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을 겪으면 감당할 만한 다른 감정으로 대체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할머니 집에서 살았던 어린 시절을 행복한 시간으로 기억하고 있었던 어느 시인이, 자기를 돌보지 않은 엄마에 대한 원망을 감추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당황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는 않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방영된 티비 단막극 ‘기억의 해각’에서 배우 문근영이 맡은 주인공 오은수의 감정도 이렇게 중층적이다.은수는 남편 정석영이 알콜 중독으로 7년을 방황하는 동안 불평 한번 없이 남편을 돌보았다. 그러다가 석영이 잘못 휘두른 칼에 베이고 유산까지
웨스 앤더슨 감독을 만난 것은 아주 우연이었다. 6년 전쯤 뉴질랜드로 가는 비행기에서 시간을 때우느라 골랐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 그가 만든 영화였던 것이다. 일부러 영화관에 가서 돈 주고 볼 것 같지 않은 이상한 제목이었지만, 비행기 안이었기에 관심이 갔다. 우연한 만남이었지만, 워낙 시각적인 흡입력이 강해서 그런지 오래도록 기억에 남게 되었다.최근 개봉된 그의 영화 ‘프렌치 디스패치’ 역시 호기심을 끄는 제목은 아니지만, 엄청 빠른 대사와 옴니버스 식 구성에도 불구하고,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처럼 완벽에 가까운 색감으
길 가다 들른 어느 편의점 알바의 목소리가 생기 넘친다. 얼굴을 쳐다보니 어딘가 낯익다. 역시 인기 유튜버였다. 그녀의 개인사를 알기 때문인지 서로 아는 사이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그 사람은 특별한 사례에 속하고, 편의점에 가면 대부분 내 물건만 쳐다보고 계산하기 때문에 알바의 얼굴이나 목소리는 기억하기 힘들다. 편의점 알바는 그렇게 개성 없는 존재처럼 느껴진다.며칠 전 읽은 무라타 사야카의 ‘편의점 인간’에 나오는 주인공 후루쿠라 게이코는 편의점 점원이라는 정체성으로만 살아간다. 대학생 때 동네 근처에 새로 생긴 편의점에서
오늘 사전을 세 권 샀습니다. ‘국어 어원 사전’, ‘우리말 어감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입니다. 갑자기 웬 사전이냐고요? 고백하자면, 몇 달 전 책을 정리하면서 크고 두꺼운 국어사전을 없앴습니다. 그러나 ‘좋은 문장을 쓰기 위한 우리말 풀이사전’은 아직도 책꽂이에 꽂혀 있습니다. 이 사전은 작지만 풀이가 아주 길고 예문까지 있어서 문학 작품을 읽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사전이라고 하면 딱딱하다고 생각하는데, 이렇게 개성 있는 사전도 있습니다.‘새로운 단어를 찾습니다’는 사전에 미친 두 남자를 취재한 NHK 다
겨울이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봄꽃 이야기를 하려니 너무 성급해 보이기는 하지만, 한 달간 매일 500자를 쓰고 나니 문득 이른 봄에 피는 개나리가 생각난다. 개나리는 여름부터 가을까지 꽃눈을 준비하고 겨울을 지내고 꽃을 피운다. 개나리뿐 아니라 잎 없이 꽃 먼저 피는 봄꽃은 여름부터 꽃눈을 준비한다.이렇게 긴 겨울을 지내고 꽃이 피는 것을 춘화 현상이라고 한다. 겨울이 가고 일정한 온도가 되면 꽃이 피는데, 온실에서 일찍 그 온도를 맞추어주어도 피지 않는다. 반드시 한두 달을 추위에서 견뎌야 꽃이 핀다.눈치 빠른 독자는 개나리 이야
고1 때다. 어쩌다가 응원 밴드에 들게 되어 큰북과 심벌즈를 담당했다. 음악 선생님이 몇 번 쳐보라고 하더니 두 악기를 내게 맡겼다. 피아노를 잘 쳤던 친구는 어코디언을 맡았는데, 바로 연주를 잘했다.시내 공설운동장에서 학교 대항 응원이 끝나고 그 친구가 내게 정말 잘했다고 칭찬해주었다. 그때 내가 뭐라고 했는지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지만 화를 냈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때는 피아노 잘 치는 친구들이 너무나 부러웠고, 그 부러운 마음만큼 큰북이나 심벌즈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았다. 그런데 피아노 잘 치는 애가 나를 칭찬하니까 열등감이
내게는 나름으로 내세울 만한 게 몇 있었다. 첫째로 공부, 나는 그 별난 서울의 일류학교에서도 반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는 들었다. 또 나는 그림 솜씨는 서울시 규모의 대회에서 몇 번의 특선은 따낼 만했다. 내 아버지는 그 작은 읍으로 봐서는 몇 손가락 안에 들 만큼 직급 높은 공무원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담임과 급우들은 이런 것들에 관심이 없었다. ‘한병태랬지? 이리 와봐.’ 손끝 하나 까딱하지 않았으나 나는 하마터면 일어날 뻔했다. 그만큼 그의 눈빛은 이상한 힘으로 나를 이끌었다. 처음에는 엄석대의 힘에 저항했지만, 분위기에 휩쓸
J는 중학생이다. 진로에 고민이 많다. 지금 원하는 일, 신나는 일이 있지만 마냥 즐길 수만은 없다. 그 일의 미래가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이루어진다는 확실한 보장이 없다면 나서기 어려울 것이다. 이루어질 가능성이 어느 정도 되어야 시도할 수 있을 텐데, 불확실한 시대라 더 불안할 것이다. J의 고민을 듣다 보니 책 두 권이 생각난다.E.B.화이트의 동화 ‘스튜어트 리틀’은, 그의 대표작 ‘샬롯의 거미줄’보다 마음이 더 가는 작품이다. 주인공 스튜어트 리틀은 마음씨 좋은 스튜어트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생쥐다. 인간이 쥐를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내릴 때 앞에 사람이 가로막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죄송하지만 길 좀 비켜 주시겠어요?’라고 말하게 된다. 그렇다고 길을 막고 있는 사람들에게 딱히 죄송한 마음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내 길을 막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일부러 막고 있는 것은 아니니 시비를 따질 일은 아니다. 그저 ‘나가겠습니다. 비켜 주세요.’ 하면 될 일이지 굳이 ‘죄송합니다’를 붙일 일은 없다는 것뿐이다. 여기서 죄송하다는 말은 그저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기 위한 말일 뿐 그렇게 진지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
무관중으로 진행한 도쿄 올림픽이 끝났다. 이번 올림픽에서 가장 극적인 경기로 배구를 꼽는 데 이의를 달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나는 모든 운동을 좋아하지 않고 잘 아는 운동도 없지만, 배구만은 깊은 인연이 있어서 조금 볼 줄 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오로지 키가 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배구선수로 발탁이 돼서 1년 정도 해본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큰 경기에는 치어리더나 응원단이 있어서 보기 어렵지만, 초등학교 수준의 작은 경기에서는 어김없이 울려 퍼지는 소리가 있다. ‘플레이 플레이 한동구’, 현재 공을 잡고 있는 선수를 응원하
‘루시’라는 이름을 들으면 무엇이 생각날까? 2014년 뤽베송 감독의 ‘루시’가 생각날 수도 있고, 1967년 나온 비틀즈의 ‘루시 인 더 스카이 위드 다이아몬드’가 생각날 지도 모르겠다. 1974년에 발견된, 350만 년 전에 살았던 최초의 인류 ‘루시’가 떠오를 수도 있다. 루시는 105센티미터에 30kg 정도였으며 20세 전후에 나무에서 떨어져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2000년 이후 새로운 발견으로 현재 최초의 인류는 600만 년까지 더 거슬러 올라가지만, 아직도 루시는 최초 인류의 대명사처럼 사용된다.비틀즈 멤버 존 레논은
인문학이 누구나 갖추어야 하는 교양이라는 데 동의하는 사람은 많지만, 자연과학은 그렇지 않다. 자연과학이 일상의 경험에서 확인하기 어려운 분야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인문학적 성찰에 관심을 가진 사람일수록 자연과학 소양에도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이런 생각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 것은 몇 년 전 어느 독서 모임의 교재 ‘자발적 진화’ 때문이었다.저자 브루스 립튼의 약력도 의심쩍었지만, 무엇보다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것을 진화라고 하는 것부터 당황스러웠다. 인문학적 소양을 장착한 그 독서 모임 구성원들이 그런 용어 사용 문제에
며칠 전 둘째딸 결혼식이 있었다. 중학교 1학년 때 안경을 쓰기 시작한 후로 육십갑자 한 바퀴를 돌 때까지 안경을 쓰지 않고 사진을 찍기는 이번이 두 번째다. 안경 안 쓴 처음 사진은 당연히 30여 년 전 결혼식 때다. 그런데 이번이 더 특별한 것은 속눈썹까지 붙였다는 점이다.큰딸 때는 스몰웨딩이라 평소처럼 니트에 바지를 입고 안경도 당연히 썼기에 아무 생각이 없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연핑크 치마에 아이보리 저고리를 입고 속눈썹까지 붙인 풀메이크업, 거기에 짧은 머리를 올림머리처럼 부풀린 모습은 도대체가 다른 사람 같다. 아마
늦은 저녁, 동네 산책길에서 지인을 만났다. 오랜만에 만난 김에 벤치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외로운 건 인문학적으로 어떤 해결책이 있어요? 겪을 수밖에 없다는 말 말고 좋은 대안 좀 연구해봐요. 자원봉사 같은 건 권하지 말구요, 짜증나.”그 지인과는 이상하게 길거리에서 가끔 만나는 인연이 있다. 언젠가도 길에 서서 외로움을 어떻게 하냐고 하소연하기에 걸어보라고 했더니 걷는 것도 하루이틀이지요 하기에 그것도 그렇네요, 하면서 깔깔거린 적이 있다. 그런 지가 한참 전인데 산책길에서 또 만난 것이다.그런데 이번에는 자원봉사는
“꼬마 요정을 한 번 만난 적이 있지요./ 백합이 바람에 한들거리는 골짜기에서./ 그에게 왜 그렇게 자그마한가 물었지요. / 그리고 왜 키가 자라지 않느냐고요. // 꼬마 요정은 얼굴을 찡그리곤, 눈을 들어 / 나를 뚫어지게 보고 또 보는 것이었어요./ “나에겐 이 정도의 크기가 알맞아.” 그가 말했지요./ “너에겐 너 정도의 크기가 알맞듯이!” - 존 켄드릭 뱅스‘꼬마 요정’이라는 제목의 이 시는 20년 전 큰애에게 사준 동시집 ‘동생의 비밀’에 나오는 시다. 며칠 전 김경일 교수의 ‘적정한 삶’을 살자는 주장을 듣다 보니, 이
평균 수명이 늘고 있다. 2011년 남자 76.8세, 여자 83.6세이던 것이 2020년 한국인의 기대수명은 남자는 80.5세, 여자는 86.4세라고 한다. 주위에 90 넘은 어르신들도 눈에 많이 띈다. 문제는 나이가 들수록 위기감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큰 위기는 자기 삶에 대한 불만족감이 커지는 데서 온다. 경제적 문제나 건강 문제도 삶에 대한 만족감에 큰 영향을 미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만족감이 크면 경제나 건강 문제도 극복하기 쉬워진다. 나이가 들수록 마음의 힘 기르기가 중요해지는 이유다.바로 며칠 전은 우연
어린 시절 동화는 왕자와 공주가 만나 고난을 겪고 결혼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이런 고정관념에 의문을 품고 왕자와 공주의 결혼 이후의 삶을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는 했지만 여전히 그런 결말이 완결된 결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엘윈 브룩스 화이트의 대표작 ‘우정의 거미줄’ 역시 그런 완결된 결말을 보여준다. 샬롯이라는 거미는 돼지 윌버의 친구가 되어주고 도살의 위험에서 구해준다. 돼지 품평회장에서 샬롯이 알을 낳고 삶을 마치자 윌버는 그 알을 지켜준다. 윌버가 샬롯에게 은혜를 갚는 것처럼 보여서 완결된 느낌을 준다.그러
‘아버지가 미워요! 절대로 우릴 못 가게 했어야죠!’ 조엘이 울부짖는다. 그러나 조엘은 곧 자신 때문에 토니가 죽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토니가 수영을 못 하는 걸 알면서도 모래톱까지 수영 시합을 하자고 했어요.’ ‘조엘, 너랑 아버지랑 토니는 제각각 선택을 했어. 다만 토니만이 스스로 선택하고도 살아 돌아오지 못했을 뿐이야.’ 조엘은 자신의 고통을 없애지도, 없애 줄 수도 없는 아버지를 빤히 쳐다보았다. 조엘은 울음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아!’ 아버지가 안도한 듯 탄식했다. …. 조엘의 숨소리가 헐떡거릴 때에도 아버지
사람은 자신을 얼마나 잘 알고 있을까? 조 해리의 창이라는 심리 이론에 의하면, 사람에게는 네 가지 정보 영역이 있다. 나에 대한 정보를 나도 알고 남도 아는 공개 영역, 나는 모르지만 남은 아는 맹목 영역, 나는 알지만 남은 모르는 숨긴 영역, 그리고 나도 모르고 남도 모르는 미지 영역이다.영화 ‘퍼스트 리폼드’에 나오는 주인공들을 보면 미지의 영역이 얼마나 다루기 어려운지 알 수 있다. 메리의 남편인 환경 운동가 마이클은 메리에게 50년후 최악의 지구 상태를 예견하며 낙태를 종용한다. 메리는 하필 퍼스트 리폼드 교회의 목사 톨러
모욕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모욕당한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로 모욕은 사람에게 깊은 상처를 준다. 쑤퉁의 ‘쌀’이라는 소설의 주인공 우룽의 이야기는 조금 과장된 측면이 있지만 모욕의 무게를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다.고향에 홍수가 나서 먹을 것이 없어 우룽은 석탄 수송 기차를 타고 도시로 오지만 도착하자마자 부두 깡패에게서 심한 모욕을 받는다. 대홍기 쌀집에 가서 하인으로 써달라고 사정하지만 펑 사장과 그의 두 딸 쯔윈, 치윈에게 말할 수 없는 모욕을 당한다. 우룽은 증오의 화신이 되어 대홍기 쌀집을 차지하고 와장가의 두목이 되어 잔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