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문 스님 보경사 주지
생활하다 보면 유리잔이나 찻잔을 깰 때가 있는데 깨진 파편들은 아주 날카로워 치울때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크고 작은 조각 모두 날이 서 조금만 부주의 하면 손을 베기 때문에 부스러기까지 모두 줍는 것은 여간 성가신 일이 아니다.

그런데 그것을 줍다보면 느끼게 되는 것이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깨진 조각들은 하나 같이 날카롭고 삐죽하다. 무디거나 둥근 형태가 없다. 특히 작은 조각들은 더욱 예리하다. 본래 이 조각은 유리잔과 찻잔이었다. 그 때 우리는 담을 수 있는 공간과 부드러운 곡선을 갖춘 지금과 다른 그것을 고맙게 사용했다.

그러나 부서지면서 형태는 망가지고 담을 공간도, 둥글고 부드럽던 곡선도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에는 날카로운 직선이 생겨났다. 그러나 그 파편들을 하나씩 주워 맞추다 보면 날카로운 각이 궁극에는 둥근 원의 모습, 곡선의 어느 부분을 이루었던 조각임을 보게된다. 둥글게만 보였던 원도 사실은 날카로운 직선들의 조합이었던 것이다. 각각의 조각들이 자기자리를 찾는 순간 그것들이 가졌던 부정의 날카로움은 사라진다. 이제 그곳에는 파편이 아닌 전체가 있다. 그 조각이 있던 곳은 찾을 수 없다. 그것은 그 안에서 변화를 통해 바뀐 것이다. 그것을 어울려 합쳐졌다(화합)고 한다.

사회에는 각양각색의 주장이 있다. 옳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르다는 사람이 있고 긍정적 수용이 있으면 부정적 거부가 있다. 생각들이 차고 넘친다. 그러나 큰 틀의 관점에서 그들을 대하면 결국 하나의 줄기로 모아지고 우리 사회의 올바른 방향을 찾아가는 과정임을 알게 된다. 또한 보잘것 없는 주장, 부스러기의 생각이라도 그릇의 공간을 만드는데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부분임을 깨닫게 된다.

다만 지금은 떨어져 나와 있기에 불필요하고 위험하게 보일 뿐이다. 본래자리에서 그것은 전과 다름없는 역할을 하게 된다. 파편의 날카로움에 손을 베인다며, 생긴 모습이 다르다며 버린다면, 그 그릇은 다시 제 기능을 할 수 없을 것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 후에 화합이 시대의 중심 화두로 떠올랐다. 여야 모두 이 주제에 공감하고 있다. 그러나 화합이 정치에만 필요한 것은 아니다.

계층이나 기업, 세대 등 어디든 화합의 맞잡음은 필요하다. 상위계층과 하위계층, 사용자와 노동자, 신·구세대의 대립각은 부둥켜 안는 수용의 과정을 통해 바뀌는 것이다. 이것이 함께 사는 상생의 이치이다. 대적은 서로를 피폐하게 만든다. 상생은 서로의 삶을 내 삶으로 들어오도록 이끄는 것이다. 여기서 화합의 가능성이 싹튼다. 살펴보면 서로는 서로에게 많은 것을 빚지고 있다. 기쁘게 모이지 않을 이유가 없다. 살표보라. 얼마나 많은 인연들로 우리삶이 지탱되고 있는가를.

깨어진 파편의 날카로움만 지적하지 말자. 깨어진 조각이 어떻게 날카롭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서로가 필요하다. 화합은 상대의 존재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것이 전제되기에 하나로 모일 수 있는 것이다. 화합은 합리적 변화를 가능케 한다. 그것이 서로 상생하는 지혜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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