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사람 모두가 예비장애인입니다” 한나라당 장애인위원장을 맡고있는 윤석용(서울 강동을)의원이 국회에 입성하면서 국회의원들을 가리키며 한 말이다. 지체장애 2급인 장애인으로서 정상인들과 함께 18대 지역구 총선에 출마해 당당히 국회에 입성한 윤 의원은 “인생 자체가 장애인이 되는 과정입니다. 나이 들면서 이빨빠지고, 허리 힘없고, 무릎 아프면 장애인 되는 겁니다.”라고 말한다.

대구출신의 윤석용 의원을 만나 그가 살아온 역정과 꿈, 장애인을 위해 펼치고 싶은 정책 등을 들어봤다.

<편집자주>

한나라당 윤석용 의원은 지난 16대 총선에서 당공천을 신청했지만 탈락했고, 17대 총선에서는 공천을 받았지만, 1천300여표차로 낙선했다. 18대 총선에서 비례대표 유혹을 받았지만 이를 뿌리치고 서울 강동을에서 출마해 당선됐다. 쉽게 국회에 입성할 수 있는 길을 두고 지역구 의원으로 출마해 힘겨운 선거전을 치른 배경은 무엇일까. 윤 의원은 “장애인이 선거를 치르고, 국회의원에 당선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습니다”고 말했다.

장애인으로서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는 것은 그만큼 소중한 일일게다.

18대 총선에서 장애인 국회의원은 모두 8명이며, 이 가운데 지역구 의원은 윤 의원을 포함해 단 2명이다.

윤 의원이 국회에 들어온 후 이런저런 변화들이 일어났다. 가장 먼저 국회내에 장애인을 위한 시설이 많아졌다. “지난 3년간 한나라당 장애인위원회 위원장을 맡으면서 국회안의 화장실 시설을 장애인용으로 개·보수하자고 건의했는 데, 안됐어요. 이번에 원내에 들어오자마자 화장실 개·보수부터 했습니다. 그렇게 49곳의 시설을 바꿨습니다.”

윤 의원이 마지막으로 바꾼 국회시설은 국회의사당 올라가는 계단의 손잡이였다. 이 시설 개·보수를 둘러싼 내막은 이랬다. “`국회의사당 올라가는 빨간 카펫 깔린 계단에 장애인용 손잡이를 만들자`고 했더니 `안된다`고 해요. `왜 안되냐`고 하니, `국회 권위에 금이 간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렇다면 국회의장을 장애인차별법 위반으로 고발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제야 계단에 손잡이를 설치해주더군요.”

-어린 시절은 어땠습니까?

▲저는 한 살때 소아마비를 앓아 다리 한 쪽을 쓰지 못하게 됐습니다. 소아마비를 처음 앓았을 때는 목 밑까지 마비돼 입만 겨우 움직였는 데, 지금처럼 목발을 짚고 걸을 수 있을 정도나마 된 것은 어머니와 외할머니의 따뜻한 보살핌덕분이었죠. 대구 종로초등학교를 다닐 때도 주변의 이런 보살핌 덕분에 내가 장애를 입었다는 생각을 거의 하지 않고 지냈습니다. 친구들도 자신들과 같은 아이들로 여겼고, 몸이 아픈 나를 친구들이 등하굣길에 업어주면서도 싫은 소리를 하지 않았습니다. 선생님들도 혼자 화장실에 가지 못하는 저를 업어서 보내주기도 했죠.

-학교생활이나 진학 등에서 불이익을 많이 당했다고 들었는데요.

▲중학교에 진학하려고 보니 장애가 실감이 났습니다. 대구에서는 공부를 잘하면 경북중이나 사대부중으로 진학을 했는 데, 저는 성적이 좋았다고 생각됐는데도 두 학교에서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저보다 성적이 못했던 친구들은 입학을 하고 말입니다. 대학입시때는 더 했습니다. 입시를 치른 후 경북대와 연세대 공대에 지원을 했는 데, 두 학교가 장애를 이유로 입학을 거부했습니다.

-다른 학교도 마찬가지였을텐데, 경희대 한의학과에는 어떻게 입학할 수 있었습니까.

▲대학입시때까지 한의사가 되겠다는 생각은 한번도 안해봤는 데, 어머니 권유로 한의학과에 응시하게 됐습니다. 한편으로는 `집안 내력인가 보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제 증조부(윤영렬)께서 고종때 어의였고, 할아버지와 아버지도 약방을 한데다 친척 가운데 의사, 약사, 한의사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1971년 경희대 한의대 입학시험에서 필기시험은 합격했지만, 신체검사서 떨어졌습니다. 다른 장애인 수험생 10여명도 모두 탈락했죠. 그때 당시 중앙정보부 감찰실장이던 외삼촌(모성진)이 친하게 지내던 당시 실력자이자 육영수 여사의 오빠인 육인수 전 공화당 의원에게 저의 입학을 부탁했습니다. 육인수 전 의원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제 이야기를 했고, 박 대통령이 경희대측에 저의 입학을 지시해 저 혼자 합격했습니다. 필기시험에 합격한 상태여서 부정입학은 아니니까 가능했던 거죠. 그래서 제가 경희대 한의학과 최초의 장애인학생이란 기록을 갖고 있습니다.

-학교를 졸업한후 서울 천호동에 자리잡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당시 서울에서 가장 못살던 동네였습니다. 무허가 판자촌, 재래식 시장, 사창가, 비닐하우스 등으로 뒤덮여 있던 곳입니다. 그래서 돈이 없어서 병원진료를 못받는 사람에게 무료진료를 해주고 싶었어요. (윤 의원이 운영하는 천호한의원에 들어서면 안내데스크 뒤로 `아래사항에 해당되는 분은 치료비를 내지 마세요. 생활보호대상자, 중증장애인, 환경미화원, 소방관, 사회복지사, 집배원, 순경, 목회자, 그외 원장님과 잘아시는분-꼭 내시겠다면 이동목욕봉사차량 성금함에 정성을 모아주세요`라는 글이 적혀있다.)

-사회복지재단을 운영하고 있다고 들었는 데, 어떻게 설립하게 됐습니까.

▲지난 1983년 강동사회복지개발원을 설립해 80년대 중반부터 연간 1~2억원씩, 한의원을 운영해 번 돈 가운데 세금과 가족 생활비 일부를 빼고 모두 복지개발원에 넣었습니다. 1992년에는 천호한의원 건물 등 자신의 전재산 10여억원을 기증해 강동사회복지개발원을 사회복지법인 대한사회복지개발원으로 확대개편했습니다.(윤 의원은 현재 자신과 가족명의의 집 한채도 가지고 있지 않다.) 여기서 성내종합사회복지관을 지어 장애인과 저소득층, 아이들에 대한 종합복지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복지관 산하에는 디딤돌 교육원과 곡교어린이집이 있습니다.

-17대 총선에 낙선했을 때 얘기를 들려주시죠.

▲지난 17대 총선때 어처구니없게 병역기피를 했다는 공격을 받았습니다. 제가 2급 장애인이기 때문에 당연히 병역면제가 됩니다. 그런데 후보자 소개에는 `병역미필`로 나와요. 여성은 `병역면제`로 나와서 오해가 없지만, 남성은 병역필 아니면 병역미필로 기재됩니다. 마치 병역을 일부러 회피한 사람처럼 보이죠. 그 때 투표 결과 1천300여표 차이로 떨어졌는 데, 군대에 가 있는 유권자들이 대부분인 부재자 투표에서 1천여표나 차이가 났지요. 억울한 사람을 없애기 위해서 이 부분도 개정안을 내놨습니다.

-거리에서 선거운동할 때 힘들지 않았습니까.

▲현행 선거법상 후보자와 배우자, 보좌관 1명 등 3명이 후보자의 명함을 돌릴 수 있습니다. 문제는 저처럼 장애를 가진 사람은 한쪽은 지팡이를 짚어야 하니까, 명함을 줄 수가 없습니다. 상대후보는 3명이 명함을 돌리는 데, 저는 2명이 나눠줄 수 밖에 없는거죠. 그래서 선거운동원이 저 대신 옆에서 명함을 돌리는 데, 이게 위법이라고 매일 고발을 당해 과태료를 50만원씩 물어야 했습니다. 이런 것도 법개정해야 합니다. 만약 배우자도 장애인일때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따라서 활동 보조인은 명함을 돌릴 수 있도록 예외규정을 두면 될 것입니다.

-18대 총선에서 선거전을 치르느라 많이 힘들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정상인에게도 선거전은 힘듭니다. 한번은 명함을 돌리기 위해 가게에 들어갔는 데, 주인 표정이 안좋게 변하는 겁니다. 그래서 명함을 두고 돌아나오는데, `이런 ××, 아침부터 재수없게 병신이 들어오는 거야`라는 말이 뒷통수에 박히는 겁니다. 그 후부터는 아침에는 절대로 가게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제 선거운동 하겠다고 다른 사람 기분 망치게 하면 안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제가 들어가지 못하는 곳에는 제 처가 들어가 무릎꿇고 명함을 건넸습니다. 집사람이 참 고생많았습니다.

-장애인 차량 LPG연료 면세제도가 올해말 폐지되는 것으로 아는 데, 어떻게 된 것입니까.

▲노무현 정권 시절인 3년 전에 일몰법으로 만들어져 올해말로 종결되도록 돼 있습니다. 한마디로 한나라당이 똥바가지를 뒤집어쓰게 된 법이죠. 비정규직법과 똑같이 말입니다. LPG연료 면세제도는 비장애인이 악용해서 타고다니는 바람에 문제가 됐습니다. 장애인은 월세나 전세를 들고 있는 상황이라도 승용차가 필요합니다. 이는 연간 2천600억원 예산으로 61만여명의 장애인 삶이 향상되고, 이동권이 보장돼 경제적 파급효과는 2조원 이상입니다. 따라서 이 제도를 폐지하는 것은 즉각 철회돼야 합니다.

-지방이양된 장애인 복지사업의 중앙환원도 시급하다고요.

▲노무현 정부때 67개 사회복지사업이 지방으로 이양됐습니다. 그러나 지방은 재정 자립도가 낮습니다. 예를 들면 꽃동네같은 마을이 충북 음성이나 경기도 가평, 제주도 등지에 있는 데, 여기에는 전국에서 장애인이 몰려옵니다. 그런데 해당 지역 자치단체에서 이 예산을 맡으라고 하면 `전국의 장애인을 왜 우리가 담당 하나`하는 불만이 터져나오게 됩니다. 또 장애인 복지관 하나 짓기도 어렵게 됩니다. 복지관 지으면 정부 50%, 지방 50%로 운영해야 하는 데, 지방재정이 없어 월급을 못 준다는 겁니다. 실제로 대구에 갔더니 장애인을 위한 콜택시를 30대 사놨는 데, 10대만 운용하고, 20대는 놀고 있더라구요. 물어보니 운영예산이 없다는 겁니다. 대구 달서구의 장애인재활작업장도 국비가 내려와도 지방예산이 없어 운영을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끝으로 대구·경북민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대구 경북지역민께 아무리 어렵더라도 희망을 갖고, 생활하시길 바랍니다. 저 처럼 장애인도 국회의원 되는 걸 보고, 희망을 가지십시오. 대구는 제 고향입니다. 지난번 첨단의료복합단지 유치할 때 용역을 의뢰할 수 있도록 예산 10억원을 확보해주기도 했죠. 또 지금도 대구에는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계십니다. 비록 지금은 편찮으셔서 병원에 계십니다만. 이번 추석때도 대구에 내려갑니다. 어쨌든 지금 대구가 어려운 것은 산업기반이 없어서 그런 만큼 시민들이 일치단결 해 옛날의 영화를 찾아오도록 해야할 것입니다. 한나라당이 집권을 한 것은 뭐니뭐니해도 대구·경북지역민 덕분이 아니겠습니까. 힘내십시오.

/김진호기자 kjh@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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