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 출간된 미당 서정주(1915~2000)의 네 번째 시집 `신라초(新羅抄)`를 펼친다. 많은 이들이 알다시피 서정주 시인은 `신라초`와 이어진 다섯 번째 시집 `동천(冬天)`에서 `불교`와 `신라`에 대한 지극한 관심을 드러낸다. 그렇기에 몇몇 문학평론가들은 1960년대 초·중반 서정주의 시 세계를 “불교의 인연사상과 신라 설화에 대한 고찰”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바로 이 `신라초`에 수록된 작품 중 하나인 `꽃밭의 독백`엔 이런 대목이 등장한다. “문 열어라 꽃아. 문 열어라 꽃아 벼락과 해일만이 길일지라도 문 열어라 꽃아. 문 열어라 꽃아.” 이 시에서 `순교자 이차돈`을 떠올리는 사람이 비단 기자 하나만은 아닐 것이다. 불교와 토착의
`경주의 상징`이라고도 불리는 소나무와 삼단 같은 머리채를 드리운 미인 형상의 버드나무가 초여름 빛나는 햇살 아래 푸름을 더해가고 있었다. 그 곁으로 폭이 좁은 강이 무심하게 흘렀다. 2017년 오늘이나 법흥왕과 이차돈이 살았던 6세기 초반이나 크게 변하지 않았을 풍경. 지금으로부터 1천500여 년 전. 서라벌을 가로지르는 남천(南川)의 북쪽 방향 언덕엔 신라인들이 신성하게 여기던 숲이 있었다. 이름하여 천경림(天鏡林). 소나무와 버드나무가 우거진 그 숲엔 고고학자와 역사학자의 오랜 조사와 연구로도 아직 온전히 밝혀지지 않은 여러 비밀이 존재한다. 샤머니즘(Shamanism·원시 종교의 한 형태로 주술사가 초자연적 존재와의 교류를 통해 예언 따위를 함)과 애니미즘(Animism·세상 모든
21년. 이차돈의 삶은 짧았지만 역사적 의미가 크고 극적인 요소도 충분하다. 그럼에도 그에 관한 연구서나 문학작품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신라의 불교 공인`이라는 신념을 위해 목숨을 버린 이 `젊은 순교자`에 관한 이야기를 누가 깊이 있게 들려줄 수 있을까? 그때 떠오른 것이 소설가 김성동(70)이다. 문학평론가들에게 “생존한 한국 작가 중 가장 미려하고 유장한 문장을 쓴다”고 평가받는 김성동은 불교적 세계관을 토대로 인간의 본원적이고 본질적인 문제를 작품에 담아내온 작가다. 또한, 그는 19세부터 29세까지 청춘의 한 시절을 지효대선사(智曉大禪師) 문하에서 승려로 살기도 했다. `만다라`, `집`, `길` 등의 소설을 통해 불교와 존재의 근원을 탐구해온 김성동을 초여름 햇살이 눈부시던 지난
때로 역사는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유사한 인간형을 탄생시킨다. `대의를 위한 희생` 또는, `목숨을 건 결단`이라는 키워드를 놓고 보면 `불교 공인`의 문을 연 신라 최초의 순교자 이차돈과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정치가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1918~2013)는 여러 부분이 닮았다. 이차돈이 “흩어진 신라의 국력을 하나로 모아 나라의 발전을 도모할 수 있는 불교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신념 때문에 생명을 잃었다면, 넬슨 만델라는 남아공에서 일상적으로 행해지던 극악한 인종차별 정책에 저항하며 흑인과 백인의 평등한 권리를 주장했다는 이유로 27년간 감옥살이를 했다. 이차돈은 자신의 죽음으로 신라가 중앙집권 체제를 갖춘 강력한 왕국으로 발전하는 동시에 삼국을 통일시킬 기틀을 만들었고, 27
마르크스주의(Marxism)에 입각해 세계와 인간을 해석한 학자들은 인텔리겐치아(Intelligentsia·지적 노동에 종사하는 지식인)를 “진짜 적이 아닌 논쟁의 적만을 혐오하는 인간”이라고 말했다. 그들의 그런 인식은 “피상적으로 세상을 보는 인텔리겐치아가 아닌 삶의 구체성과 실물성(實物性)을 획득하고 있는 노동자가 세계 변혁의 주체”라는 이데올로기를 낳았다. 아리스토텔레스(BC 384~BC 322)와 플라톤(BC 427~BC 347) 등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은 `소피스트(Sophist)`를 “본질적이고 핵심적인 철학적 관점을 배제한 채 `말장난`으로 혹세무민(惑世誣民)을 일삼는 대중의 적”으로 규정했다. 우리가 요즘에도 사용하는 단어 `궤변론자`는 그때 나온 것이다. 인간이 살아가는
동화책을 읽던 어린 시절처럼 상상력을 동원해본다. 아마 이런 장면이었을 것이다. 뜨거운 햇살이 쏟아지는 8월 초순. 서라벌 소금강산 정상. 신라가 불교를 받아들이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스물한 살 청년 순교자 이차돈`의 유택(幽宅) 앞에 모인 수백, 수천 명의 신라 사람들. 그들의 추모 열기는 염천의 하늘보다 높고 뜨거웠다. 백률사는 법흥왕 14년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목숨을 던진 이차돈의 순수한 열정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찰이다. `삼국유사` 등에는 자추사(刺楸寺)라는 이름으로 적혀 있지만, “오늘의 백률사는 자추사의 바뀐 이름”이라는 것이 역사학계의 일반적인 견해다. 안타깝게도 신라시대에 축조된 웅장했을 백률사는 임진왜란 때 소실됐다. 이후 다시 지어진 백률사 대웅전은 맞배지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掘佛寺址 石造四面佛像)을 지나 백률사(栢栗寺)로 오르는 길. 가쁜 숨을 몰아쉬어야 했다. 경주 동천동에 자리한 소금강산은 험하고 높은 산이 아니다. 그러나, 기상청의 예보처럼 “한여름 같은 불볕더위”가 5월 하순의 산과 숲을 뒤덮고 있었다. 얼굴과 목덜미로 연신 땀이 흘러내렸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빼곡히 대나무가 들어찬 숲 아래 그늘로 몸을 숨겼다. 청아한 신록이 지친 마음과 더운 날 산을 오르는 스트레스를 위로해줬다. 오가는 사람들이 드문 산길. 잠시 잠깐의 조용한 휴식 속에서 `논어` 자로편(子路篇)의 인상적인 구절이 옛날 영화의 한 장면처럼 떠올랐다. `其身正 不令而行 其身不正 雖令不從(기신정 불령이행 기신부정 수령부종)`. 법흥왕과 이차돈의 관계를 설명하기에
동네 주민들에게 물어물어 어렵게 찾아갔으나 어디에도 왕이 거닐었던 흔적은 남아있지 않았다. 그저 황사로 뿌연 하늘 아래 미지근하고 쓸쓸한 바람이 불어올 뿐이었다. 경주시 사정동 옛 흥륜사터에 지어진 조그만 절. 대웅전과 석등, 범종(梵鐘)과 이차돈 순교비를 모사(模寫)한 비석만이 이곳이 6세기 무렵 `왕의 사찰`로 불렸던 흥륜사(興輪寺)가 있던 자리임을 추측케 했다. 방문객이라곤 기자 하나가 전부였다. 이차돈의 순교 이후 법흥왕과 진흥왕에 의해 증축·재건된 흥륜사는 명실공히 신라를 대표하는 대가람(大伽藍·규모가 크고 불력을 인정받은 절)이 된다. 흥륜사가 거대 사찰로 변신을 시작한 시기는 535년(법흥왕 22년)으로 추정된다. 사학자 김태형의 논문 `이차돈 순교유적과 유물에 대한
신라의 불교 공인을 위해 죽음을 자처한 스물한 살 청년. 잘린 목에서 젖처럼 새하얀 피가 솟았다는 이차돈의 순교는 고대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피상적으로나마 알고 있는 역사적 사건이다. `이차돈 순교`는 드라마틱하고 논쟁거리 다분한 문학적 소재가 분명하다. 그럼에도 이차돈의 죽음에 관해 노래한 시나, 그의 짧고 뜨거웠던 생애를 그려낸 소설은 이상스레 드물다. 이런 상황이니 1935년부터 1936년에 걸쳐 `조선일보`에 연재됐던 춘원 이광수의 장편소설 `이차돈의 사(異次頓의 死)`는 발표된 지가 80년이 넘었음에도 여전히 이차돈의 삶과 죽음을 읽어낼 긴요한 텍스트로 역할하고 있다. `신라왕조가 불교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재주 많았던 한 청년이 안타깝게 희생됐다`는 역사적 사실에 춘원 특유의
법흥왕이 왕위에 오른 지 14년째 되던 527년. 21세의 젊은 청년 하나가 왕이 보는 앞에서 목이 잘려 죽는다. 그의 이름은 이차돈. 신라가 불교를 받아들이고, 불국정토(佛國淨土)로 번성하기를 바랐던 이차돈의 죽음 뒤에는 대의와 명분이 있었다. 다수의 역사학자들이 지적했듯 법흥왕은 사람의 목숨을 하찮게 여기는 폭군과는 거리가 멀었던 인물이다. 그는 온화하고 합리적인 성품을 지녔던 것으로 전해온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 둘 중 한 사람은 “죽이라”는 명령을 내리고, 나머지 한 사람은 요절(夭折)이라는 비극을 맞을 수밖에 없었을까? 누구라도 궁금증이 생기는 건 당연하다. 신라사를 연구해온 사학계의 일부 학자들은 “반불교 세력인 귀족들을 제압해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방편으
경주시 효현동에 위치한 법흥왕릉을 찾아가는 길. 봄은 끝자락에 와있었고, 어디선가 여름을 재촉하는 라일락 향기가 풍겨왔다. 지금으로부터 1천500여 년 전. 어떤 신라인보다 먼저 불교가 설파하는 자비와 수신(修身)의 메시지를 제 삶 속에 녹여냈던 법흥왕. 왕릉에서 300m쯤 떨어진 길가에 차를 세우고 야트막한 산을 올랐다. 울울창창 소나무가 저마다 훌쩍 큰 키를 자랑하며 법흥왕의 유택으로 가는 길을 호위하듯 서있었다. 불심 깊은 사람이 본다면 그 소나무들이 큰스님을 보좌하는 동승(童僧)처럼 느껴질 터였다. 경주학연구원 박임관 원장은 법흥왕 시절에 관해 이런 이야기를 들려줬다. “이차돈과 법흥왕이 생존했을 당시의 신라 사람들은 주로 하늘에서 강림한 조상신을 믿었어요. 그게 아니면
`불교`를 말하지 않고서는 신라를 온전하게 설명하기 어렵다. 이는 많은 역사학자들이 공감하는 명백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신라의 불교를 말하기 위해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은 이차돈과 법흥왕이 아닐까? 죽음을 통해 신라가 불국토로 가는 길을 연 이차돈과 최고의 권력자에서 승려로 존재를 바꾸는 법흥왕. 527년 발생한 것으로 전해오는 `이차돈의 순교(殉敎)`는 불교 공인이라는 가시적인 변화 외에도 신라사회의 많은 것들을 바꾸어놓았다. 본지는 이차돈과 법흥왕이 살았던 6세기로 돌아가 불교의 신라 유입과정과 변화양상, 신라의 당대 사회상과 생활상을 들여다보는 기획기사를 10회에 걸쳐 연재한다. /편집자 주 죽음으로 불교를 전파한 청년 이차돈 `그의 목을 베자 땅위로 꽃비가 내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