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는 돈을 이야기하고 부자는 예술을 이야기한다는 말이 있다. 진정한 예술은 돈을 좇지 않는다지만 가난한 예술가들은 돈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어렵다.1980년대부터 포항에서 극단을 이끌어 온 이한엽 대표는 인터뷰 도중 여러 차례 예술이 돈을 좇는 세태를 비판했다. 가난이 숙명인 연극판. 그것도 변방의 민간 극단은 걸핏하면 물이 새고, 곰팡내 나는 지하 소극장을 전전해야 했다. 낮에는 직장인으로 밤에는 연극인으로 살아가며 사비를 털어 넣어도 적자를 면치 못한다.그러면서도 돈에 대한 꼬장꼬장한 태도의 근저에는 하고 싶은 연극을 마음대로
비행기 7시간, 기차 3시간. 총 10시간여의 머나먼 여정이었다. 인도네시아 산업부 산업인력개발청 청장 일행은 그렇게 철의 땅에 발을 들였다. 가을이 없는 나라의 계절을 지낸 이들은 처음보는 한국의 단풍에 쌓였던 피로를 단번에 잊었다. 반가운 얼굴들이 보였다. 짧았던 인도네시아 취재 기간에 만났던 크리카타루 포스코 직원인 나디라(Nadhira), 데시(Desi)이다. 두 달 만이었다. 멀리 와줘서 고맙고 잊지 않고 기억해 줘서 또 감사했다.인도네시아 산업부 산업인력개발청(BPSDMI) 청장(차관급) 일행 11명은 철강산업 이해와 철
전국이 울긋불긋 물드는 단풍시즌, 대구도 예외가 아니다.대구의 도심과 주변에는 가을의 정취를 흠뻑 느낄수 있는 단풍명소가 의외로 많다. 가족이나 친구, 연인과 함께 나들이 하기 좋은 단풍 비경지를 소개한다. △달성 대표 관광명소 옥연지 송해공원‘명품숲길 선정’ 금동굴로 이어지는 둘레길·백세교 산책로송해선생 이야기 담은 기념관 등 알찬 볼거리 많아 입소문이달 중순까지 열리는 가을 국화 전시회도 놓치지 말아야 옥포읍 기세리에 자리한 옥연지 송해공원은 달성군을 대표하는 관광명소 중 한 곳이다. 송해공원이 달성군 명예군민인 방송인 고(故)
문경의 가을 황금들판이 축제로 영글고 있다. 문경을 대표하는 특산품을 주제로 다양한 축제 한마당이 펼쳐지며 전국 관광객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문경사과축제가 지난달 14일부터 16일 동안, 문경약돌한우축제가 지난달 7일부터 3일 동안 연이어 개최됐다. 앞서 지난 9월 문경오미자축제, 5월 문경찻사발축제를 성공리에 마무리하며 전국 으뜸 축제의 고장으로 명성을 확고하게 다져가고 있다.신현국 문경시장은 “전국에서 문경을 찾아주시는 많은 관광객들이 문경에서 열리는 축제장에서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낼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준비하고 지원을
발길 닿는 곳곳 오색빛깔이 사뿐히 내려앉은 가을이다. 낙동강변의 유려(流麗)한 물길 옆으로 크고 작은 산 능선에 물든 알록달록 단풍 길과 너른 황금들판 사이의 오랜 가옥과 옛길이 이룬 고즈넉한 안동의 가을이 여행객들의 발길을 사로잡고 있다. 가을 정취를 물씬 풍기는 안동 단풍길 따라 가을 속으로 들어가 보자. 낙동강변의 유려한 물길 옆 크고 작은 산 능선에너른 황금들판 사이의 오랜 가옥과 옛길 사이로고즈넉한 안동 가을 단풍길 따라 힐링의 시간을…1. 이국적인 풍경을 자아내는 ‘낙강물길공원’은행나무와 메타세쿼이아 등이 주를 이룬 안동
요즘 아침 산책하다 보면 심심찮게 반려견을 데리고 나온 시민들을 만난다. 다양한 종류의 강아지에서부터 어미 개까지 촐랑거리며 걷기도 하고 뛰면서 주인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모습이 귀엽기도 하지만, 때로는 큰 덩치의 험상궂은 불도그를 볼 때면 나도 모르게 움찔하면서 주춤거리거나 멀찌감치 떨어져 걷게 된다.반려견 주인은 괜찮다고 하나 그것은 그들의 생각이고 지나는 나는 그렇지 못하다. 더하여 가끔 반려견들이 본 변이 산책길에 그대로 방치되어있는 것을 보면 그리 유쾌하지만 않다. 날이 갈수록 주변을 돌아보아도 그렇고 언론 보도에도 반
서기 676년. 신라는 백제에 이어 고구려를 병합한 후, ‘7세기 아시아 초강대국’으로 불렸던 당나라 세력을 축출함으로써 삼국통일의 여정에 마침표를 찍는다.정치와 군사적인 면, 종교·문화적인 측면 등에서 고구려와 백제보다 발전이 늦었던 신라가 삼한을 하나로 묶어 통일왕국을 만들어간 과정은 드라마틱하면서 지난했다.탁월한 외교협상력을 발휘했던 무열왕 김춘추, 용장(勇將)과 지장(智將)의 면모를 두루 갖춘 김유신, 무열왕의 뒤를 이어 고구려 침공과 당나라 격퇴의 선두에 섰던 문무왕 김법민,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나라를 위해 바치겠다고 맹
아홉 형제 올려보내고 홀로 바다에 떨어진용 한 마리구룡포 땅 거닐며 무슨 생각했을까.땅 천 년, 산 천 년, 물 천 년삼천 년을 견디었건만부러진 뿔 뽑힌 발톱 흩어진 비늘들하나하나 주워 담으며또 하루하루 씹어 삼켜야 할눈앞의 천 년은 얼마나 아득했을까. 원망과 허탈을 되새김질하며 백 년쌓아 올린 토성에 제 몸을 감추며 백 년말목장성의 말갈기를 쓰다듬으며 백 년한적하게 그물 씻는 어민들을 지켜보며 백 년어느새 구백 년의 시간을 갑옷처럼 입으며백 년만 지나면 뒤돌아보지 않고하늘을 향해 날으리라 다짐할 때에포구에 정박한 이국의 배에서는낯
‘산소카페 청송군’이 대한민국에서 가장 수려하고 청정한 자연을 배경으로 청송사과의 수확철을 맞아 풍성하고 다채로운 청송사과축제를 마련한다.제17회 청송사과축제는 ‘청송사과, 찬란한 금빛 향연’이란 주제로 오는 11월1일 청송읍 월막리 용전천(현비암 앞)에서 화려한 막을 올려 5일까지 5일간 개최된다.청송군은 이번 축제를 통해 ‘산소카페 청송군’,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 ‘국제슬로시티’, ‘산소카페 청송정원’ 등 최고의 청정 관광도시를 더욱 부각시키고 용전천 현비암 주변 자연경관에 빛을 수놓은 야간 경관조성사업을 축제와 연계해 그
사회생활을 하면 누구나 은퇴하게 되는데 정치인도 예외일 수 없다. 최원수 선생은 정계에서 물러나 어떤 일을 했으며, 무엇을 남겼을까? 그리고 그의 장남 최승태 선생은 어떤 길을 걸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들으며 최승태 선생과의 대담을 마무리했다.김도형((이하 김) : 최원수 선생은 정계에서 은퇴한 후에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최승태(이하 최) : 아버지는 동양 고전에 조예가 깊고 붓글씨를 잘 썼어. 서울시민회관에서 개인전을 열 정도였지. 아버지는 말년에 서울 장충동 쪽에 목운서실(木雲書室)을 열고 서예를 가르쳤어. 사실 그 서실
곡성은 시골스러운 풍경을 가장 잘 간직한 곳이다. 곡성을 휘감아 흐르는 섬진강은 어머니의 젖줄처럼 푸근하기만 하다. 맑은 물길은 들판과 만나고 시선이 머무는 곳마다 감성을 적시는 풍경이 펼쳐진다. 가을의 중턱 연인이나 가족과 함께 자연의 순정함이 가득한 곡성으로 떠나보자. 천혜 자연환경 품은 ‘섬진강의 무릉도원’ 침실습지수달·삵 등 6천665종의 생물이 서식하는 생태보고섬진강 기차마을 증기기관차 여행·레일바이크…유리온실·로즈카카오체험관·장미공원도 즐기자하늘로 시원스레 뻗은 숨은 명소 메타세쿼이아 길평지 자리한 이색 천문대, 곡성섬진
최원수 선생은 영일군수와 제2대 국회의원 임기 동안 굵직한 성과를 내면서 지역에서 좋은 평판을 얻었다. 하지만, 1950년대 초의 혼란한 정치 상황은 그의 정치 인생에 먹구름을 드리운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대통령과 국무총리를 맡았던 이승만과 이범석의 관계가 벌어지며 최원수 선생에게도 위기가 찾아온다. 이범석이 광복 직후에 족청(族靑, 조선민족청년단)을 조직해서 이끌었는데, 이승만이 이범석을 경계하면서 1953년에 족청계를 숙청하지. 그 바람에 이범석과 가까웠던 아버지도 화를 입게 된 거야. 공천을 받을 수 없었던 아버지는
화랑(花郞).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꽃 같은 사내’라는 뜻이다. 신라는 전략적으로 외모와 품성 모두가 빼어난 소년(청년)을 뽑아 나라의 지도자로 키웠다.삼한일통(삼국통일)에 이르기 위한 백제, 고구려, 당나라와의 전쟁과 전투가 끝없이 이어지던 7세기. 신라 화랑들은 그 명칭처럼 ‘꽃’이 아닌 매서운 ‘칼’의 역할을 감당해야 할 경우가 더 많았다.신라가 통일왕국을 이루는 과정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한 두 사람, 즉 무열왕 김춘추와 태대각간 김유신 역시 젊은 시절엔 주목받는 화랑의 우두머리였다.660년. 국가의 명운을 걸고 백제와 맞붙었
아름다움이 아름다움인 채 남아있을 수 있다는 건얼마나 큰 축복인가.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채로함께하는 사람과는 함께인 채로누구도 떠나지 않고무엇도 끝나지 않으며그렇게 영원할 수 있다는 것은.어렸을 땐 이야기의 끝이 무서웠다.그들의 행복이 영원할지 누구에게도 물을 수 없었으므로.그들이 떠나간 자리에 덩그러니 남겨진 나는그들의 손 한번 잡아 볼 수 없고숨결 한번 느껴 볼 수 없으므로. 그럼에도 이야기의 끝이란 얼마나 큰 축복인가.시간이 멈춘 청하 공진시장을 거닐며공기에 벽돌에 슬레이트 지붕에 스며 있는사랑과 따스함을 만져 볼 수 있다
만나게 될 사람은 언젠가는 만나게 된다. 김수정 사진가와는 20년 가까이 인사를 나누던 동네 이웃이었다. 특유의 활달한 붙임성으로 해녀들과 작업한다고 했을 때 만해도 이토록 진심인지 몰랐다. 그 후로는 다양한 곳에서 김수정 석 자를 듣는 일이 많아졌다.그리고 지난 봄, 포항 북구 방석리 바닷가의 질펀한 굿판에서 김 작가를 만났다. 밤을 새우는 동해안별신굿을 렌즈에 담으면서도 고단한 기색은 없었다. 되려 사라져가는 것을 기록하는 사명감으로 하나라도 놓칠까 긴장을 늦추지 않는 모습이었다.도대체 무엇이 사진가를 드센 바다와 떠들썩한 굿판
영덕군 영덕읍 영덕대게로. 시원스레 펼쳐진 푸른 동해를 배경으로 거대한 약사불(藥師佛·약사여래, 약사유리광여래, 약사불로 불리는 부처. 불교에서 중생의 병을 고쳐주는, 즉 의사와 약사 역할을 하는 부처를 지칭)이 우뚝 서게 된다.길이 46m의 약사불 아래로는 법당을 만들어 10만의 부처를 봉안할 예정. 소요될 것으로 추정되는 예산만 200억 원. 어마어마한 프로젝트다. 이름하여 ‘청동 동해 약사불 대작불사(大作佛事)’이를 주도하고 있는 사람은 영덕 기원정사의 주지 자명 스님(58·속명 김상노).호방한 웃음과 거침없는 몸짓으로 대중에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의 숨결이 살아있는 영덕에서 지난 21일 호국 벨트 조성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호국보훈 음악회 ‘다시, 우리의 영웅들과 함께’가 성황리에 개최됐다.이날 오후 영덕군 장사상륙작 전승기념공원에서 열린 행사는 영덕군과 경북남부보훈지청이 주최하고, 경북매일신문이 주관했으며 김동희 영덕군 부군수, 김지현 경북남부보훈지청장과 손덕수 영덕군의회의장, 최윤채 본지 대표이사 등 내빈과 영덕군민 1천여명이 대거 참석했다.식전 행사는 영덕줌마난타의 신명나는 공연으로 분위기가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이어 인칸토솔리스트의 앙상블이 가을 하늘과
최원수 선생은 1949년 1월 8일 영일군수에 임명되어 1년 3개월 동안 영일군을 이끈 후 1950년 5월 30일 실시된 제2대 국회의원 총선(영일군 갑구)에서 당선된다. 군수와 국회의원의 임기를 합쳐 5년 3개월이라는 그리 길지 않은 공직 생활을 했는데, 그마저도 전쟁 때문에 온전한 의정 활동을 할 수 없는 여건이었다. 하지만 그가 해낸 굵직한 일을 살펴보면 진정한 지도자는 어떤 존재인지,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영일군수의 위상은 대단했어. 경상북도 시장·군수 회의에 가면 큰 목소리를 낼 정도였지. 영일군이 농지가
1948년 5월 10일에 제헌의원 선거가 실시된다. 이 선거는 인구 10만 명 기준의 1개 선거구에서 1명을 선출하는 소선거구제였다. 전국 200개 의석 가운데 경상북도가 33개 의석을 차지했으며 영일군(현재 포항시에 해당)은 갑구·을구의 선거구에서 의원 2명을 선출했다. 최원수 선생은 영일군 갑구에 출마했지만 박순석 목사에 밀려 낙선했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 1949년 1월 8일 영일군수에 임명돼 1950년 4월 20일까지 1년 3개월 동안 영일군을 이끌었다. 최원수 선생이 영일군수가 되는 과정과 당시 포항의 정치, 사회
7세기 신라엔 ‘삼한일통(삼국통일)을 이끈 스타급 인물’이 여러 명 출현한다. 백제를 멸망시켜 딸 고타소(古陁炤)과 사위 김품석의 원수를 갚은 동시에 통일의 초석을 닦은 무열왕 김춘추, 강력한 군사대국 고구려가 무릎을 꿇게 만들고, 지속적으로 내정을 간섭하던 당나라를 나라 바깥으로 내쫓은 문무왕 김법민, 통일왕조 권력의 중앙 집중화를 이뤄 문화·예술 발전의 토대를 마련한 신문왕 김정명 등.3명의 왕 모두가 삼국통일의 험로에서 큰 역할을 했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삼한일통 과정에서 가장 주목받아 마땅한 단 한 명의 인물은 누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