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4용지에다

아라비아 숫자 3을 거푸 쓰니

백지는 그만 하늘이 되어

새 한 쌍이 날아가고 있다

앞서 날고 뒤를 따르는 저 삼삼한 사이가

성급하고 조급해 보여 아무래도 미심쩍다

옳거니, 저 하늘 및 어느 마을에서도 얼크러 설크러져 사람들은 옥시글 옥시글을 살아가고, 그 틈바귀에 끼이고 치여 어린 사랑도 아우당 다우당 애간장 졸이고 달이던 성춘향과 이묭룡이 필시 있었겠다, 로미오와 줄리엣도 왜 없었을라

그들 중 한 커플이 살아서 감행한 무모한 탈출만큼

오랜만에 날씨 한번 쾌청하다

3월3일 맑은 초봄.

유안진 시집`다보탑을 줍다`(창비, 2004)

아라비아 숫자 33이 제목이 된 위 시는 좀 특별나다. 3월3일에 그냥 무심코 백지에다 3과 3을 연거푸 썼는데 백지는 그만 하늘이 되고, 3고 3은 한 쌍의 새가 되어 날아가고 있다고 한다. 이 얼마나 재미나고 젊은 상상력인가. 유안진 시인은 앞서 날고 뒤를 따르는 저 한 쌍의 새를 보면서 이 땅의 장삼이사(張三李四)의 삶과 사랑을 그려낸다. 저 하늘 밑 어느 마을에서도 얼크러 설크러져 옥시글옥시글 살아가는 삶이 있고, 이 틈바귀에 끼이고 치이면서 아우당 당우당 애간장 졸이는 사랑도 필시 있을 것이라고. 그러나 시가 전하는 핵심은 마지막 3행이다. 오랜만에 날씨 한 번 쾌청한 3월3일 맑은 초봄이 시인에게 이런 시를 쓰게 만들었다. 어떤 초봄인가. “그들 중 한 커플이 살아서 감행한 무모한 탈출만큼”이다. 그래서 백지가 하늘이 되고, 3과 3이 한 쌍의 새가 된 것이다. 이순(耳順)을 훌쩍 넘긴 시인의 몸에 봄물이 오르려는가, 그의 시가 싱싱하고 정겹고 빛난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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