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인들이 노래를 잘 하는 것은 아니다. 음치에 박치, 몸치인 시인도 적지 않다. `음치시인`에게 노래는 자신이 아닌 다른 이들의 입을 통해서 들려오는 것. 그러나, 여전히 세상은 시인을 “노래하는 사람”이라고 부른다. 또한 많은 수의 독자들은 시를 노래와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생생한 과거와 마주한 듯한 사극드라마 촬영장 길 곳곳 자리한 시비와 아리랑비도 만나 왜군에 황망히 길 터준 신립장군 전설도 들으며 외국인들에게도 사랑받는 걷기 좋은 새재길 만끽 문경새재 입구에서 1관문까지 셔틀을 이용했다. 버스가 출발하며 운전수가 운영규칙이라도 되는 듯 작은 라디오의 버튼을 누르자, 반가운 노래가 흘러나왔다. `문경새재 아리랑`이다. 취재를 통해 알게 된 이야기들과, 발굴과 보존에 힘
“영천아리랑을 영천 사람이 모른다. 영천아리랑은 애초에 북한의 용천아리랑이었다. 적어도 1922년의 자료에서 확인한 바는 그렇다. `용천`을 잘못해서 영천이라 적은 것이다.” 김기현 교수의 말은 초반부터 충격적이었다. `남들이 몰라서 그러는데 사실은 이러하다`는 식으로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닌지라 사실관계를 확인해야 하는데, 우리가 이런 사실관계를 밝힐 때는 학술적으로 책임질 만한 전공자를 찾아야 한다. `민요전승론`이 전공인 김기현 교수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정부 지원을 받아 1986년에서부터 1983년 사이에 밀양아리랑 조사를 했다. 박춘석 씨의 아버지 박남춘이라는 분이 밀양에서 기방을 했는데 기생을 시켜 레코드로 곡을 만들어냈다. 밀양 말로 부른 것이 아니라 서울
섬진강 서쪽에서 주로 불린다고 하여 `서편제`라 부르는 소리에 대해 우리가 아는 바는 얼마나 되는가? 구절이나 가락을 아는 이는 별로 없다. 그러나 호기심만 생긴다면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영화가 있기 때문이다. 영화 한 편이 세기말을 휩쓸고 다음 세기로 넘어와 다음 세대의 기억으로 든든히 자리잡기까지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답은 간단하다. 영화가 있었다. 새재길 금하굴에 전해지는 `지렁이설화` 현대적 상상력 더해 새 이미지로 재생 `문경` 배경의 소설·드라마 탄생도 기대 문경아리랑은 결국 `길`의 이야기 소설 `반지원정대`·웹툰 `신과 함께` 등 토속적 신화 인물 캐릭터화 시도해볼만 아리랑은 노래다. 그래서 고유의 리듬과 음악성을 배제하고 말이나 언어를 통해 미
관광 해설자 이춘자 씨에게 물었다. 문경새재를 찾은 관광객들은 어떤 식으로 문경아리랑을 접하고 가게 될까? “아시다시피 옛길박물관에 아리랑 상설 전시 공간이 있고요. 문경새재 옛길 2관문에 또 문경 아리랑 비석이 있어요. 비석 옆에는 아리랑이 흘러나오는 스피커가 있어서, 자연 속에서 아리랑을 눈으로 보고 귀로도 들을 수 있죠.” 문경시는 실제로 얼마 전 박달나무를 새로 심었다. 생태공원을 들러 가지 않는 관광객들도 문경의 명물인 박달나무를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관광 해설자 입장에서도 더 자연스럽게 문경 아리랑의 대표사설을 소개할 수 있어 좋다고 한다. 문경시에서 성황리에 매년 열리는 축제는 `달빛 사랑 여행` `전통 찻사발 축제` `맨발로 걷기 대회` 등이다. 사과와 오미자, 한우축제
그간 `문경아리랑`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은 고윤환 시장이 지난 16일 본지와 인터뷰를 가졌다. 문경아리랑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이유에서부터 향후 계획까지를 가감 없이 털어놓은 고 시장과의 인터뷰를 게재한다. 아리랑 정신 깃든 새재 입구에 아리랑무형문화센터 만들어야 악보집·음반 제작 등 활발한 홍보 세계화포럼 개최로 위상 제고 한몫 아리랑도시 목적은 `대동과 상생` 시민 동참으로 시너지 효과 기대 - 문경시를 대표할 만한 이미지중 왜 하필 `아리랑도시`였는지요. △ “사람에게 정체성이라는 것이 있듯이, 지역도 그 지역만의 정체성이 있게 마련입니다. 양반의 고장 안동, 삼백의 고장 상주처럼 그 도시의 특성에 부합되는 이름이 있는 반면, 문경시의 경우
여행은 세상을 바꿔왔다. 떠돌던 수렵채취의 무리가 농사를 배운 것부터 그랬고, 완전히 다른 종류의 물질을 접할 때도 그랬다. 고대 영웅들이 무리를 엮어서 세력을 규합하는 방식도 여행이었고,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고대국가의 종교 또한 이역을 다녀온 고승들의 여행을 통해 변화하고 다듬어졌다. 고착된 문화가 변화의 기회를 맞을 때는 여행자의 힘이 숨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마르코 폴로는 몽골제국 체류담을 `동방견문록`으로 남겼고, 앙투안 갈랑은 17세기에 중동을 여행하고 18세기에 `아라비안나이트`를 전했다. 유행 수준이 아니라 문화가 새로이 생겨나는 수준의 변화에 이들의 여행이 기여한 바는 엄청나다. 우리 땅에 나타난 여행객은 돌아가서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는 것이다. 전통문화 확산의 첫
문경아리랑 전승자인 송영철, 송옥자 두 분만큼 한 많고 두 분만큼 민요를 꾸준히 사랑한 사람들이 없었을까? 경상북도를 통틀어 이런 분들이 왜 없겠는가. 단지 이 분들이 서로 모른 채로 장터와 터미널에서 스쳐지나갔을 뿐이다. 그 우연을 필연으로 만들어낸 힘은 따로 있었다. 문경아리랑보존회까지 매개역할 한 문경문화원 이창교 前 원장 항토민요경연대회·농악경연대회 등 전국 최초로 행사 만들어 보급 공로 전통-현대음악 공존하는 다양한 시도로 재해석된 아리랑, 문화콘텐츠 역할 기대 `향토민요경창대회`라는 이름의 무대는 한 사람의 희생 없이는 나올 수 없는 것이었다. 바로 이창교 전 문경문화원장이다. 이 원장은 1985년도부터 2003년까지 18년간 문경문화원을 매우 주도적이고 도전
송옥자 씨가 송영철 옹의 노래를 접한 것은 1997년도 여름의 일이었다. 문경문화원이 주최한 민요경창대회였다. 한 노인의 투박한 노래를 듣다가, 몇 년 전 시에서 제작해 마을회관마다 배포한 테이프에서 들은 소리를 기억해냈다. “4년 동안 마을 부녀회장을 맡고 있었어요. 그때 시에서 홍보용으로 제작된 테이프를 나눠주었는데 거기에 송영철 옹이 부르신 문경아리랑이 있었어요.” 그때까진 송 씨도 그저 민요를 좋아하던 마을 주민의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송 씨는 다른 사람들과 달랐다. 민요를 듣는 남다른 귀가 있었다. 그런 끼를 타고난 경우였다. 송 씨는 어릴 적부터 민요를 배우고자 했지만 번번이 장애를 만나온 인생이었다. 이 좌절은 송 씨를 우울증까지 몰고 갔다. 병원에서는 송 씨에게 `좋아하는 일을
문경까지 가는 길은 아리랑의 뿌리를 찾는 일 만큼이나 멀었다. 아침 7시에 포항역에서 출발해 문경 시내에 위치한 점촌역까지 4시간이 넘게 걸렸다. 버스와 기차를 여러 번 갈아타야했다. 아리랑의 기원을 찾는 일 또한, 갈아타기의 연속이었다. 어떤 이들은 문경아리랑이 경복궁 중수를 계기로 생겨나서 퍼졌다는 것으로 그 기원을 설명하려 한다. 그러나 헐버트가 채보한 서양식 악보에서 문경새재 대표 사설 한 구절을 확인한 것만으로, 그것이 곧 문경아리랑이라 쉽게 단정 지을 수 없고, 경복궁 중수라는 하나의 사건만으로 문경아리랑의 기원을 설명한다는 건 무리가 있다. 연못에서 산신령이 나타나 “네가 잃어버린 도끼가 금도끼냐? 은도끼냐?” 물어올 때, “금도끼가 바로 제 도끼입니다”하고 싶은 마음이 누군들 없겠는
2012년 12월 5일,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민요 `아리랑`이 유네스코 무형문화재로 등재되면서부터 아리랑과 관련 있는 지방자치단체들의 관심이 보다 뜨거워졌다. 지역 사회의 아리랑 주도권싸움 또한 심화됐다. 그러나, 그로 인해 다양해야 할 아리랑의 저변이 축소되고 획일화 될 것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실정이다. 본지는 서양식 악보로 가장 먼저 세계인들에게 대표 사설 일부가 소개된 아리랑임에도 불구, 다른 지역 아리랑에 비해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문경아리랑`의 가치를 소개하는 기획기사를 연재한다. “문경아리랑?” 문경에서 태어나 청년시절을 보낸 이 들이 “문경아리랑을 아느냐”는 질문에 보인 반응이다. 갑작스러운 물음을 접한 이들은 하나 같이 “웬 아리랑 얘기냐”는 표정을 지었다. 아리랑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