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와 신라의 역사를 ‘천일야화(千一夜話)’ 속 이야기 ‘알리바바와 40인의 도둑’, 또는 육중한 스위스 비밀 금고에 비유하자면 ‘풍류도’와 ‘화랑’은 비밀의 동굴을 여는 주문이나 정교하게 제작된 열쇠라고 할 수 있다.풍류도와 화랑이라는 2가지 핵심어는 역사학자와 철학자, 예술가와 종교학자가 1천500년 전 서라벌의 사회 구조와 당시 사람들의 보편적 인식을 추정해볼 수 있는 주요한 수단이 돼 왔다.그렇기에 화랑과 풍류도에 관한 연구는 21세기에 이른 오늘날까지도 현재진행형이다.여러 가설과 학설들이 충돌하고 있고, 새롭게 등장하는 학
‘풍류도’를 중심 이데올로기(또는 복합적 신앙체계)로 학습해 활동한 화랑들은 6~7세기 신라의 발전과 통일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그렇다면 풍류도가 가진 어떤 힘이 이를 가능하게 했을까?‘삼국사기’와 ‘화랑세기’ 등 고문헌은 “화랑 가운데 어진 재상과 충성스러운 신하가 나왔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병사도 여기서 생겼다. 무열왕(武烈王·김춘추)과 경문왕(景文王)도 화랑 출신이었다. 신라의 주요 인물들 가운데는 화랑 출신이 많았다. 그들은 사다함과 김유신처럼 전투에서 공을 세우기도 했고, 제사를 받들거나, 향가(鄕歌)를 짓는 등 예술적
기원전에 형성돼 10세기 중반까지 길고 긴 세월 동안 존재했던 고대 국가 신라. 시간은 숱한 ‘전설’과 ‘사연’을 만들어내기 마련이다. 1천 년 가까이 부침(浮沈)을 거듭했던 나라이니 넘쳐나는 이야깃거리가 있음은 당연한 이치.예술가들이 그걸 가만히 놓아뒀을 까닭이 없다. 그래서다. 신라를 해석하는 주요 키워드인 ‘풍류도’와 ‘화랑’은 수많은 소설과 시의 소재가 됐고, 영상기술이 발달한 현대 사회에 들어서면서는 영화와 TV 드라마를 통해 여러 차례 사람들과 만나게 됐다. 이는 ‘역사의 대중화’에도 일정 부분 기여하는 역할을 했다.영남
보통의 사람들은 주요한 몇몇 인물들을 규정짓거나, 한 묶음으로 배열하는 걸 즐긴다. 이는 인간의 특성 중 하나다. ‘트로이카(Troika)’는 3마리의 말이 끄는 수레를 지칭하는 단어.삼두마차(三頭馬車)로도 번역되는 트로이카는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의 실력을 갖춘 세 사람, 혹은 어떠한 일을 주도적으로 이끄는 3명’을 의미한다.1950년대 후반 쿠바에서의 전투가 세상을 뜨겁게 달궜을 때 ‘뉴욕타임스’는 “미국의 턱밑에서 젊은 트로이카가 질주하고 있다”고 보도한다.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1928~1967), 피델 카스트로(1926~2
시인 서정주(1915~2000)는 자유로움과 조화, 아름다움의 추구라는 ‘풍류도’의 핵심을 문학적으로 탁월하게 형상화한 작가다. 숭실대학교 국문과 이경재 교수가 미당 작품에 스며있는 풍류도의 향기를 분석한 글을 보내왔다. 독자들을 위해 이를 게재한다. 풍류의 핵심적인 특징으로는 ‘걸림 없는 자유로움’, ‘모든 경계를 뛰어넘는 대조화(大調和)의 세계’, ‘유연하고 여유로운 삶의 자세와 이를 통한 미의 추구’ 라는 세 가지를 들 수 있다풍류(風流)라는 단어는 우리 생활에서 흔히 사용되는 말이다. 멋스럽고 풍치가 있는 일 또는 그렇게 노
국어사전을 펼쳐 ‘풍류도’라는 단어에서 ‘도’를 떼고 ‘풍류(風流)’만을 찾아보면 이렇게 서술되고 있다. “ 멋스럽고 풍치가 있는 일. 또는 그렇게 노는 일”. 그렇다면 ‘도(道)’는 어떤 의미일까? 다시 사전을 뒤적여본다. 다음과 같은 설명이 나온다. “ 종교적으로 깊이 깨친 이치. 또는 그런 경지”.결론적으로 ‘풍류’와 ‘도’라는 두 명사가 합쳐진 ‘풍류도’란 “노는 일의 멋스러움이 세속적 경지를 벗어나 어떤 도저한 깊이에 다다른 경지”가 아닌가. 신라사회의 최상급 이데올로기 ‘풍류도’하늘과도 통할 자연스러움 즐긴
‘풍류도’라는 철학·종교적 이념을 바탕으로 육체를 단련하고 정신을 수련했던 신라의 화랑들. 우리에겐 그들을 바라보는 선입견이 존재한다. 대부분의 문학작품과 영화에서 묘사되는 화랑은 그 유형이 비슷하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다.“신라가 멈춤 없이 발전하고 인근 국가들과의 통일을 이룰 수 있었던 배경에는 청년 리더인 화랑이 존재한다. 그들은 왕을 충성으로 섬기는 사군이충(事君以忠)의 정신을 어떤 상황에서도 잊지 않았고, 전쟁에서 결코 물러서지 않는 임전무퇴(臨戰無退)의 기개로 무장한 강위력한 조직의 구성원들이었다.”지난 시절. 정통성
경주시 석장동에 자리한 화랑마을을 찾아가던 날. 도시의 아스팔트와 지붕을 적시던 세찬 소나기가 그치고 올여름 첫 더위가 시작되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하늘로 날아갈 듯한 세련된 기와가 인상적인 화랑마을. 그곳 전시장에서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보물 제1411호)’을 만났다. 30㎝ 길이의 돌에 화랑의 결의가 새겨진 비석. 거기 쓰인 일흔네 자의 글씨를 오늘날의 문장으로 쉽게 풀어 쓰면 아래와 같다. 경주 화랑마을에 전시 된 보물 ‘임신서기석’길이 30㎝ 돌에 일흔네 자 글씨 새겨진 비석화랑도의 지도 이념은 ‘풍류도’ 라는 역사학자유교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1818~1883)에 기대 설명하자면 이것은 ‘토대’인가 ‘상부구조’인가? 아니, 시간을 되돌려 150여 년 전 독일로 멀리 갈 것도 없다. 이 땅의 수많은 역사학자와 사상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은 분분하다.혹자는 “충효와 유희가 결합된 한국 정신의 뿌리”라고 말하고, 다른 누군가는 “미륵신앙과 밀접한 한국 종교사상의 주요한 흐름”이라고 주장한다. 보다 젊은 학자들 가운데는 “최근 아시아는 물론, 유럽 전역을 휩쓰는 한류(韓流)의 출발점”으로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 이전 세대에선 화랑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