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읽는` 계절이기도 하지만 `쓰는` 계절이기도 한가 보다. 이맘때면 `쓰는 것`에 관심 가진 이들의 고충을 들을 기회가 많아진다. 연중 문학 활동의 결실을 준비하는 때이기도 하고, 계절적으로도 글쓰기로 내면적 욕구를 충족하기를 요청하는 때이기도 하다. 가끔 입문자들이 글쓰기에 관한 궁금증을 풀어놓을 때면, 쓴다는 것에 그럴듯한 답을 가지고 있지 않은 나로서는 여간 곤혹스러운 게 아니다. 잘 쓰고 싶지만 맘대로 되지 않는 건 나 또한 그들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의 성장통과 내면세계를 속속들이 알 수 없으므로 어쭙잖은 내 충고는 겉돌기에 지나지 않는다. 고작 한다는 얘기가 맞춤법이나, 문장 호응 관계나, 비문을 걸러 내는 것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나마 돌아서면 허탈하기 그지없다. 문장에 대한 그런 기본적인 공부는 누구나 조금만 신경 써서 읽거나 쓰다 보면 자연스레 터득할 수 있는, 그야말로 `문장기술`에 지나지 않는다. 그건 글쓰기의 진정성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나는 왜 쓰는가?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그 서늘한 매혹 때문에 한 계절이 힘겨운 적 있는가? 이런 질문에 대한 속 시원한 대답을 해줄 수 있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진심이 요청하는 글쓰기 때문에, 이 갈 노을빛에도 가슴 타는 고통을 느끼는 자에게 위안이 될 만한 책 한 권이 여기 있다. 김탁환의 `천년습작`(살림, 2009)은 여타의 글쓰기 기법을 강조하는 책에서 벗어나 진심으로서의 글쓰기를 말하는 책이다. 겉표지부터 `따듯한 글쓰기 특강`이란 문구가 눈에 들어온다. `따듯한`이란 형용사에 노란색 옷을 입혀 강조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따듯하다 - 감정, 태도, 분위기 따위가 정답고 포근하다. `따뜻하다`보다 여린 느낌을 준다, 라고 국어사전에 나와 있다. 그가 말하는 글쓰기의 핵심은 바로 `잔재주 보다는 마음`이라는 걸 알려 주는 문구 같다.

글쓰기와 이야기 만들기의 핵심은 그럴 듯한 흉내가 아니라 `진심 그 자체`라고 작가는 말한다. 그는 글쓰기를 테크닉으로만 파악하는 관점에 반대한다. 경험한 것만 쓴다는 아니 에르노처럼, 집필실이 곧 절대 고독의 감옥이었던 발자크처럼, 쓰기만이 가장 좋은 친구라고 여기는 폴 오스터처럼, 글은 곧 자신의 또 다른 삶이어야 한단다.

여러 작가들에 기대어 글쓰기의 숭고함에 대해 들려주고 있는데, 그 중에 카프카의 `불안`과 `매혹`이 공감하기가 쉬웠다. 밤 새워 글을 쓰면서도 욕망의 키 닿기에 미치지 못하는 불안의 시절들이 쓰는 자들에게는 있기 마련이다. 쓴다는 것의 매혹과 자기연민에 대한 불안의 미묘한 줄타기 끝에 작품은 생산되는 것이다. 아이러니는 자신이 생각하는 매혹의 시절과 독자가 생각하는 매혹적인 작품은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카프카의 경우만 보더라도 그는 분명 `선고`를 쓰면서 매혹되었는데, 독자들은 `변신`에 빠져드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진정성의 문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쓴다는 것의 진심이 중요하지 작품성 때문에 고민할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작품성은 자신이 판단할 문제가 아니라 독자의 몫이기 때문이다.

또 쓴다는 행위의 개념이 무엇인가도 이 책은 가르쳐 주고 있다. 백년학생, 천년 습작의 자세를 강조하고 있다. 글은 머리로 쓰는 것이 아니라 손으로 쓴다고 다음과 같이 확실히 말해준다. “발자크처럼 손으로 쉴 새 없이 집필하는 것, 과잉으로 소설 세계에 빠지는 것만이 뛰어난 소설가가 되는 길입니다. 소설은 `노동`이라고 믿습니다. 소설이 유희라면, 기분 좋을 때만 즐기고, 기분 나쁠 때 하기 싫을 때 하지 않아도 되는 놀이라면, 소설에 헌신할 까닭이 없겠지요. 적당히 즐기다가 떠나면 그만입니다. 따듯함을 지니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열린 마음이겠지요. 편견 없이 내 앞에 놓인 문장을 하나하나 음미할 여유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지속적인 관심 역시 따듯한 품기의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이 가을 쓴다는 것 때문에 나처럼 맘 졸이는 그대들아, 김탁환의 글쓰기 특강을 읽어보자. 그가 무엇을 말했느냐고? 백년학생, 천년습작이라면 그 답이 될까?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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