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 먼저 배가 조금씩 나오기 시작한다
찬 것을 먹으면 이가 시리다
신 음식이 싫다
잠이 없어졌다
눈이 흐릿하다(한 이틀 걸려야 술이 깬다)
세상에 대한 열망이. 삶의 또 한 굽이가
그저 밋밋하고 낡은, 부석부석한…
코치는 시계를 들여다보며 죽어라
악다구니를 쓰는데
긴장으로 뭉친, 탄력으로 내달았던 장딴지가
흐물흐물 녹작지근
길이, 느닷없이 벌떡 일어나
세차게 뺨을 후려친다
노을이 되어 번지는 코피,
한 손으로 틀어막으며 반바지 추스르는데
무엇보다 오오, 이걸 어쩌나
새벽에 좆이 서지 않는다
날이 벼려지지 않는다
유용주 시집 `크나큰 침묵`(솔,1996)
서른다섯 살이 인생의 반환점이라면 나는 이미 10년이나 지나 와버렸다. 시의 내용이 꼭 내 이야기인 것만 같다. 몸이 허물어지고 세상에 대한 열망이 그저 밋밋하고 낡고 부석부석한 것이. 시`36`은 유용주 시인이 인생의 반환점을 통과한 36세에 쓴 자기 삶의 낭패감에 대한 진지한 반성문이다. 이런 처절한 인생 반성문은 곧 삶의 무서운 결의(決意)로 다가서는 일이다. 이 시를 읽으며 단기4333년(2000) 12월에 보내준 그의 산문집 `그러나 나는 살아가리라`(솔, 2000)를 다시 펼쳐본다. 붉은 볼펜으로 밑줄을 죽죽 그어가며 감동적으로 읽었던 그 때의 기억이 눈에 선하게 떠오른다. “내 문학은 내 삶뿐이다”라는 건강하고 당당한 선언으로 시작하는 이 산문집은 그를 일약 유명인사로 만든 책이다. 1부 `그 숲길에 관한 짧은 기억`은 여러 편의 아포리즘을 묶은 것인데, 편편마다 삶과 문학에 대한 시인의 거침없는 육성이 감동적으로, 아름답게 새겨져 있다. 먹물 든 사람들의 현학적이고 나약한 아포리즘을 일거에 넘어서는 위대한 아포리즘이라고 여러 사람들에게 책을 들이밀던 기억이 새롭다. 포항에 한 번 오겠다던 시인을 올 겨울에는 불러서 바닷가 선술집에서 과메기 안주로 소주잔을 나누며 그 당당한 生의 육성을 들어봐야겠다.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