대응전략을 구상하는 것 등이 주요 업무입니다.

-이번 국감에서 한나라당 행안위가 나름대로 성과를 거둔 것이 있다면.

▲한나라당 신지호 의원이 선관위 공무원의 민노총 가입에 대한 문제를 지적해 현재 선관위 공무원들의 경우 민노총 탈퇴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또 야당이 농성장에서 꼭 경찰이 시위대를 때리고 방패를 찍는 것을 부각해서 국민들에게 알리곤 했는데, 전체적으로 동영상이 왜 이렇게 됐나를 연결해서 이건 잘못된 영상이라고 대응을 한 것도 잘한 일로 평가됩니다. 실제로 시위대가 쏘는 박격포는 한 번에 10발 이상 날아가는 데, 유효사거리가 400m에 달하고, 머리에 맞으면 관통상을 입을 정도로 위험하다는 점을 의원들에게 많이 알리는 효과를 거뒀습니다.

-행안위에서 요즘 현안이 돼 있는 세종시 문제도 관여를 합니까.

▲법안을 행안위에서 만들어야 하는 데, 관여를 하는 셈입니다. 현재 소위는 통과돼 있고 상임위에 올라와 있는 데, 세종시라는 도시를 만들어야 하니까 어떻든 통과는 될 것입니다.

다만 무엇을 담는지는 행안위 소관이 아닙니다. 이밖에 행안위에서는 정개특위, 지방행정체제 개편 등이 가장 중요한 현안이 돼 있습니다. 저도 한나라당 정치선 진화특위 수석전문위원, 한나라당 정당법 정치자금법 개정소위원회 수석전문위원, 한나라당 신종플루대책특위 수석전문위원, 한나라당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TF팀 수석전문위원 등을 맡아 뛰고 있습니다.

-내년 지방선거나 총선에 출마할 계획은 있으신지요.

▲아직 결정은 내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지방선거 또는 국회의원 선거에 나설 준비는 하고 있다고 해야겠죠.

특히 내년 지방선거에 나가지 않게 되면 다음 총선은 정년이 다 돼 가는 시기여서 공천을 못 받는 한이 있더라도 출마를 결행해야 할지도 모르죠. 정치가 꿈이었던 만큼 내 길을 가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김진호기자 kjh@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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