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가 가니 또 다른 한 해가 온다. 절기상으로도 세상사 흐름으로도 크게 새로울 것 없이 동일한 패턴으로 흘러가는 것이니, 중장년층에게는 연말연시가 그리 대단할 리가 없다고 본다. 연말연시를 무언가 특별한 계기로 삼아 장사를 잘 해보자거나 공부를 잘 해보자는 등의 작정을 하는 사람들에게나 큰 의미를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 삶이 길어져서 80년이라 해도 춘하추동을 80번 정도만 겪어 볼 수 있고, 많은 이들이 몇 십번을 겪지 못하고 떠나는 경우도 많다는 것을 떠올린다면 무언가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또한 매사에 겪는 예측불허의 사건과 위험들을 생각한다면 우리의 삶 하루하루가 소중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1년과 하루가 어떻게 결정되는 것인가? 지구의 자전속도는 24시간으로
그제 밤새 쌀쌀하다고 느꼈던 호텔방이 어제 밤은 좀 더 훈훈해졌다. 호텔에서 난방을 좀 더 강하게 했다기 보다는 내 스스로 창문커튼 틈을 없애 밖으로부터의 차가운 공기를 차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곳에서는 두꺼운 벽두께 때문에 바깥창문과 내부 벽면 사이의 창문턱이 50cm나 되고, 방쪽으로 보통 두 겹의 커튼을 치고 있다. 하나는 망사커튼으로서 난방열의 외부유출을 막게 스팀 위로 창문만을 막고 있다. 또 하나는 두꺼운 커튼으로 창문 양측에 묶여져 있는데, 이를 치게 되면 스팀까지도 가리게 되므로 장식용으로나 쓰이는 것 같다. 울란바토르의 도심난방은 지역난방형태로 울란바토르시의 대형 파워플랜트에서 공급되는 것이다. 석탄과 석유가 싸게 생산되므로 몽골에서는 전기와 난방은 잘 공급되는 편이다. 아침
12월 들어 제법 쌀쌀해진 포항의 초겨울을 뒤로 하고 몽골행 비행기에 올랐다. 3시간여 비행 끝에 울란바토르의 칭기즈칸공항에 도착하니 온통 흰색의 눈과 얼음이다. 낮기온이 섭씨 영하 12도이지만 이곳으로서는 그리 춥지 않은 날씨라고 한다. 작년 이맘때 낮기온이 영하 18~20도였는데, 요사이 풀렸다고 한다. 몽골은 땅덩어리가 우리 한반도의 7배 반이나 되지만 인구는 300만명이다. 여기에 더하여 20만명 이상이 한국을 포함한 외국에 체류하고 있고, 중국의 내몽골 자치구에 400만명의 몽골족이 살고 있다고 하니 전세계의 몽골인의 수는 800만명은 될 것이다. 물론 중국의 몽골인들은 이미 중국화되어 몽골을 조국으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한다. 호텔 안은 한국의 아파트만큼이나 따뜻하다. 도심의 건물들은 각자
요즈음 동네 마트 등에 외국인들이 꽤 눈에 뜨인다. 인근에 대학들이 있어서 외국인교수나 학생들이 대부분이라고 생각되지만, 그렇지 않은 분들도 포항을 많이 찾는 것 같다. 눈에 뜨이는 외국인들은 한국인과 외향이 좀 다른 분들이지만 구별이 힘든 일본인이나 중국인들도 꽤 있을 것으로 보아진다. 외국인들과 비교적 잘 연락하면서 지내는 편인 필자의 경우에는 만났을 때`하이, 하우아유 두잉?`하며 인사를 건네기도 하지만 약간 시간을 내서라도 아이스크림을 먹자고 청하는 경우도 흔하다. 포항에는 몇 개의 국제화된 대학들이 있어 외국인 교수나 학생들이 다른 어느 도시보다 많은 곳이라고 생각된다. 물론 결혼해서 한국에 온 외국인이나 산업전선에서 일하는 분들도 많이 있을 것이다. 물론 그대로 두어도 잘들 적응해 지내는
경북도청의 신도시로의 이동이 임박해 있다. 도청의 위치가 대구시절보다 더욱 멀어지게 된 포항과 경주시민들로서는 도청 제2청사가 인근에 개청하기를 기다리고 있다. 도청의 이전이 결정되고 건물들이 다 지어진 상황이므로 포항과 경주시민들도 경북인으로서 신도청소재지가 경북도의 상징적인 장소이자 행정서비스의 중심으로 잘 발전되기를 바랄 뿐이다. 이러한 가운데 경북도에서 동남권의 어려움 해결을 위해 환동해발전본부 설치를 계획 중이라니 다행이라고 본다. 이러한 결정의 가장 큰 배경은 인구산업밀집지역과 거리가 먼 북부지역에 새로 자리잡을 도청이 동남권 지자체, 기업, 그리고 주민들의 왕래에 큰 불편과 불만을 초래하기에 이에 대한 완화차원 일 것이다. 또한 경북도의 미래의 발전을 위해서도 국제항만과 어업전진기지들이
KTX의 개통으로 포항에서 수도권, 주요 대도시, 인천공항 등으로 오가는 시민들의 편의성이 크게 향상되고 물류비용절감과 관광산업의 활성화로 지역경제가 크게 발전할 것이라고 시민들은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빨대효과로 인한 지역경제 쇠퇴를 염려하는 이들도 많다. 백화점, 명품아울렛, 병원 등이 주요 대상일 것인데 특히 포항의 경우는 수도권의 영향만이 아니라 KTX 다음 정차역으로 30분 안팎에 도착할 수 있는 동대구역 역세권 개발의 영향이 지대할 수 있으므로 이에 대한 지속적인 대비가 있어야 할 것으로 본다. 프랑스의 경우, 고속철도 개통 후 무박여행이 종전 25%에서 60%로 증가했고 수도권 중소도시에 거주하면서 파리로 통근하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수도권 집중을 가속화한 측면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지방
한 친구가 오랜만에 저녁이나 하자며 양덕동 우리 아파트 후문 앞에 오후 6시 30분까지 도착할 것이라고 전화를 해왔다. 하지만 퇴근시간이라서인지 7시가 넘어서 도착했다. 평소 도심에서 20분 걸리는 거리를 1시간도 넘게 걸린 것이다. 교통체증에 의한 운전자들의 스트레스도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지만, 하루 30분의 시간낭비가 1년이면 183시간이 되고, 평생을 80년으로 보면 1만4천640시간이 된다. 이를 53만 포항시의 인구로 곱해보면 총체적으로 어마어마한 시간의 낭비이고, 이를 경제활동으로 계산한다면 엄청난 금액이 될 것이다. 서울에서 이 정도의 체증은 일상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포항은 중소도시가 아닌가? 도시가 좀 더 체계적으로 개발되고, 공공교통이 발전되면 이러한 교통체증이 크게 줄어들
텔레비전에서 해병대 입영장정들의 입소행사를 지켜보았다. 요즈음은 연예인들이 같이 입대하고 훈련받는 프로그램이 있어 가끔 보고 재미있어 했지만 이렇게 입영문화제로 불리는 입소식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예전엔 부모나 애인이 입영부대 안까지 따라 들어와 작별인사를 하는 경우도, 입영문화제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20대에서 30대, 가끔은 40대 중반 정도의 눈에 익은 연예인들이 일반 지원병들과 같이 훈련을 받기에 재미있어는 했으나 `이것은 가짜야` 하는 생각이 컸던 것도 사실이다. 힘든 유격훈련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군대생활 어려움이 어찌 훈련 때문이더냐?`라며 비평적이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로 인해 몇 십년전 필자의 군생활, 잊혀졌던 장면과 에피소드들이 떠올라 잠시 회상에 잠기기도
지난 주말 영덕군 인근 바닷가를 방문한 김에 약간 시간이 남아 한 시간 정도 바다낚시를 할 기회가 있었다. 준비하고 간 게 아니므로 낚싯대 하나 빌려서 운동화 신은채로 바윗돌 위를 조심스럽게 건너뛰어 파도가 이는 최전방으로 나아갔고 친구가 주어온 고동을 깨어 낚시 줄을 던져보니 의외로 고기들이 잘 잡혔다. 대개가 길이 10㎝ 정도의 놀래기였고 조그만 복어도 한 마리 올라왔다. 나중에 20㎝ 넘어 보이는 고래치를 한 마리 낚아 올리니 같이 간 친구가 대단하다고 추켜 세운다. 이 친구는 이 바닷가에서 자라고 직장도 인근이라서 바다에 대해서 잘 알았고, 항상 차에 낚싯대를 두어개 준비해 다니고 있었다. 이 친구도 그 사이에 우럭 몇 마리를 낚아 올렸고, 내가 잡은 것 까지 가져가 회를 쳐 내었다.
좀 일찍 잠자리에 들기도 했지만 깨어나니 새벽 2시 30분이다. 네팔시간이 한국시간보다 3시간 15분 늦으므로 한국이라면 기상시간이다. 좀 지나니 개들이 짓기 시작하는데 대여섯 마리가 크고 작게 몇 시간을 짖어댄다. 이곳 개들은 낮에는 잠을 자거나 비실대지만 밤에는 사나워 진다고 한다. 아침이 되니 새소리가 요란하고 어디서 경전 읽는 소리가 들린다. 필자가 머무는 동네는 도심에서 약간 벗어난 교외지역인데 지반이 단단해서 지진 피해를 별로 입지 않았다고 한다. 건물들은 대개 3~4층인데 옥상위로 한층 더 높여 물탱크 얹은 자리가 있어 그 곳에 올라가니 사방이 잘 보인다. 여기서 일출을 감상했다. 남서쪽으로는 흰눈 덮힌 히말라야의 준봉들이 안개에 싸여있다. 아침식사 후 도시에서 좀 떨어진 지진피해
네팔행 비행기는 빈 자리 없이 꽉 차 있었다. 이번 비행기는 직항이라서 인천공항에서 이륙 후 6시간 30분 후에 카트만두의 트리브반공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올 4~5월의 대지진 이후 많은 이들이 복구지원 및 봉사활동 차 이 곳을 찾기에 네팔정부 입장에서는 나쁠 것 없지만 너무 해외 의존도가 높고 자체노력이 부족하다는 의견도 있는 모양이다. 비행기 안에는 60여명의 Good Friend Korea 단원들이 유니폼 차림으로 탑승하고 있다. 이들은 몇 주 동안 텐트에서 자며 심리치료 봉사활동을 한다고 한다. 지난달 말 네팔의 새 헌법이 전국을 7개 주로 나누게 되자 네팔 남부의 인도계 소수민족인 마데시족과 타루족이 자기들에게 독립된 주를 달라며 시위를 일으키고 인도는 국경을 봉쇄하여 인도에서 네팔로 반입
부모님 계신 항동에 오면 가벼운 옷차림으로 동네를 돌아보게 된다. 그린벨트로 묶여 있던 지역이기도 하지만, 빌라단지 자체가 나무들로 무성해서 서울이면서도 서울 같지 않은 곳이다. 우선 단지 중앙대로에는 마로니에 닮은 키 큰 후박나무가 넓적한 잎사귀를 달고 여러 그루 서 있다. 향나무도 많고 감나무, 대추나무, 석류나무도 많다. 부모님께서는 평생을 지방 소도시에서 사셨는데 직장을 은퇴하시고 60대 중후반에 큰 아들이 있는 서울로 오셨다. 한동안은 마포의 한 아파트에 거주하시다가 손자들이 자라나자 좀 더 고향을 닮은 항동으로 이사 오게 된 것이다. 부모님댁 전방 길 건너에는 푸른수목원이 있다. 하지만 수목원이 생기기 이전에도 이곳은 유명한 항동저수지와 항동철길이 있고 밤나무 우거진 산줄기와 논밭이 있는
오랜만에 포항 여남동 바닷가를 방문했고, 그곳 언덕배기에 높게 지어진 한 커피숍을 찾았다. 이곳은 해안가에 위치한 나지막한 수림 우거진 야산이었는데, 요즈음은 다양한 건물들이 들어차고 있다. 이 커피숍은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가장 최근에 지어진 건물이다. 여남동은 환호동 종점에서 좀 떨어진, 과거에는 도심에서 먼 변두리였으나 지금은 도심해변이 되어 있다. 이곳 비탈에서는 영일만이 가득 내려다보인다. 밤에는 포스코의 야간조명과 포항 시가지의 불빛이 아름답다. 영일만은 고대로부터 해류의 방향에 따라 이러한 지형이 완성되었을 것이다. 해류의 영향으로 해안에는 사구가 생기고 침식이 진행되기도 한다. 이는 우리 인간의 시간과는 관계없을 듯 보이지만 문득 보면 언제 그랬나싶게 놀라운 속도로 진행됨이 아이러니이
은퇴한 선배교수가 사진 두장을 카톡으로 보내왔다. 흥해읍 칠포1리 언덕에서 찍은 이른 아침의 바다풍경이다. 하나는 일출이 구름 사이로 가렸지만 햇빛이 하늘로 치솟는 광경이고, 또 하나는 해 뜬 후의 백사장과 바다풍경이다. 필자도 이러한 풍경을 본적이 있다. 몇 년에 한번 꼴로 바닷가에서 아침을 맞게 될 때 보던 풍경들이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고 더구나 여행 중에는 잠이 없는 편이라서 2~3층 건물 창가에서 깜깜한 바다를 바라보며 어둠에서 차차 푸르게 물들며 밝아지는 바다풍경을 몇 시간씩 바라보곤 한다. 새벽 4시의 깜깜한 바다 멀리서 한점 밝은 빛을 내는 것은 오징어잡이 배이다. 좀 작게 붉은 빛을 내는 것은 화물선이다. 주변이 어두운 짙푸름에서 문득 밝음으로 바뀌며 아침 해가 떠오르는 것이다. 때로는
포항은 도농통합시로서 면적이 서울시의 1.8배에 이를 정도로 넓지만 인구는 53만인 중소도시이다. 한반도 동남해안에 위치하여 수도권에서 먼 도시이지만, 포항에는 1970년대 초 포스코가 가동되고 1980년대 중반 한국 최고수준의 공과대학인 포스텍이 생겨서 지방이면서도 특색 있는 도시로 발전되었다. 하지만 수도권 및 다른 대도시와의 연계는 매우 불편했었다. 서울 가기도 그러하지만, 외국 한번 나가려면 5시간 넘게 버스를 타야 하는 등 스트레스가 대단했는데, 올 4월에 KTX가 연결되었다. 이는 포항으로서는 대단한 변화이고 교직에 있는 필자로서도 수도권 회의 참석, 학생모집, 해외연구여행 등에서 불편함이 크게 사라지는 변화를 가져오게 된 셈이다. 대부분의 지방도시들의 경우, 수도권과의 연결만이 문제가 아니라 도
필자는 몇 년 전부터 국제개발대학원생들을 대상으로 강의하고 논문을 지도하고 있다. 진작부터 국제개발에 관심이 커서 학부생들과 개발도상국을 방문하여 경제개발, 도시환경, 주거, 농업 등의 주제로 현장조사와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지만 이제 여러 국내외 대학원생들의 논문지도를 하다 보니 좀 더 심각하게 개발과 보전, 성장과 분배, 빈곤, 혁신 등에 관해 생각해 보게 된 것 같다. 우리 한국의 장년 및 노년세대들은 저개발국의 빈곤을 몸소 경험했고 국가발전 및 가족의 생계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었다. 지난번 본교에서 열린 새마을아카데미의 수강생들인 개발도상국 공무원들을 통해서 이미 확인한 바도 있지만, 우리 한국의 발전은 이미 많은 나라의 본보기로 여겨지고 있다. 하지만 한국의 급속하고 지속적인 성장의
얼마전 2015년도 새마을아카데미가 한동대에서 외국인 학생들을 대상으로 열렸다. 필자는 이 아카데미의 기획과 진행을 총괄하기에 바쁜 5일간의 일정을 보냈었지만 35명의 수강생들도 방학의 마지막 주를 바쁜 가운데서도 보람차게 보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한동대에서 새마을아카데미를 지속적으로 여는 것은 새마을운동의 발상지라고 할 수 있는 `문성리`가 포항시의 한 마을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새마을운동에 관심 있는 교수와 연구원들이 있고 이를 배우려하는 외국인 학생들이 있기 때문이다. 필자의 경우에도 새마을운동은 1980년대부터 관심을 갖던 주제였고 포항에 부임한 이후 학생들을 위한 주요 강의 및 연구주제였다. 첫날 입학식에 이어 관련 강의들이 이틀간 진행되었다. 지역개발 전문가인 필자가 주요 강의를
국제개발대학원에서 국내외 학생들을 지도하다보니 글로벌 이슈 관련의 다양한 논문주제들을 다루게 된다. 그중 주된 주제가 `농업`과 `지속가능한 개발`에 관한 것이다. 제조업 및 고부가가치산업 발달이 미진한 개발도상국의 경우 농업개발은 주민들의 굶주림을 면하게 하려함이 우선의 목적이지만 새로운 농업기술의 도입을 통해 지역경제를 발전시키고 이미 비대해진 대도시의 빈곤, 환경오염 등의 문제들을 해결함이 또 다른 차원의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지속가능한 개발은 유엔을 비롯한 국제기구나 각 국가에서 많은 신경을 쓰는 주제이다. 개발과 보전, 이 상반되어 보이는 개념을 병립할 수 있도록 함이 지속가능한 개발의 목표이기도 할 것이다. 우리의 삶의 질을 유지할 수 있도록 개발을 해나가면서도 자원을 절약하고 환경에
알코브호텔은 호치민 탄손넛공항에서 5분 거리에 있다. 규모는 작지만 깔끔한 객실과 아름다운 정원 및 로비를 지니고 있다. 필자가 일년에 한 두 번 호치민에 들르면 머무는 곳이며 제자들이 운영하는 곳이다. 이곳 호치민은 1975년 북베트남에 의해 함락된 남베트남의 수도였다. 1973년 평화협정에 의해 미군과 한국군이 철수한 후 2년도 못되어 남베트남은 수도인 사이공에 북베트남 탱크들이 들어닥치며 함락되었다. 지금도 중심가에는 과거 정부건물들이 전쟁박물관으로 남아있다. 이곳에는 사회주의 국가답게 거대한 공공건물과 국가를 홍보하는 광고판들이 많다. 이제 베트남은 일당체제의 사회주의 국가임에도 자본주의 요소들을 받아들이고 외국과 교역하며 경제발전에 매진하고 있다. 필자가 학생들과 이곳을 자주
호치민의 탄손넛공항에서 입국수속을 끝내고 짐을 찾고 나오니 제자들이 마중을 나왔다. 한국과의 시차가 2시간이라서 아직 저녁시간이 안되어 호텔에 여장을 풀고 제자들이 창업한 건설사인 NIBC그룹 사무실로 갔고, 베트남 특유의 아이스커피 `카페 쓰어다`를 마시며 회사근황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이들이 짓는 모델하우스들을 보니 50~60㎡ 정도의 평면으로 좀 좁아 보이기는 하지만 멋지게 디자인되고 설비되고 있었다. 한 유닛 당 가격도 2만5천~3만달러 정도로서 비교적 싸다. NIBC 구성원은 창업CEO인 한동대 출신 몇몇, 후에 합류한 후배들, 그리고 젊은 베트남인 전문가들로 구성되어 있다. 어두워질 무렵 거세게 스콜이 쏟아진다. 대절된 마이크로버스를 타고 인근의 유명하다는 쌀국수집으로 갔다. 가격은 그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