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 오신 봄비로 대지가 촉촉하고, 대기는 청명하다. 바람이 다소 강하게 불지만, 봄날의 정취를 완상하기에 모자람은 없다. 토평(土平) 들과 천변을 향하는 걸음걸이 가볍고, 콧노래 절로 나오는 봄날. ‘동심초’에서 시작하여 ‘4월의 노래’를 거쳐 ‘하얀 목련’을 지나 소월의 ‘못 잊어’로 마무리하는 홀로 ‘걷는’ 노래방. 창고 그늘 밑에 있던 젊은 농부가 슬며시 외면해주는 덕에 황망한 얼굴의 홍조는 겨우 모면한다.흡족하게 내린 비로 논과 밭이 모두 흐뭇한 표정이다. 마늘과 양파가 훌쩍 자라나고, 웃자란 청보리는 적잖게 넘어져 있다
석가족으로 정반왕과 마야부인의 소생인 고타마 싯다르타는 29살에 아내인 야쇼다라 공주와 아들 라훌라를 버려둔 채 출가한다. 한밤에 궁성의 담을 넘으면서 그의 흉중에 어떤 상념이 자리했을지 궁금하다. 자리를 보전하기만 한다면 군왕이 되었을 터, 무엇 때문에 6년에 걸친 고행의 길을 선택했단 말인가?! 유한한 생명을 가진 인간이 감내해야 하는 고통의 순환이 그토록 견디기 어려웠던가?!극한의 고행으로 깨달음에 도달하려던 고타마는 수행 방법을 바꾸어 해탈한다. 엄혹한 수행을 통해 카르마를 극복하는 방도는 자이나교에 고유한 것이다. 고타마는
종잡기 어려울 만큼 냉탕과 온탕을 오갔던 겨울이 마침내 봄에게 자리를 내준 교정에 개나리 노란 물결 넘실거린다. 성질 급한 홍매와 백매 시들어가고, 산수유와 살구꽃이 여기저기 화사한 자태 뽐낸다. 키 작은 큰개불알풀과 민들레, 냉이와 꽃다지가 앞다투어 봄을 맞이한다. 바야흐로 봄이다. 봄은 보는 계절이다. 산야에 넘쳐나는 형형색색의 장관(壯觀)이 우리의 몸과 마음을 사로잡는 기막힌 계절이 왔다.그러나 봄을 완상하기에는 마뜩잖은 소식도 있다. 대학입시가 끝난 지금 경향 각처의 신문에 오르내리는 ‘지방대 소멸위기’가 그중 하나다. 언론
지난 2월 초하루에 미얀마 군부는 아웅산 수치 국가고문을 축출하는 쿠데타를 감행한다. 쿠데타에 저항하는 미얀마 시민들의 열렬한 민주화운동은 오늘도 진행 중이다. 미얀마의 정치상황을 본래 궤도로 돌려놓기 위한 시민들의 목숨을 건 투쟁은 멈추지 않고 있다. 지금까지 최소 54명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1천700명이 넘는 시민이 군부에 억류돼있는 상황이다. 민주주의는 진정 피를 먹고 자라나는 것인가?!미얀마 시민들의 목숨을 건 민주화 투쟁을 보면서 맨 처음 떠오르는 사건은 1980년 5월 광주 민주화운동이다. 고립무원의 절체절명 상황에서도
지난 2월 28일은 61번째 맞은 2·28 기념일이다. 1960년 2월 28일 대구에서 타오른 민주주의를 향한 봉화가 나라 전체로 번진다. 부패하고 타락한 권력자 이승만의 예정된 부정선거에 저항하는 청춘들의 피 끓는 함성이 달구벌에 울려 퍼진다. 조병옥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급사하는 바람에 이승만은 당선이 확정된 상태였다. 그러나 자유당의 부통령 후보 이기붕은 장면 민주당 후보에 밀리는 형국이었다. 특히 대구에서 그런 양상이 강했다고 한다.올해처럼 1960년 2월 28일도 일요일이었다. 그날 장면 후보의 유세가 신천에서 예정되어 있
한국인은 언어유희에 능하다. 머리가 좋기도 하지만, 한국어에 동음이의어가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수의 언어유희가 동음이의어에 기초한 말장난에서 출발하는 것이 그것을 증명한다. 예컨대 내 작은 아이 이름이 ‘우연’이다. 사람들이 “우연이 어떻게 지내요?” 하고 물으면 이렇게 대답한다. “우연(佑鍊)이요, 우연(偶然)히 잘 있어요!” 우연이가 두 번 겹치면서 듣는 사람의 웃음이 터져 나온다. 이런 본보기는 끝이 없다.요즘에는 외국어까지 언어유희 대열에 합류하고 있다. 세계화의 물결이 우리 언어생활까지 넘보고 있는 셈이다. 그 가운데
2021년 2월 15일 새벽 백기완 선생이 세상과 작별했다. ‘회자정리’라는 말도 있지만, 있을 것 같지 않은 일로 여겨짐은 비단 나만의 소회는 아닐 성싶다. 그렇다 해서 내가 선생과 각별한 인연을 맺은 것은 아니다. 그저 먼 발치에서 선생을 보고 들으면서 마음에 들어온 두 가지만 회상하고자 한다. 인간사는 작은 기억과 그것의 누적이 희로애락의 원천으로 작용하는 바 크기 때문일 것이다.1987년 1월 초 ‘민중문화운동연합회(민문협)’ 새해맞이 행사인 단배식이 열렸다. 당시 한국의 민중운동은 ‘민주통일민주운동연합(민통련)’이 주도하고
대학시절을 돌이키면 맨 처음 떠오르는 것은 젓가락 장단과 거듭된 폭주(暴酒)다. 강의가 끝날 무렵이면 선배 가운데 한 사람이 쪽지를 보낸다. ‘고모집, 6시!’ 술집 이름치고는 정겨운 고모집이 우리 학과 아지트 비슷한 곳이었다. 막걸리와 빈대떡, 김치찌개, 제육볶음 정도가 주된 안주였다. 제육볶음은 특별한 일이 있어야 먹는 호사스러운 음식이었다. 가난했던 시절에 고기안주는 언감생심(焉敢生心)이었으니 말이다.자리를 잡으면 막걸리나 소주를 한 순배하고 누군가 흘러간 옛노래를 선창한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노랫소리가 들리면 숟가락이
2020년 10월 5일부터 대구 문화방송국에서 ‘시인의 저녁’이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언뜻 들으면 생뚱맞을지도 모르겠다. 요즘 세상에 누가 시를 읽는다고 ‘시인의 저녁’이란 말인가?! 하지만 그것은 ‘시사와 인문학이 있는 저녁’의 줄임말이다. 대략 40분 남짓한 시간 앞부분에는 시사를, 뒷부분에서는 인문학을 다룬다. 다채로운 손님을 모셔다 여러 가지 세상 이야기를 주고 받는 시간이어서 호응도 제법 좋은 편이다.지난주에는 인문-예술공동체 ‘시인보호구역’의 대표인 정훈교 시인과 함께 대구와 경북의 인문학, 특히 시를 둘
우리나라에서는 미국이나 프랑스 혹은 중국 영화를 제외한 다른 나라의 영화 보기가 쉽지 않다. 그런 까닭에 1월 14일 개봉된 에스토니아 영화 ‘나의 작은 동무(The Little Comrade)’는 신선하고 유쾌하게 다가왔다. 에스토니아란 나라가 어디 있는 거야, 하고 묻는 교수도 있었으니 말이다.우리는 가끔 ‘발트 삼국’이라는 어휘와 대면한다. 북구와 러시아에 면한 발트해에 자리하고 있는 세 나라를 가리킨다. 위도상 위쪽부터 거명하면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순서다. 18세기에 러시아 영토로 편입된 세 나라는 1917년
임마누엘 칸트(1724∼1804)의 저작은 모르지만, 그의 습관은 기억한다. 그는 매일 오후 3시 30분이면 어김없이 산책을 시작했다고 한다. 평생에 두 번 산책을 빠트렸는데, 장-자크 루소의 ‘에밀’을 읽다가, 그리고 프랑스 대혁명을 보도한 신문을 읽다가 그랬다는 것이다. 칸트는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길을 같은 속도로 걸은 것으로도 유명하다.왜소하고 병약한데다 결혼도 하지 않은 칸트가 80세의 천수(天壽)를 누린 것은 규칙적인 산책 덕분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장구한 세월 정해진 시각에 산책을 시작해서 마친다는 것은 웬만한 의지가
일주일 가까이 최저기온이 영하 10도 아래다. 요즘은 대구나 청도 기온이 다를 바 없다. 예년 같으면 청도 최저기온이 대구보다 4∼5도 정도 낮았는데, 그런 차이가 사라졌다. 영하 18도 가까운 추위를 경험하는 일은 행운이다. 내가 좋아하는 기온이 영하 18도이기 때문이다. 바람 한 점 없이 쨍한 날 아침에 맞는 영하 18도의 상큼함은 형언하기 어려운 기쁨이다.우리나라 추위에는 언제나 바람이 동반한다. 날이 추워질 기미를 알려주는 것도 바람이고, 기온이 오를 징조를 통지하는 것도 바람이다. 겨울에 바람이 일기 시작하면 날이 차가워질
신축년 2021년 올해 전국의 해맞이 명소가 폐쇄되었다. 달갑잖은 코로나19의 선물이었다. 해마다 1월 초하루면 해맞이 차량으로 몸살을 앓던 국도 7호선도 조용했으리라. 해맞이 차량 행렬에 끼지 않으면 무슨 사달이나 나듯 호들갑 떨던 사람들은 어디서 뭘 했을까, 궁금하다.모든 것의 시작과 끝은 맞물려 있다. 고3은 대학 신입생이 되고, 대졸자는 사회 초년생이 되는 이치와 같다. 노자(老子)는 그것을 ‘전후상수(前後相隨)’로 풀었다. 앞과 뒤는 서로 따른다는 뜻이다. 등산 가다가 길을 잘못 들으면 되돌아서야 한다. 끝에 가던 사람이
지나간 일과 관계와 사건은 아쉬움을 남긴다. 더 나은 결과와 평안한 관계, 안정적인 사후처리가 가능했음을 깨닫는 것은 언제나 나중이다. 일컬어 ‘사후 약방문’이거나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라 한다. 차 떠난 뒤에 손 흔드는 것과 같이 만사휴의(萬事休矣) 상태다. 그러나 인간이기에 겪을 수밖에 없는 실패와 좌절을 돌이키면서 우리는 같은 성질의 패배와 절망을 경험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1960년생이 환갑을 맞은 경자년(庚子年)이 저물어 간다. 올해는 코로나19로 시작해서 코로나19로 끝나고 있다. 호모사피엔스가 여태까지 겪지 못
엊그제가 동지였다. 입동에서 시작하는 겨울이 소설과 대설을 거쳐 동지에 이른 것이다. 이제부터 소한과 대한을 지나면 입춘이다. 그날이 왔다고 곧바로 봄은 아님을 경험은 가르친다. 하지만 우리 마음 깊은 곳에는 ‘드디어’ 하는 고요한 탄성이 시나브로 자리하게 될 것은 명백하다. 생명 가진 모든 것들이 기지개를 켜면서 사멸과 적요(寂寥)의 기나긴 터널을 지나 생명과 약동의 시절과 대면하게 되리라.12월 21일 세계 전역이 코로나19로 동분서주할 때 천상에서는 진기한 장관이 연출됐다. 무려 400년 만에 토성과 목성이 근접하는 보기 드문
재레드 다이아몬드 교수가 출간한 ‘문명의 붕괴(원제 Collapse)’를 읽고 깨우친 바가 많았다.서책의 부제(副題) ‘과거의 위대했던 문명은 왜 붕괴했는가’는 그가 말하고자 하는 요체(要諦)를 적절하게 설명한다. 시공간을 입체적으로 사유하고 성찰하는 유일한 생명체로서 인간은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를 기획하는 능력의 소유자다. 그런 까닭에 지나간 날들은 화석화되거나 허울만 남은 빈껍데기가 아니라, 오늘을 인식하고 내일로 인도하는 나침반과 다르지 않다. 800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서책에서 지은이는 사회가 붕괴하는 다섯 가지 요인을
바다를 처음 보았던 것은 고2 수학여행 때였다. 동대구역에서 해병대 군용트럭이 우리를 포항에 자리한 해병대 숙소로 데려갔다. 해병대 1일 입소를 통해 호연지기를 키워주겠다는 교장의 의지였다. 그때 처음 갯내음을 맡고 나서 내가 한 일은 바닷물을 맛보는 것이었다. 바닷물은 짰다, 아주 심하게. 내게 바다는 그렇게 다가와서 지금까지 잊지 못할 추억을 선물하고 있다.얼마나 세월이 흘렀을까, 울산에서 3수로 괴로워하던 친구가 보자는 전갈을 보내왔다. 5월의 대학축제를 팽개치고 도착한 울산은 현대의, 현대에 의한, 현대를 위한 도시였다. 현
얼마 전에 정지창 선생이 ‘문학의 위안’이라는 서책을 출간했다. 조금 낯설지만 정겨운 느낌의 제목이 눈길을 끈다. “문학작품은 세상살이의 고달픔을 완화하고 살아갈 힘을 주는 미학적 구조물”이라는 설명이 와 닿는다. 그는 인생은 고해라는 자명한 사실을 위로하고, 삶에 지쳐버린 사람에게 그래도 살아가야 한다는 의지를 북돋우는 미학적 구조물로 문학을 포착한다.희곡은 물론 시와 소설마저 독자들의 외면을 받는 20세기 20년대에 문학에서 위안을 구하는 선생의 자세는 놀라운 것이다. 거리에서 광장에서 지하철에서 문학을 벗하는 한국인이 있는지
하버드 대학교 한국학과에 재직하는 푸른 눈의 교수 말이 가끔 떠오른다. 하버드 한국학과 학생들의 시조 생산량이 한국의 모든 시조 시인의 생산량보다 더 많다는 것이다. 시조를 짓는 일은 학생들의 자유로운 상상력과 어휘 운용능력을 향상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한다. 단시조(평시조)는 3장 6구 45자 내외의 정형화된 형식을 가진다. 단시조의 정형화된 틀을 벗어나 다소 길어진 형식이 장시조(사설시조)다.현대시조로 오면 이런 틀이 작동하지 않는다. 1968년 발표된 이호우의 ‘개화’ 같은 작품이 좋은 본보기다. 이런 방식으로 문학 장르는 탄
‘아비정전’(1990)이나 ‘중경삼림’(1995) 같은 영화를 기억하실지 모르겠다. 당대 동아시아 영화 관객들의 우상으로 군림한 왕가위. 그는 1995년 ‘동사서독’으로 엇갈린 남녀의 인연과 애증을 무협의 형식으로 풀어낸다. 한국 관객이 기억하는 그의 대표작은 ‘화양연화’(2000)일 것이다. 21세기 들어 왕가위는 ‘2046’(2004),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2008), ‘일대종사’(2013) 같은 작품으로 관객과 만나고 있다.그의 영화 가운데 이해하기 어렵다는 ‘동사서독’은 허무적이고 우울한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몽환적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