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영경북교육청 Hi! e-장학 집필위원
마산시내에서 차를 타고 30여 분 정도 산길을 굽이굽이 돌아가면 작은 섬들이 올망졸망 떠 있는 고요한 바다가 나타난다. 울창한 숲에 둘러싸인 채 파란 사파이어처럼 눈이 부시도록 맑고 푸른 바다가 언제나 변함없는 모습으로 우리를 반겨준다. 지금처럼 가을이 익어가는 날, 창문을 열고 그 바닷길을 달려가다 보면 아름다운 노을에 취해 잠시 차를 멈추게 된다.

마산 9경 중의 하나인 일명 `콰이강의 다리`로 불리는 `저도 연륙교` 근처 작은 마을에 시댁이 있다. 가끔은 뉘엿뉘엿 넘어가다 저 멀리 작은 섬으로 숨바꼭질하듯 숨어버리는 석양이 너무 보고 싶어 시댁을 찾아가기도 한다.

지난 주말, 홀로 계신 시어머니께 안부전화도 드리지 않고 시댁으로 갔다. 가을빛으로 물든 석양이 보고 싶은 이유도 있었지만, 예고도 없이 찾아가면 시어머님의 반가움이 더 클 것 같아서였다. 평소 같으면 대문 밖에서 반가이 맞아 주실 텐데 예고 없는 방문이라 그런지 집은 텅 비어 있었다.

시어머님은 부지런함과 검소함이 몸에 밴 분이시다. “아프다” 소리를 연신 입에 달고 살지만 산으로 들로 바다로 쉴 새 없이 일을 하러 다니신다. 지금도 어쩌면 넘어가는 석양을 벗 삼아 조개를 줍느라 정신이 없으실 것이다.

짐을 풀고 청소를 하기 위해 욕실로 들어가니 세숫대야에 빨랫감이 담겨져 있었다. 시어머님의 속옷이었다. 외아들 내외가 오는 날이면 손님을 맞이하는 것처럼 거실이랑 욕실 청소까지 깔끔하게 해두시기에 빨랫감이 담긴 것을 처음 보았다. 결혼한 지 어느새 15년의 세월이 흘렀는데 시어머님의 속옷을 한 번도 빨아본 적이 없다.

산후 조리를 할 때마다 삼칠이 지날 때까지 며느리 속옷을 빨아주시던 당신을 생각하며 세숫대야에 담긴 속옷을 빨기 시작했다. 몇 개 되지 않는 옷가지들을 깨끗하게 빨아 탁탁 털어 빨랫줄에 널었다. 그런데 가지런히 널려진 속옷들을 바라보니 어느 것 하나 새것이 없다. 낡고 헤어져 구멍이 난 것도 있었다. `아~ 내가 속옷 선물을 언제 해드렸더라` 그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문득 문예부 아이들이 참 재미있다며 들고 와서 보여주던 동시 한 편이 생각났다.

엄마의 런닝구/ 경산 부림초등학교 6학년 배한권(1987년)

작은누나가 엄마보고/ 엄마 런닝구 다 떨어졌다./ 한 개 사라 한다./ 엄마는 옷 입으마 안 보인다고/ 떨어졌는걸 그대로 입는다./ 런닝구 구멍이 콩만 하게/ 뚫어져 있는 줄 알았는데/대지비만 하게 뚫어져 있다./ 아버지는 그걸 보고/ 런닝구를 쭉 쭉 쨌다./ 엄마는/ 와 이카노/ 너무 째마 걸레도 못한다 한다./ 엄마는 새 걸로 갈아입고/ 째진 런닝구를 보시더니/ 두 번 더 입을 수 있을 낀데 한다.

다 낡아빠진 속옷을 입고 있는 엄마를 바라보며 거친 경상도 사투리로 가족들의 사랑을 솔직하게 표현한 이 시를 읽노라면 우리 어머니들의 모습이 생각난다. 삶이 팍팍했던 그 시절, 어머니들은 자식 뒷바라지를 위해 무조건 아껴 쓰고, 아껴 먹고, 아껴 입으셨다. 옷장을 열면 분명히 자식들이 사준 새 속옷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을 텐데 그것도 아끼시느라 너덜너덜해진 속옷을 그대로 입고 사시는 것이다. 먹고살기가 편해진 지금도 어머니들은 아끼는 것이 습관이 돼 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마음껏 하지를 못하신다.

내일은 온 가족이 한자리에 모이는 추석이다. 먼 길 달려온 자식들을 위해 아껴둔 새 옷을 꺼내 단정하게 입으신 채 보름달보다 더 환한 웃음을 지으실 우리들의 어머니. 이제 바깥바람도 점점 차가워지는데 그 겉옷 안에 입으실 속옷은 제대로 있을까? 이번 추석엔 동그라미처럼 시작도 끝도 없는 사랑을 주시는 어머니를 위해 용돈에다 덤으로 예쁜 속옷도 한 벌 선물하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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