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과 노트북 그리고 핸드폰 없는 세상은 상상하기도 힘들다. 모든 지식과 정보, 소통과 교류는 이미 온라인으로 넘어온 지 오래다. 코로나19가 모두를 힘들게 하지만 세상의 변화는 오히려 앞당긴 셈이다. 비대면과 디지털이 대세가 되어 교역과 외교, 교육과 경제를 포위했다. 꼭 필요하지 않으면 만나지 않고도 못 할 게 없는 환경으로 바뀌어 간다. 얼른 적응해야 하지만 부작용도 만만치 않을 터. 편한지는 몰라도 혹 잃는 게 없을지 살펴야 한다.찌는 더위 속에는 없으면 상상하기 힘든 게 또 하나 있다. 에어컨. 한국에 들어온 지 반세기도
본인은 억울하지 않을까. 52시간 정책이 문제라는데 120시간만 시비거리가 된다거나, 대구를 칭찬한다는 소리가 다른 지역을 폄훼한다고 들렸다는 게 아닌가. 생각을 표현하는 일은 그처럼 힘들다. 오죽하면, 어느 옛 시인은 ‘말로써 말많으니 말말을까 하노라’고 했을까. 글이든 말이든 적거나 뱉은 다음엔, 이제는 내 것이 아니다. 읽고 들은 사람들이 새기고 해석하며 소비한다. 나의 배경과 처지를 바탕으로 표출된 생각이지만, 받아서 사용하는 쪽에도 그들의 배경과 처지가 있다. 내 생각에 대한 그들을 오해를 내가 아무리 애쓰며 바로잡으려 해
한여름이다. 스치듯 지나간 장마의 자리를 찌는듯한 땡볕이 물려받았다. 코로나19는 하필 또 이럴 때 기승을 부리는지. 무더위가 힘들어 스트레스는 두 배. 일 년을 넘기며 감염병에 지친 사람들이 갈 바를 찾지 못한다. 선거판은 때맞춰 시동을 걸어 언론 지면은 정치인들이 물들이고 있다. 대권을 누가 잡든 세상이 그리 변할 것 같지도 않은데 주장과 막말이 춤을 춘다. 흥건히 땀에 젖으면서도 오가는 말들에 주목하며 심사가 오르내리는 착한 국민들이 아닌가. 이왕 들려줄 말이었으면 진심과 배려가 실렸으면 좋았을 걸, 눈을 씻고 보아도 자신들의
조심스럽다. 나라에 대해서 생각을 적어 내리는 일은. 보이는 그대로 적는다 해도 세상이 그렇게 읽어주지 않는다. 사회가 이념과 성향에 따라 두 쪽으로 극명하게 갈라졌다.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나름 긍정적이라 해도, 소모적인 언쟁과 피곤한 정신소비에 이르기 일쑤다. 누구를 만나도 살피게 되고 무엇을 이야기해도 편하지 않다. 당신이 어느 편인가 늘 궁금하고 끼리끼리만 모이게 된다. 사회적 통합은 멀어만 가고 패거리 문화만 춤추고 있다. 우리만 그런가 궁금했더니, 바다 건너 사정도 엇비슷한 모양이다. 인간의 본성일까 배워박힌 습관일까.칸
고등학생 또 한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학교 공부와 장래 계획에 대해서 고민과 스트레스가 쌓인 나머지 극단의 선택을 했다는 게 아닌가. 2010년 통계에 따르면, 한국인의 자살률이 인구 10만 중 31.2명으로 OECD 국가들 가운데 1위라고 한다. 그런 중에 청소년 사망원인 첫째가 ‘자살’이라고 한다. 학교 공부는 무엇 때문에 하는가. 행복하기 위하여 하는 게 공부가 아닌가. 즐겁고 행복하려고 나아가는 길에서 불행하여 고민이 쌓인다면 그게 바로 문제가 아닐까. 피어보기도 전에 스스로 생명을 거둘 어두운 생각에 이른다면 이는
최근 2030 청년층의 대두에 관한 해석이 여러 가닥이다. 지난 세기 산업화의 높은 언덕을 힘들여 넘어온 세대가 있었다. 곧이어 건너왔던 민주화라는 산도 그리 쉽지는 않았다. 길지도 않았던 반세기 남짓 세월 동안 성큼성큼 지나온 이야기들이라서 모두에게 익숙한 것으로만 알았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1950년대 이후 세대에게 한국전쟁이 옛날이야기가 아니었던가. 1980년대 이후 세대에게는 유신도 광주도 기억 속에 없는 서사인 셈이다. 지난 역사로부터도 배워야 할 테지만, 오늘 우리는 새로운 기억을 지나가는 중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카리브해의 작은 섬, 푸에르토리코는 미국의 자치령이다. 멋진 풍광과 아름다운 해변을 자랑하고 싶었지만, 찾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주변에는 플로리다, 쿠바, 아이티와 자메이카, 멕시코에 이르기까지 관광으로 먹고사는 나라들이 수두룩하였다. 홍보 책임을 떠맡은 광고인 데이비드오길비(David Ogilvy)에게도 쉽지 않은 과제. 그가 도출해낸 푸에르토리코의 강점은 의외로 문화였다. 세기의 첼리스트 파블로 카잘스(Pablo Cazals)가 그곳에 살았던 기억을 찾아내었다. 광고슬로건 ‘푸에르토리코, 그냥 멋진 해변만이 아닌(Puerto
60대가 주도하던 판이 흔들린다. 한 때 40대 기수론을 들어보았지만 30대가 지도자 반열에 선 모습은 사뭇 낯설다. 늘 보던 얼굴들에 긴장하는 빛이 역력하다. 경험과 관록이 필요하다고 주장해 보지만, 이제는 고인 물이 되어버린 당신들의 세상이 아니었던가.젊은 정치인이 선배들을 간결한 논리와 수려한 말솜씨로 마주하는 모습이 오히려 신선하다. 그가 만들어낼 충격과 변화가 어디까지 갈 것인지 관심을 모은다. 젊음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판에 세상은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 궁금하기도 하다. 어깨를 나란히 하는 20대와 30대는 함께 뛸 준비를
기자에게 물어보자. 판단은 독자가 할 것이므로 기자는 생각을 기사에 적으면 안 된다는 주장이 있다. 사실만 전달하고 생각을 얹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기자는 팩트만 충실히 전하면 되는 것이지, 벌어진 일에 대한 판단을 하지 말라는 원칙이란다. 생각은 기자의 몫이 아니라는 주장. 팩트를 중심으로 당신이 목격한 사실만으로 기사를 적으며 기계적인 중립을 유지하라는 권고. 왠지 그럴듯해 보인다. 그래야만 할 듯도 하다. 언론이 전하는 기사가 독자의 의견에 영향을 주게 되면, 왠지 언론이 독자를 쥐고 흔드는 게 아닐까. 생각하고 판단할 공
대학은 죽었다. ‘벚꽃피는 순서대로’ 죽어갈 것이 아니라 우리 대학은 이미 죽었다. 막상 닥친 문제들을 놓고 보면 딱하기는 하다. 폐교위기에 봉착하여 교직원들에게 체불 임금이 쌓여간다니 어쩌나도 싶다. 청산과 파산 소리까지 들리니 큰일이 났구나도 싶다. ‘한계대학’이라는 새로운 단어에는 대학들이 만난 어려움이 고스란히 들어있다. 예견해 오던 ‘인구격감’ 사태가 실제로 학령인구 연령층에서 전개되면서 대학은 신입생충원에 벽이 생겼다. 대학신입생 모집정원이 고교졸업자수 보다 많아졌다. 인구는 지속적으로 줄어들 것이므로, 대학정원을 채우기
어떻게 만났을까. 저렇게 많은 사람들 가운데 하필 만난 그 한 사람. 평생 배필로 살아가는 운명으로 짝지워 졌다는 사람. 가족의 모양이 여러 가닥으로 바뀌어 간다지만, 일단 만나고 나면 헤어지기도 그리 쉽지는 않은 사람. 부부라 부르는 인연이 기적이 아니면 무엇인가. 둘이 만나 이룬 가정을 통해 생기는 자녀들. 부모에게 아이들은 얼마나 큰 선물이며 아이들에게 부모는 기적같은 만남이 아닌가.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시작하는 그 모든 사건과 이야기들도 두 사람의 만남에서 시작되지 않았던가. 세상의 모든 스토리는 남자와 여자가 만나면서 비롯
기적이었다. 돌아보니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길지 않았던 직장생활 끝에 뜻을 정하여 떠나기는 했었다. 준비가 없었기에 매사가 서툴렀다. 그가 아니었으면 어떻게 오늘 내가 있을 수 있었을까. 지도교수로 만난 미라클(Gordon E. Miracle) 교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도움을 낯선 외국인 학생에게 주었다. 직장을 잡아 학교를 떠나기 전날, 교수님과 마지막 마주 앉은 만찬 자리에서 나름 대담한 제의를 던졌다. ‘교수님께 받은 은혜가 너무나 깊으므로 오늘은 무엇이라도 한 자락 갚아드리고 싶습니다.’ 뜻밖의 제안이었을
4월이 잔인한 달이라면, 5월은 포근한 달이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과 부부의 날도 있다. 하필 같은 달에 모여있는 까닭은 무엇일까.우선 어린이날. 나라를 잃었던 암울한 시절에 소파 선생이 우리의 앞날은 어린이에게 달려있다고 생각했다는 게 아닌가. 어른들이 잘난 재주를 부린다 한들 미래는 어차피 다음 세대가 맡아야 한다. 어린이를 정성으로 기르지 못하는 백성에게는 내일이 없다. 어린이가 바르게 배우지 못하면 새로운 무엇도 기대할 수 없다. 어린이가 마음껏 뛰놀지 못하는 나라에는 희망이 없다. 어른의 세계가 아무리 복잡하여
국격이 높아졌다. 경제규모가 세계 10위에 올랐다 하고 문화강국으로 위상도 한결 날아오른다. K-Pop은 지구촌 젊은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며 글로벌 영화계에는 우리 감독과 배우들로 넘실거린다. 지구 위 어디를 가도 한국인들이 없는 곳이 없으며 가는 곳 어디에서도 이제는 소외되지 않는다.필자가 미국대학에서 가르쳤던 1990년대에만 해도 나라의 위상이 오늘같지 않아 안타까웠던 기억이 언제였나 싶다. 이제는 어깨 펴고 다닐 만하다. 코로나19의 광풍이 걷히고 나면 그런 변화를 확인하러 나가봐야겠다. 그랬던 시절에도 우리 마음에 비수처럼
코로나19가 여러 가닥에서 사람을 잡는다. 방역은 물론 경제는 기초부터 흔들린다. 어울려 살아야 하는 사회적 기반이 도태되는가 하면 풍성해야 할 문화적 토양도 척박해졌다. 나라 간 교류가 뒷걸음치고 다니면서 배우는 관광과 여행의 그루터기가 사라져간다. 세상이 변하여 뉴노멀이 들어선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역동성과 재미는 희미해진 세상이 기다리는게 아닐까 싶다. 그런 가운데 모두의 미래가 달렸을 교육의 모습은 애처롭다. 대학에서 만나는 신입생들에게서 대학생활을 위한 기초학력과 기본소양 저하가 확연하게 보인다. 무엇이 문제이며 어디서부
말 속에는 그늘도 있다. 영화 ‘미나리’에서 할머니역을 해낸 배우 윤여정 선생. 할리우드 오스카상 시상식에 참석할 터에, 그의 아들이 미국사회에 만연한 ‘아시안 혐오분위기’를 떠올리며 걱정을 하더란다. 미국이 어쩌다 저렇게 되었을까. 사람들 사이에 골이 패이고 벽이 생기면 대화와 소통이 사라지고 화합과 상생은 꿈도 꾸지 못한다. 흑인과 백인들 사이에서 있었던 갈등과 차별이 어느새 아시안들에게도 옮겨온 듯하다. 닮은 걸 보고 서로 보듬기보다 다른 걸 굳이 드러내 미워하려 드는 건 혹 인간의 본성이 아닌가. 우리는 어떤가. 뿌리깊은 영
산고 끝에 시장이 선출되었다. 선거과정에서 세대와 성별, 직업을 씨줄과 날줄로 살피며 투표성향을 예측하곤 하였다. 특별히 주목을 받는 연령층이 두드러졌다. 20대와 30대. 청춘과 낭만의 한 가운데를 달릴 것이라 여겨져서 늘 꿈틀거림과 변화의 소용돌이를 경험하는 인생의 계절을 지난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정치적으로 통상 미래를 내다보는 진보적인 성향을 가지며 문화적으로도 사회의 변화를 이끌며 경제적으로 넉넉하지는 않아도 창창한 미래를 내다보며 사회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는 세대라 생각하였다. 그런 그들이 바뀌었다고 한다. 진보에서
일 년 365일 가운데 그래도 해학과 위트가 느껴지는 하루가 있다. 바로 오늘 만우절.악의와 술수를 품은 기만이 아니라 재치와 웃음을 담은 거짓말로 유쾌하게 주고받는 한 날. 만우절이 있어 그나마 숨통을 틔우고 한순간이지만 파안대소로 통쾌하다. 나이와 격식도 잠시 잊고 시름과 걱정을 날려 보내는 상쾌함이 있다. 영어로 April Fool’s Day라니 바보가 되어 오히려 신선하다. 꽉 조여서 여유라고는 한 치도 없는 현대인의 일상 가운데 그래도 이 한 날이 있어 긴장과 경계를 풀어놓는다. 만우절이 지나면 다시 싸움터 현실로 돌아가야
‘벚꽃피는 순서대로 문을 닫는다.’ 인구감소를 바라보면서 예견하였던 위기가 실제로 눈 앞에 펼쳐진다. 대학들, 특히 지방대학들은 신입생을 채우지 못하여 존폐의 기로에 선다. 모든 대학들이 그렇지는 않다고 해도, 학령인구 격감이 가져다줄 대학캠퍼스의 내일에는 그늘이 드리웠다. 교수들 사이에는 이미 ‘대학에 미래가 있는가’를 고심하는 움직임이 보인다. 대학이 스스로 정체성을 다시 생각하고 앞으로 펼쳐질 고등교육의 나아갈 바를 새롭게 살피고 정돈해야 한다. 겉으로 보기엔 학생숫자가 당장 문제이겠으나, 미증유의 코로나19 상황을 지나면서
세상은 앞으로 나아간다. 그저 변하는 게 아니라 좋은 세상이 되어가는 모습이 뚜렷하다. 기술의 진보와 문명의 발달은 세월과 함께 가히 눈부시다 하리만큼 더 나은 방향으로 재촉하듯 움직여 간다. 디지털환경과 인공지능은 그 적용 범위를 날로 넓히며 인간의 삶을 더욱 편리하게 만들어낸다. 세상을 두고 떠나기가 아까울 만큼 앞으로 만나게 될 내일 세상이 궁금해진다. 분명한 것은 어제와 같은 모습을 가지고 있는 사물이 희귀할 정도로 많은 것들이 빠르게 바뀌어 간다. 사람은 어떤가. 세상이 더 나은 방향으로 긍정적인 모습으로 바뀌어 가는 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