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살리기에 두팔을 걷다 나라가 어려울 때 국민이 나서야 된다고 생각해요. 역사를 봐도 항상 그렇게 해왔구요. 나라가 힘들면 결국 국민이 힘드니까 스스로 해결해야죠. 경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IMF 당시 금모으기 운동을 해서 전국에서 구미새마을회가 1등도 했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았어요. 10원 동전모으기, 재활용품 수집 등 작은 일이었지만 나라살림에 도움이 되는 일을 많이 했어요. 사람들은 금모으기 운동 밖에 기억하지 못하지만. 동전모으기 운동은 초·중·고 학생들을 대상으로 했어요. 학생들은 돈이 없으니까 10원 동전이라도 모아서 나라살림에 보탬이 되라고 시작했죠. 학생들도 적극 동참했었어요. 당시 모금 금액이 얼마인지는 잘 기억하지 못하지만, 학생들이 모은 10원 동전을 도청에
조순란(68) 전 구미시새마을부녀회장은 1949년 12월 1일 김천에서 3남4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남편 일 도우며 봉사활동 시작 새마을부녀회 뿐 아니라 동네 부녀회장 지내며 ‘큰 손’ 으로 불릴만큼 마을·지역 위해 활발한 활동 김천에서 교직에 몸 담고 있던 부친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예의범절 교육을 엄하게 받았다. 부친은 당시 대구사범을 나와 17세에 초등학교 교사로 시작해 26세부터 학교장을 역임했다. 평생 교육계에 몸 담은 아버지는 항상 남을 위한 봉사활동도 많이 해 지역에서 가장 큰 어른으로 존경을 받았다. 조 회장과 형제들은 혹여 아버지의 명예에 누가 될까 품행에 각별히 신경을 많이 썼다. 조 회장은 24세에 결혼한 후 26세 때 남편의 직장 문제
△ 새마을알뜰벼룩장터를 만들다 구미시 새마을부녀회장을 2006년 맡게 된 이후 당시 남유진 구미시장의 권유로 알뜰벼룩장터를 만들게 됐어요. 재사용이 가능한 물건들이 너무 쉽게 버려지는 것을 조금이나마 막아보자는 취지였죠. 한마디로 ‘아나바다’운동이죠. 그런데 남 시장님이 물건 가격은 무조선 1천원 이상은 안된다고 못을 박았어요. 가격이 너무 저렴하니까 사실 하기가 쉽지 않았죠. 시장님과 가격 절충을 해야했어요. 다른 곳에서 열리는 벼룩장터을 벤치마킹하기 위해 대구 두류공원, 서울 뚝섬 같은 곳에 다녀왔었어요. 그 곳에서는 전부 가격이 자율에 맡겨져 있더라구요. 그런 내용들을 몇번이나 시장님에게 건의했는데 정말 씨알도 안먹혔어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2007년 처음으로 새마을알뜰벼룩장터를 열었어
김선애(56) 전 경상북도새마을부녀회장은 1962년 11월 경북 의성에서 태어났다. 당시 의성에서 새마을부녀회장을 하던 모친의 모습을 보며 자연스럽게 봉사와 새마을운동을 접했다. 1985년 결혼을 한 후 대구에서 살면서도 봉사활동에 참여했다. 이후 남편 직장때문에 구미로 이전한 뒤 구미시새마을여성합창단장을 시작으로 새마을운동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게 됐다. 2006년 구미시새마을부녀회장을 6년간 역임하고 2012년부터 올해 2월까지 경상북도새마을부녀회장을 역임했다. 그는 12년동안 구미시와 경상북도 새마을부녀회장을 역임하면서 알뜰장터와 새마을대청소 등을 집중적으로 육성했다. 올해 2월 경북도새마을부녀회장에서 물러난 뒤에는 지역 봉사활동에만 전념하고 있다. 구미 새마을여성합창단장 시절
나이 어린 10대 여직공들 위해 새마을운동 교육·절약정신 심어줘 공단 내 근로자 90% 이상이 새마을금고 회원 고기잡는 법 가르쳐주는 새마을운동 어려움 딛고 일어서도록 돕는 것이 진정한 복지 △새마을운동 교육으로 어린 직공들을 선도하다 구미국가산업단지 내 직물협업단지에서 근무하는 80%이상이 미혼 여성이었어요. 대부분 나이가 어린 10대 여성들이었죠. 그 애들도 참 고생을 많이 했어요. 힘들었을 거에요.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야간 고등학교에 다니는 사람들이 많았거든요. 당시 동구방직과 코오롱 회사 안에 고등학교가 있었어요. 시내에 한 곳도 있었구요. 초창기에는 대부분 공부도 열심히 하고 일도 열심히 했어요. 그런데 시간이 좀 지나니까 어린 애들이고 하니 그런것이었지만
이헌영(88) 전 구미시새마을협의회장은 1930년 안동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6.25전쟁 중인 1952년 배고픔이 싫어 자원해서 군에 입대했다. 8년간의 군생활을 마치고 대구에서 직장생활을 하다 1971년 구미국가산업단지가 조성될 당시 구미로 왔다. 공단 내 직물협업단지의 공장을 관리하는 직물협업회 상무이사로 근무하면서 새마을운동을 처음 접하게 된다. 자진해 새마을운동 지도자 교육을 받은 이 전 회장은 당시 직물공장에서 근무하는 나이어린 근로자들이 올바르게 성장할 수 있도록 새마을운동 교육을 시작했다. 직물협업단지에서 시작한 그의 새마을교육은 이후 공단전체로 확대됐다. 이후 공단동 새마을협의회장을 거쳐 구미시새마을협의회장과 경상북도새마을협의회 부회장을 역임했다. 이 전 회장은
△ 고철 모으기로 환경보호까지 당시에는 새마을행사라고 해서 여러가지 행사들이 많았어요. 그 중 고철 모으기가 있었는데 우리 비산동이 구미 27개 읍면동에서 1등을 한 적도 있어요. 비산동이 공단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어서 큰 고철이 많았거든요. 그런데 이런 고철을 치우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에요. 장정 1∼2명으로는 옮길 수 없는 것들이 많았거든요. 중장비를 동원할 수 없으니 모두 사람의 힘으로 옮겼죠. 물론 동네 몇몇 분들이 고철을 실을 수 있는 차량 등의 협찬은 있었지만, 차량에 옮기는 것은 모두 사람 힘으로 해야만 했어요. 지금은 고철이 돈이 되지만 당시에는 그렇지 못했어요. 그냥 쓰레기와 똑같았죠. 그러다보니 고철 덩치가 크면 그냥 버리고 가는 거에요. 그걸 그대로 방치하면 고철에서
배병희(60) 전 비산동 새마을협의회장은 1958년 부산에서 4남1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부산 동희공고에서 전기과를 졸업하고 공군에 입대했다. 제대 후 고향인 부산에서 직장을 구하기 힘들어 작은 형님이 있는 구미로 왔다. 전기와 관련된 자격증이 있어 당시 대우전자에 입사해 처음 새마을운동을 접했다. 직장새마을에서 받은 새마을 교육으로 새마을운동에 눈을 뜨고 난 뒤 2001년부터 비산동새마을협의회장을 8년간 했다. 그 기간동안 구미시 새마을회 총무를 겸직하기도 했다. 비록 구미시 새마을회장이나 경북도 새마을회장직을 맡은 적은 없지만, 특유의 부지런함으로 지역에서는 가장 열심히 새마을운동을 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있다.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일을 찾아서 했던 인물로 꼽힌다. 2017년 1월
△ 새마을운동은 새로운 것을 창출하는 것 중국 명성촌에 ‘명선 새마을회관’을 지어 준 이후 새마을운동을 다른 나라에서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세계 어딜가든 못사는 사람들의 모습은 별반 다르지 않았으니까요. 어려운 사람들에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줘야한다고 생각했죠. 선산군과 구미시가 통합이 된 후 내가 구미시 새마을회 회장을 하게 됐으니 세계화 사업을 한번 해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죠. 그러다 1995년 7월 새로운 구미시장에 김관용 시장이 당선됐어요. 김 시장도 새마을세계화에 굉장히 관심이 많았어요. 그래서 명선 새마을회관 이후 2000년에 베트남에 보건소를 지어주었어요. 2000년에 착공해 2002년 3월 보건소를 준공했는데 당시 준공식에는 남유진 구미부시장도 함께
세계 최빈국이었던 한국이 농업근대화와 산업화에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 여러요인이 있겠으나 그 중 하나가 바로 새마을운동이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세계가 한국의 경제성장 성공의 기적 뒤에 새마을운동 정신이 있었음을 알고 그 정신을 배우려 하고 있지만, 정작 한국에서는 새마을운동을 홀대하고 있다. 새마을운동기록이 지난 2013년 유네스코 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사실조차 모르는 이들이 많다. 사실 새마을운동이 정치적인 요인으로해서 시비의 대상이 된 것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하지만 정치적 시비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자신들의 자리를 굳건히 지켜왔던 새마을운동가들이 있었기에 새마을운동의 정신과 가치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이제 새마을운동은 정치적 소용돌이에서 벗어나 새롭게 태어나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