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 그림은 항상 그려졌어요. 사는 게 고통 아닌 때가 없었나보죠.”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찰리 채플린이 말했던가. 최은미의 단편들을 읽고 나면, 문득 이 말이 다시 떠오른다. 고단한 일상의 한순간에 희망의 메시지처럼 붙들고 싶기도 했던 저 말이, 그러나 다시 보니, 더욱 서럽다. 멀리서 바라보는 코미디만큼 서글픈 것이 또 있었던가. `희망`이라는 말처럼 허망한 것이 또 있었던가. 그 안에 파묻혀 있는 이들에겐 더없이 고통스러운 날들의 연속이지만 한 발짝만 물러나도 한 편의 소극(笑劇)이 되어버리는, 그래서 더욱 서글픈 삶의 모습들. “어떤 곳을…. 지옥이라고 하나요.” (….) “사방이 막혀서 빠져나갈 기약이 없는 곳. 문헌에는 그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무
역사상 최고의 전기 작가이자, 심리소설의 대가 슈테판 츠바이크가 생전에 완성한 유일한 장편소설 `초조한 마음`(문학과지성사)이 출간됐다. 오스트리아 빈의 유복한 유대계 가정에서 태어난 츠바이크는 역사적 통찰력과 역사적 인물에 대한 심도 깊은 해석으로 발자크·스탕달·톨스토이·에라스무스 등의 전기를 쓰며 세계 3대 전기 작가로서 명성을 떨쳤을 뿐만 아니라, 인간 심리와 무의식에 대한 섬세한 분석과 묘사가 담긴 소설로 필력을 인정받았다. 1920년대와 1930년대에는 유럽 최고의 작가로서 “세계에서 가장 많이 번역된 작가”였다. 츠바이크는 시, 중·단편 소설, 전기, 희곡 등 여러 장르에서 활발한 작품활동을 했으나 장편소설은 많지 않다. 그나마도 다른 작품은 사후에 유고 더미에서 발견되어 출간된 것이고, 츠바이크
삶의 체험에서 우러나는 진솔한 언어와 빼어난 감수성으로 전통 서정시의 감동을 수많은 독자들에게 선사해온 김용택 시인의 신작시집 `키스를 원하지 않는 입술`(창비)이 출간됐다.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사라지는 것들과 곁에 남아 있어주면 좋겠는 것들”(이철수, 추천사)을 애틋한 그리움으로 노래하며 자연의 숭고한 아름다움과 그 자연과 어울려 살아가는 삶의 존귀함을 일깨운다. `섬진강` 연작 4편 새롭게 수록 하찮은 존재들의 무한한 가치 노래 한국문학 기념비적 성과로 평가 우주적 질서를 관조하는 고요한 사유의 세계와 물질적 욕망에 포섭돼 삶의 진정한 가치와 참된 행복에서 점점 멀어져가는 이 시대를 통렬하게 일갈하는 우수 어린 목소리는 김용택 시의 새로운 진경을 이룬다. 우선 눈에 띄는 점
신화와 이성은 원래 동일한 의미로 사용됐다. 플라톤 이후 둘은 대립관계에 놓였고, 서양철학은 로고스의 역사로 이행했다. 신화를 지워낸 공백에 써내려간 이 역사는 어쩌면 말소의 역사요 왜곡의 역사다. 그러나 예술의 토양이 신화라는 점을 기억한다면, 예술은 여전히 지워지지 않은 신화적 흔적을 가리키는 또다른 이름이 될 것이다. 하이데거는 그 흔적이 오히려 지금까지 역사를 가능하게 한 근원이라는 것, 또한 역사를 붕괴시킬 수도 있는 심연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유를 전회하며 또다른 시원을 모색해야 한다고 말했을 때, 그는 이 심연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새로운 철학의 가능성은 바로 이 심연 속에서 찾아야 했다. 신화의 흔적, 예술은 `존재의 흔적`이 새겨진 철학의 마지막 가능성이었다. 하이데거에게 예술
2006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오르한 파묵의 작품은 국내에 10종이 소개됐고, 그 책들은 모두 이난아(터키 문학 박사, 한국외대 강사)가 번역했다. 그녀가 10여 년간 파묵의 책을 번역하고 연구하고, 또 그와 교류해 온 결과물로, 파묵에 대한 국내 최초의 연구서를 펴냈다. 오르한 파묵은 세계 문학에서는 변방이라고 할 수 있는 터키의 이스탄불에서 태어나 전 세계 문학계의 거물로 우뚝 선 인물이다. 이난아는 `오르한 파묵-변방에서 중심으로`에서 그의 데뷔작인 `제브데트씨와 아들들`에서부터 최근작인 `순수 박물관`, 그리고 그의 에세이`이스탄불·도시 그리고 추억`까지, 그의 모든 작품을 심도 깊게 분석한다. 또한 이스탄불이라는 도시가 만들어 낸 작가, 그 작가가 펼쳐 보이는 이스탄불을 중심으로 파묵이 살아온
우리의 고단한 하루를 버티게 하는 마음의 힘은 무엇인가. 지난 10년간 열세 권의 책을 내며 대중과 활발하게 소통해 온, 정신과 전문의 하지현이 열네 번째 책 `예능력`(민음사)을 펴냈다. 도시에서 일어나는 문화현상을 통해 도시인들의 심리를 살펴보거나, 소설 형식의 심리 치유서를 쓰는 등 매번 새로운 소재와 형식으로 대중 심리서의 새로운 장을 열어 온 저자는 이번에는 텔레비전 속 예능 프로그램 분석을 통해 예능에서 발견할 수 있는 `즐거움의 심리 구조`를 밝혀내고, 그 심리 구조를 어떻게 우리 일상에 적용해야 인생을 즐길 수 있는지 알려 준다. 일상 속에서 그저 텔레비전을 보면서도 삶을 점검하고, 나를 돌아보며, 삶의 변화를 위해 노력할 수 있다. 저자는 멘토와 힐링을 멀리서 찾지 말라고 말한다.
문학평론가이면서 출판인, 저술가이면서 독서가로 출판 기획에서 교정 실무까지 `책`과 `글`에 있어 명실상부 `전인(全人)`이라 일컬을 수 있는 김병익의 산문집 `조용한 걸음으로`(문학과지성사)가 출간됐다. 오랫동안 세상 일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찬찬히 써온 글들을 묶어낸 이 책은 문학과 세상에 대한 에세이들, 동료 문인들에게 보내는 축사와 추모사, 근래 읽은 책들에서 연유한 소감으로 크게 세 개의 부로 갈무리돼 있다. 젊은이들이 품은 절망이 자산이 되고 희망이 되기를 바라는 글로 문을 열고, 이제 벤치에 앉아 쉬며 인생의 허망함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며 안식을 취하겠다는 글로 책을 닫는 가운데 1부 `돌아보며, 바라보며`는 새로운 세대의 등장을 반기고 변화된 분위기들의 낯섦을 차분하게 짚어가는
2009년 2월 첫 출간 이후 200만 미국 독자들에게 사랑받으며 3년 넘게 베스트셀러 자리를 지켜온 `눈물의 아이들`(전 2권, 원제 Cutting for Stone, 문학동네)이 한국에서 출간됐다. 스탠퍼드 의대 종신교수인 작가 에이브러햄 버기즈는 `나의 나라`(1994)와`테니스 파트너`(1998) 두 편의 에세이를 통해 인간을 향한 애정 어린 시선과 생에 대한 따뜻한 긍정을 보여주며 이미 논픽션 분야에서 베스트셀러 작가로 입지를 굳혔다. 그럼에도 그는 소설이라는 전혀 새로운 성격의 글쓰기에 도전했고, 놀랍게도 탁월한 스토리텔링 능력을 보여주며 단번에 픽션 베스트셀러 목록에도 자신의 이름을 올렸다. `눈물의 아이들`은 종교인의 금지된 사랑과 한 가족의 파란만장한 운명을 다룬 대하소설이라는 점에서 콜
`낙타` 등 5편의 시로 1998년 문학동네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한 김충규 시인. 사물이 풍기는 죽음의 냄새와 고통의 미학을 치열하게 그려온 그가 2012년 3월18일,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아직 갈 길이 멀었던 그의 나이 마흔일곱이었다. 출판사 `문학의 전당` 대표를 역임했고, 계간 `시인시각` 발행인으로 바쁜 삶을 살면서 시쓰기도 게을리 하지 않았던 시인 김충규. 그가 세상을 떠난 지 일 년 후, 그가 남긴 마지막 시들을 모아 유고 시집을 내놓았다. 그가 이제 세상에 없다는 사실 때문일까. 시 곳곳에서 발견되는 죽음과, 그 이후에 관한 이야기가 유독 마음을 건드린다. 저렇게 살다 죽더라도 바람이 묘비명을 남길 일은 없듯 내 가련한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는 순간이 오더라도
힘든 시기다. 대인 관계도 힘들고, 경제적으로도 힘들다. 이럴 땐 한 발자국 물러서서 자기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좋겠다. 명리연구원 희실재 하국근 원장의 `내 삶의 그릇은 뭘로 채울까`(깊은솔)는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는 우리들에게 직설어법으로 건네는 삶의 지침서가 될 만한 책이다. 우리는 누구나 희망을 가슴에 안고 삶을 이어간다. 그 희망이 현실로 나타나든 그냥 꿈으로 남겨지든, 현실에서 좀 더 나은 삶을 영위하고픈 마음은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평범한 염원이다. 어떤 과정을 밟아서 나갈 것인가는 자신이 잘 알고 있겠지만, `등잔 밑이 어둡다`고 자신은 막상 깨닫지 못할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이럴 때 필요한 게 `사주`다. 사주를 통해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가 있고, 그렇
시대의 폭력에 짓밟힌 여성들의 삶을 강렬하고도 아름답게 그려낸 공선옥의 신작 장편 `그 노래는 어디서 왔을까`(창비)가 출간됐다. 소외된 주변부의 삶에서 눈을 떼지 않고 함께하며 이야기로 그들을 끌어안았던 공선옥의 작가적 역량은 이번 작품에서 진가를 발휘한다. 역사에서 소외되고 세상의 광기에 희생된 그녀들은 공선옥의 소설에서 비로소 꽃피웠다. 이 작품을 주목하고 작가 공선옥을 재조명해야 하는 이유는, 곯아가는 세상에서 여전히 문학이 있어야 하는 이유를 여실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 봄날, 우리를 대신해 울어주던 여자가 있었다. 소설은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1970년대 시골마을에서 시작된다. 투전판에서 돈을 몽땅 잃고 일자리마저 잃은 아버지는 정애에게 언어장애를 가진 엄마와 동생들을 맡기고 외지로 떠난다.
“독특하고 기괴한 설정에 있어서 카프카를 능가한다는 평을 받았는데 소설을 읽다 보면 카프카의 `변신`이 자꾸만 떠오른다.” `침대`를 번역한 정회성은 `옮긴이의 말`에서 이런 감회를 밝히고 있다. 이 책의 주인공 맬컴은 20년이 넘도록 침대에서 내려오지 않는다. 어른이 되는 것이 특별해지는 것이 아니라 정반대로 평범해지는 것임을 깨달은 그는 스물다섯 번째 생일 다음 날 침대로 올라가고, 7484일 후 기중기가 침대와 한 몸이 된 그를 들어 올려 집 밖으로 옮길 때까지 나오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살아가는` 대신 천천히 `죽어 가는` 것을 선택한 맬컴과, 그런 그를 지켜봐야 하는 가족들의 이야기. `침대`는 성장을 거부한 남자 곁에서 성장해 가는 가족들을 그리고 있는 독특한 성
선명한 언어와 유려한 이미지를 구사하며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동화적 상상력으로 개성적인 시세계를 펼쳐온 김성규 시인의 두번째 시집 `천국은 언제쯤 망가진 자들을 수거해가나`(창비)가 출간됐다. 5년 만에 펴내는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폐허에 다름 아닌 자본주의 사회의 폭력과 삭막한 “세계의 적나라하고 추악한 양상들을 땀내 나는 언어로 기록해나”(조재룡, 해설)가며 부조리한 현실의 이면을 새롭게 인식하는 깊은 사유의 세계를 보여준다. 몽환적 분위기를 자아내는 서정적인 목소리와 그늘진 삶의 비참한 풍경을 예민하게 포착해내는 냉정한 시선이 돋보이는 “처연한 아름다움과 절절한 울림이 있는”(송찬호, 추천사) 시편들이 불행한 삶의 고통 속에서 희망마저 잃고 살아가는 슬픈 존재들의 가슴을 어루만지며 깊은
프랑스와 아프리카 대륙을 연결하는 세 여성의 삶을 교차시키며 내면의 강인함에 대해 이야기하는 `세 여인`(문학동네)은 2009년 공쿠르상 수상작이자 국내 처음으로 소개되는 마리 은디아이의 작품이다. 세네갈계 프랑스 작가 마리 은디아이는 등단 이래 어떤 문학적 범주에도 속하지 않는 독보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해왔으며, 클래식하고 섬세한 문체와 현실적이면서도 환상적인 공간, 특히 작품 속에 스며 있는 기묘함으로 프란츠 카프카에 비견되기도 했다. `세 여인`은 세 편의 이야기, 세 개의 소우주 속에 담긴 세 여성의 운명을 그리고 있다. 그들은 모두 아프리카 대륙과 프랑스, 더 정확히 세네갈과 프랑스 사이에서 삶의 방향을 잃어버리고 방황하는 여성들이다. 오래전 가족들에게 회복될 수 없는 상처를 남긴 뼛속까지 이기적인
오늘날 독일문학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 “독일이 낳은 가장 위대하고 대담하고 야심 찬 문학가 (…) 둘도 없는 희곡작가였으며―둘도 없는 산문작가이자 소설가”(토마스 만)로 손꼽히는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Heinrich von Kleist, 1777~1811)의 중단편소설집 `미하엘 콜하스`(창비)가 출간됐다. 이 작품집은 표제작 `미하엘 콜하스`외에 `O. 후작 부인` `칠레의 지진` `싼또도밍고 섬의 약혼` `로까르노의 거지 노파` `주워온 자식` `성 체칠리아 또는 음악의 힘` `결투` 등 클라이스트 중단편 여덟편 전체를 완역해 묶어 냈다. 클라이스트 특유의 문체를 그대로 살리고자 문단 구분, 간접화법과 직접화법 등을 충실히 따라 옮기되, 잘 읽힐 수 있도록 세심하고 정확한 한국어 문장을 구
2012년 최고의 인문서로 꼽힌`피로사회`의 저자 한병철 교수(베를린 예술대학)의 책 `시간의 향기`(문학과지성사)가 번역·출간됐다. `시간의 향기`(2009)는 `피로사회`(2010)의 전작으로 현대사회에서 모든 시간이 노동의 인질이 되었다고 진단한다. 모든 시간은 일의 시간이고, 여가시간도 일의 시간을 준비하는 보조적 의미밖에 지나지 못한다는 것. 왜 나는 늘 시간이 없고 시간에 쫓길까? 왜 시간은 그토록 빨리, 그토록 허망하게 지나가버리는 것일까? 그토록 바쁘게 지냈음에도 어째서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을까? 나는 주어진 많은 시간을 요령 있게 활용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고 낭비하고 있는 것일까? 이 책`시간의 향기`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느끼고 있는 이러한 일상적 의문들에 대한 근본적인
“그 밤에 문득 나는 달에게 우리의 이야기들을 들려주는 짧은 형식의 글을 쓰고 싶어졌다. 그것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것이었으면 하는 마음도 함께 일렁거렸다.” `문득`이라 말했지만, 이 이야기들은 작가의 마음 한구석에서 꽃피울 날을 기다렸던 것 같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글, `달이 듣고 함빡 웃을 수 있는 이야기` `달이 듣고 고개를 끄덕거리는 이야기`를 엮은 짧은 소설집 `달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문학동네)는 작가 신경숙의 작품들 가운데 가장 경쾌하고 명랑한 작품집이 아닐까 싶다. “패러독스나 농담이 던져주는 명랑함의 소중한 영향력은 나에게도 날이 갈수록 매혹적으로 다가온다. 명랑함 없이 무엇에 의지해 끊어질 듯 팽팽하게 긴장된 삶의 순간순간들을 밀어내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인가.”-`작가의
`파리를 생각한다` `파리의 장소들` `프로방스에서의 완전한 휴식` 등으로 이어지는 저서에서 에세이와 인문학의 경계를 넘나들며 파리와 프로방스의 골목에 숨어 있는 `사색과 영감의 장소`들로 독자들을 이끌었던 사회학자이자 작가 정수복이 신작을 펴냈다. 그가 이번에 걸어들어간 곳은 특정 도시나 마을이 아닌 `책과 독서가들이 있는 시간과 공간`이다. 그에게 독서란 단지 `발`을 움직이지 않을 뿐, 언제나 `지금-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떠나 새로운 풍경과 사람들을 만나는 또다른 의미의 `산책`이었다. 그는 산책할 때마다 늘 가방 속에 책을 넣고 다녔고, 그가 산책하는 곳에는 늘 책과 책을 읽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의 산문집 `책인시공`은 여러 사람들이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 속에서 다양한
2009년 창비신인시인상을 수상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한 주하림(27) 시인이 첫 시집 `비벌리힐스의 포르노 배우와 유령들`(창비)을 출간했다. 등단 4년 만에 펴내는 이 시집에서 시인은 생경하고 감각적인 언어와 현란한 이미지가 톡톡 튀어오르는 환상적인 상상력의 세계를 펼쳐보인다. 내용과 형식 모두에서 돋보이는 색다른 시작법은 첫 시집의 강렬한 인상을 남기기에 충분하다. 주하림이 논리의 세계를 훌쩍 뛰어넘어 꾸려놓은 감각의 세계를 목격하다보면 어느새 시인의 언어에 실려 이국 그 어딘가를 헤매고 있는 독특한 경험을 맛보게 된다. 낯설기에 강렬한 시인의 언어는 논리보다는 감각으로, 기억보다는 인상으로 진하게 스스로를 각인시킨다. “드디어 빛 없는 세계다/나는 눈곱을 붙였다 뗐다 하며
지난해 출간한 장편소설 `레가토`로 제45회 한국일보 문학상을 수상하며 “항쟁세대의 고해성사라고 부를 만한 권여선 소설의 절정이자 한국 문학에서 기억의 윤리학이 성숙하고 있다는 증거”라는 평을 받아안은 권여선이 네번째 소설집 `비자나무 숲`(문학과지성사)을 펴냈다. 2010년에서 2012년에 걸쳐 발표된 중단편을 모은 이 책은 `시간과 기억`에 대한 작가의 천착은 여전하지만 앞선 작품 `레가토`가 `학생운동`의 절정인 한 시기의 기억을 불러낸 것이라면, 이번 소설집은 짧고 긴 인생들 사이에서 쌓고 지워가는 기억과 망각의 깊이를 통해 삶의 심연을 가늠하게 한다. 절대 잊지 못하리라던 기억을 깨우는 잔상들을 하나씩 좇아 힘겹게 불러내지만 그 또한 실제 `사건`과는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젊은 날 한 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