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포포항기계중앙교회 담임목사
이솝 우화 중에 아주 친한 네 마리의 황소이야기가 있다.

그들은 어디를 가도 함께 갔으며 함께 풀을 뜯고 함께 누워 쉬면서 사이좋게 서로 가까이 지냈다. 그들은 어떤 위험이 닥쳐와도 두려워하지 않고 서로 힘을 합해 대처해 나아갈 수 있었다.

그런데 주변에 그들을 잡아먹으려는 배고픈 사자 한 마리가 있었다.

사자는 어느 누구라도 일대일 대결에는 자신이 있었지만 한 번에 네 마리는 불가능했기에 꾀를 부리게 되었다.

소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을 때, 그중에 약간 뒤처진 황소에게 살금살금 다가가 귀엣말로 다른 소들이 너의 흉을 보고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소에게도 똑같은 방법으로 접근하여 저들이 너를 흉보고 있다고 했다. 마침내 네 마리의 황소는 서로를 의심하게 되었고 그 의심은 더욱 깊어져서 불신의 벽은 높아져 갔다.

이들의 문제는 다른 세 마리가 똑같이 자기를 흉을 보고 있다는 착각 때문이었다.

마침내 그들 사이에 우정은 깨어져 서로를 믿지 못하여 각자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결국 사자는 하나씩 네 마리의 황소를 다 잡아 배불리 먹었다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공동체의 신뢰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가르쳐준다.

요즘 우리 사회의 가장 부족한 자질로 공동체 의식과 도덕성, 그리고 배려심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가정이 핵가족화가 되면서 자녀들이 귀하신 몸이 되었다.

그래서 자녀들이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다. 우리 사회가 성공지상주의와 물질이 만능이 되어버린 상황에서 도덕성은 빛 좋은 개살구가 되었다.

결과지상주의가 과정을 무시하고 성공만 하면 된다는 사생아를 낳았다.

결국 나라고 하는 개인의식은 살아 있지만 우리라고 하는 공동체 의식은 매우 약하다.

얼마 전에 북한에서 황강 댐을 방류하는 바람에 임진강 강가에 텐트를 치고 야영하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것도 새벽에 방류하면서 고스란히 자다가 큰 변을 당한 것이다. 댐을 방류할 때는 적어도 우리 측에 통보를 했어야 했다. 그것이 인도주의 정신이다.

이번 사건은 북한의 생명경시현상이 빛은 또 하나의 비극이었다.

결국 남을 배려하지 않을 때 소중한 생명도 잃을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배운다. 자기 생명이 소중하면 남의 생명도 소중한 법이다.

우리 조상들은 가정에서 뜨거운 물을 마당이나 화단에 함부로 버리지 않았다. 혹시 뜨거운 물이 미생물을 죽일까 하여 물을 식혀서 버리는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공동체는 단순한 사람들의 집합은 아니다. 우리는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을 공동체라고 부르진 않는다.

공동체는 독립된 유기체로 보아야 하고, 독립된 목적과 행동력을 보여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공동체는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이 앞서야 한다.

의학에서 웃음 요법이라는 치료법이 있다. 많이 웃으면 있던 병도 낫고, 생길 병도 예방한다고 한다. 웃음에서 흘러나오는 생기가 세포 하나하나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일 것이다.

공동체도 마찬가지이다. 웃을 수 있어야 한다. 비웃음도 아니고 허탈한 웃음도 아니며 거짓 웃음도 아니다.

진정으로 즐거움에 깔깔깔 웃을 수 있어야 한다.

미술에는 점묘법이란 기법이 있다.

작은 점들을 수없이 찍어서 형상을 만들어 간다.

각각의 점들은 서로 다른 색이지만, 이들이 모여 하나의 이미지로 다가온다. 오케스트라도 수많은 악기들은 서로 다른 음색을 지니고 있지만, 이들이 모여 아름다운 선율을 만들어 내고, 듣는 이로 하여금 눈시울을 적시게 한다.

강바닥에는 수많은 조약돌이 있다.

하나도 같은 것이 없다. 조약돌은 서로에 상처 입히지 않으면서도, 저마다의 개성을 살리는 모습은 강물의 아름다움이 아닌가? 공동체의 힘은 좋은 관계에 있다. 이솝우화에 나오는 네 마리 황소이야기는 먼 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다. 남, 북의 공동체 안에 숨어 있는 이기적인 사자를 몰아내는 일이야말로 공동체를 살리는 길이다.

아름다운 공동체는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마음에서 시작된다.

이제 우리는 바뀌어야 한다.

“나는! 존재 한다.”라는 명제에서 “우리는 존재 한다.”라는 명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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