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일, 오늘은 ‘의병의 날’이다. 의병의 역사적 가치를 마음에 새기고 그들의 애국심을 계승하자는 뜻에서 제정한 법정기념일.지난 2008년 8월 의령군수 등 1만5천586명이 ‘호국의병의 날’ 기념일 제정을 국회에 청원했고, 그 청원이 2010년 2월 국회에서 의결됐다.이후 행정안전부는 같은 해 5월 25일 “매년 6월 1일을 의병의 날로 제정한다”고 알렸다.임진왜란 당시 곽재우 장군이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 날이 음력 4월 22일. 6월 1일은 이를 양력으로 환산한 것이다. 호국보훈의 달인 6월의 첫째 날이라는
아직 본격적인 여름에 접어들지 않았지만, 목덜미로 땀이 흘러내릴 만큼 더웠다. 당연했다. 바로 코앞에 뜨겁게 달아오른 철판이 있었으니.포항 죽도시장 입구에 조그맣게 자리한 호떡 노점. 고명희(62)씨는 그 자리에서 14년을 일했다. 그녀에 앞서 고씨의 어머니가 1980년부터 ‘할매호떡’을 시작했으니, 모녀가 대를 이어 호떡을 구워 판 세월이 벌써 42년.지난해부터는 고명희 씨의 아들까지 일을 거들고 있으니 ‘호떡집 3대’라 불러도 무방하다.인터뷰는 호떡을 굽는 번철(燔鐵)을 사이에 두고 진행됐다. 30분 남짓의 짧은 시간이었음에도
벌써 20년이 훌쩍 넘은 1990년대 중반의 일이다. 포항시는 환경정화 차원에서 형산강변에 줄줄이 늘어서 있던 포장마차를 단속·철거했다.포장마차 운영으로 자식들 공부시키며 삶을 이어가던 상인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대책을 세워 생존권을 보장해줘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궁여지책으로 낮에는 천막으로 된 포장마차를 걷었다가, 저녁에 다시 펼쳐 장사를 하는 방식이 포항시와 상인들 사이에서 합의됐다.그런데, 예상치 않은 어려움이 발생했다. 당시의 포장마차는 천막을 철제로 된 기둥과 볼트로 고정하는 방식이었다. 이걸 해체했다
장사란 물건을 팔아 이익을 남기고, 손님들에게 좋은 인상까지 줘야하는 행위. 결코 쉽지 않다.음식 장사는 더욱 그렇다. 사람들은 너나없이 돈 주고 사먹는 음식에 까다롭고 예민하다. 이는 철저한 준비 없이 만든 음식점이 오래 갈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어느 분야 할 것 없다. 무한경쟁의 21세기. 시장이나 도심 상가에서 어제 본 간판이 오늘 사라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동네마다 미식가를 자처하는 이들이 부지기수인 한국. 한 가지 음식만으로 손님들의 입맛을 사로잡아 30년을 이어왔다면 그 가게의 맛과 영업 전략은 보통이 아닌 게 분명하
훤칠한 키에 환하게 웃는 얼굴부터가 호감이 간다. 인사성도 밝다. 이른바 ‘어르신들이 사위 삼고 싶어 할 청년’으로 느껴졌다.복개된 포항 죽도시장 칠성천 입구에서 핸드폰을 판매하는 행복텔레콤 고은성(32) 대표는 나이 지긋한 시장 할아버지와 할머니들 사이에서 ‘손자 같은 상인’으로 통한다.고 대표가 건넨 명함 뒤쪽엔 이 청년상인이 마음속에 세워둔 장사의 원칙이 적혔다.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손님들이 의심하지 않게, 진심을 담아, 나가는 분들이 행복하게 웃을 수 있도록.”간명한 문장이지만 그 옛날부터 물건을 사고파는 원칙이라 할 상
장사상륙작전 참전 학도병의 훈장 추서와 수여에 의미 있는 파란불이 켜졌다.본지의 기획연재 ‘99세 노병의 잃어버린 훈장’을 통해 제기된 문제에 윤석열 정부의 첫 국방부장관 지명자인 이종섭(62)씨가 관련 입장을 표명한 것.이 국방장관 지명자는 최근 국민의힘 강대식 의원이 청문회와 관련돼 보낸 서면질의서에 포함된 “장사상륙작전 참전 학도병들의 국가를 위한 희생과 헌신에 합당한 예우 방법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공적을 최대한 발굴해 합당한 예우가 이뤄지도록 관심을 가
지난 2019년 10월 14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장사상륙작전 참전 용사 중 단 1명도 훈장을 받지 못했습니다’란 제목의 글이 올라왔다.1950년 9월 15일 139명의 전사자와 92명의 부상자가 발생한 경북 영덕 장사해변에서의 전투에 참여한 학도병 가족 중 한 명이 쓴 것으로 추정되는 청원(請願)은 전쟁을 겪지 못한, 곧 국방의 의무를 지키려 입대할 20대 청년들의 눈길까지 끄는 것이었다.선친이 한국전쟁 당시 장사상륙작전에 참전했다고 밝힌 청원인은 “대부분 15세에서 18세의 어린 학도병으로 참전한 용사들은 최근까지도 그
먼저 1950년 9월 14일 장사상륙작전에 학도병으로 참전한 이영희(91)씨의 기억 속으로 들어가 본다.“출동 전날인가, 출동하는 날이었던가…. 교관이 손톱과 발톱, 머리카락을 깎아서 나눠준 봉지에 넣으라고 하더군요.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몰랐지. 나중에야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군사작전에 동원된 사람들이 치르는 일종의 의식이란 걸 알았죠. 근데, 한참 후 들어보니 그때 700명 넘는 우리 전우들이 잘라낸 손발톱과 머리카락은 보관하지도 않고 버려졌다고 하더라고요.”아래는 이씨의 증언을 뒷받침해주는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양영조 책임연
훈장(勳章)이란 ‘국가나 사회에 공로가 뚜렷한 사람에게 나라에서 그 공적을 표창하기 위해 수여하는 기장(記章·기념장)’을 뜻한다.범위를 좁혀 볼 때 무공훈장은 ‘전쟁 혹은, 그에 준하는 국가 비상사태 때 전투에 참가해 뚜렷한 무공을 세운 자에게 수여하는 훈장’을 의미하는 것.72년 전. 한국은 국가의 운명이 백척간두에 처해 있었다. 소비에트연방의 지원을 받은 북한 조선인민군은 단 3개월 만에 남한 땅 거의 대부분을 집어삼켰다. 국군과 UN군의 최후 방어선이 낙동강 일대에 구축됐다.숫자나 화력 모두에서 조선인민군의 위세에 눌렸던 국군
1950년 한국전쟁 때의 전공으로 UN군 최고사령관이던 더글러스 맥아더(1880~1964·Douglas MacArthur)로부터 친서를 받은 사람들이 있다.맥아더는 ‘헌신적이고 충성스러운 전우로 당신들을 영원히 기억할 것’이라는 내용의 서신을 통해 6·25의 전세를 극적으로 역전시킨 인천상륙작전에 큰 도움을 준 장사상륙작전 참여 학도병들을 치하했다. 참전 당시 평균 나이가 18~19세에 불과했던 장사상륙작전의 ‘군번 없던 병사들’은 현재 아흔을 넘긴 노인이 됐다. 800명 가까운 학도병 중 전투 당시 숨진 사람은 139명. 이후 7
한국에서도 인지도가 높은 할리우드 배우 메간 폭스와 빼어난 연기력을 인정받는 김명민 등이 출연한 곽경택 연출의 영화 ‘장사리: 잊혀진 영웅들’을 기억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영화는 1950년부터 1953년까지 이어진 ‘비극의 한국전쟁사’, 그중 주요 사건 중 하나를 영상에 담았다. 소재가 된 건 1950년 9월 15일 결행된 장사상륙작전.카메라는 겨우 18~19세 청년 772명이 학도병으로 자원해 순수한 애국심 하나만을 무기로 포탄 쏟아지는 조선인민군과의 전투 현장에서 어떤 영웅적 행위를 보여줬는지를 좇는다. ‘인천상륙작전' 펼쳐진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한국 영화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장면이 있었다.유교적 전통이 여전한 20세기 영남의 어느 도시. 카메라는 기와가 근사한 한옥을 훑어간다. 젊은 며느리들은 새벽부터 일어나 밤늦게까지 제사 준비를 하느라 정신이 없다. 마침내 자정이 가까워서야 시작된 제사.그러나, 며칠을 제수(祭需) 준비부터 요리까지 하느라 고생한 며느리는 제사상 근처에도 가질 못한다. 부엌에서 초조한 얼굴로 서성일 뿐. 그것만이 아니다. 시어머니에게 야단까지 맞는다.“너는 생선을 이렇게 이렇게밖에 못 굽니. 나물은 또 이게 뭐냐? 너
32년과 53년.“성공하려면 한 우물을 파라”고 한다. 그러나 그게 간단하게 쓸 수 있는 앞의 문장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니 격언처럼 오랜 시간 사람들 사이에서 전해오는 것일 터.살아오는 내내 같은 일을 하며 삶의 절반 혹은, 2/3 이상을 보낸 이들을 볼 때면 경이와 존경의 마음이 함께 돋아난다. 길고도 긴 시간이 주는 압도적인 감정에 기가 질릴 때도 있다.‘포스코신문’이 발행되던 지난 2010년. 원고 청탁을 받고 인천에 있는 포스코 협력사를 찾아갔다. 철광석에서 주철을 만들어내는 제철소의 고로(高爐). 그 고로의 핵심 설
영남에서 태어나 20~40대의 상당 기간을 서울과 호남에서 보냈다. 어느 지역 할 것 없이 산과 바다가 인접한 한국은 적지 않은 식재료와 다양한 조리법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그런 연장선에서일 것이다. 즐기는 음식도 지역마다 다르다.경기도 사람들이 젓갈 사용을 줄여 담백한 김치 맛을 즐긴다면, 영호남인은 멸치나 갈치로 만든 젓을 듬뿍 넣은 농익은 김치를 찾는다.전라도에선 콩국수에 설탕을 넣어 먹는데, 소금으로 간을 맞춘 콩국수를 먹어온 경상도 사람들은 이 이야기에 깜짝 놀란다.참기름 섞은 소금에 구운 삼겹살 먹는 서울내기들은 멸치
포항 죽도시장만이 아니라 전국의 전통·재래시장이 3년째 이어지고 있는 ‘코로나19 사태’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손님들의 발길이 끊기고, 매출이 반 토막 나는 힘겨운 상황의 끝이 아직 보이지 않는다.서민들에겐 먹고사는 문제 이상 중요한 것이 없다. 그 문제를 해결해 줄 지도자라면 누구나 믿고 따를 수 있지 않을까? 이번 20대 대통령선거 과정에서 수많은 전통시장 부활 정책과 지원책이 발표된 것으로 안다. 이것이 공약에만 그치지 않고 반드시 지켜지기를 간절히 바란다.새로운 대통령의 탄생과 함께 올 봄엔 전통시장이 손님들로 북적거리
옛 어른들은 허투루 버려지는 밥 한 톨, 김치 한 조각도 안타까워했다. 벼와 배추를 기르는 농부의 수고와 그걸 밥과 김치로 만든 이들이 흘린 땀의 가치를 알았기 때문이다.비단 농산물만일까? 그렇지 않다. 우리가 맥주에 곁들이는 안주로 쉽게 접하는 마른 오징어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반찬으로 즐겨 먹는 마른 멸치 등의 건어물도 많은 이들의 고생스런 손길을 거쳐 술상과 밥상에 오른다.간단치 않은 그 과정을 생각한다면 음식을 함부로 버리는 일도 줄어들지 않을까.포항 죽도시장엔 1970년대 후반 노점에서 시작해 50년 가까이 건어물을
비단 포항에 거주하는 사람만이 오가는 장소는 아니다. 대게와 과메기 등 맛깔스런 해산물이 가득하고, 온갖 농산물과 각종 생활용품을 쉽게 구할 수 있는 죽도시장은 이미 전국적으로도 유명하다.점포 수가 2천여 개에 달하는 대규모 전통·재래시장의 위상을 지켜가고 있는 곳. 바로 그 죽도시장 한가운데서 43년 동안 지역민의 사랑방 역할을 해온 철학원을 운영하는 사람이 있다. 명리학자 황하수(85) 원장.명리학자란 명리학(命理學)을 공부하는 사람. 그렇다면 명리학이란 뭘까? ‘두산백과’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사주에 근거해 인간의 길흉화복
만으로 열아홉 살에 해병대에 입대해 적지 않은 고생을 했다. 제대하고는 대학을 마쳤다. 꿈도 많고, 하고 싶은 일도 많았던 스물넷 젊은이. 그런데, 이게 무슨 일? 죽도시장에서 잔뼈가 굵은 아버지가 심근경색증으로 쓰러졌다.누군가는 아버지가 해오던 일을 맡아야 했다. 스스로는 선택한 바 없음에도 ‘장남’이라는 묵직한 책임감이 김재원(29)씨를 억눌렀다. 그러나, 망설이지도, 우물쭈물 피해가지도 않았다.그로부터 5년. 많은 것이 변했다. 아픈 아버지를 속이고 돈을 뜯어가려던 이들이 보란 듯 물려받은 가게를 정상화해 성장시켰고, 아들을
1997년의 ‘슬픈 기억’을 잊지 못한 이들이 적지 않을 듯하다. 해마다 높은 경제 성장률을 보이며 ‘주목받는 아시아의 용(龍)으로 커가던 한국’이 밑을 예측할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졌던 해.부득불 IMF의 지원을 받아야 한다는 ‘명백한 사실’을 인지하며, 국민 다수가 일찍 터뜨린 샴페인의 병을 다시 닫자고 한 목소리를 냈다. 그 시절 신조어로 등장한 것이 있으니 언필칭 ‘아나바다 운동’이다.흥청망청 사용되던 것들을 “아껴 쓰고, 나눠 쓰고, 바꿔 쓰고, 다시 쓰자”는 전 국민적 캠페인.그때부터 아까운 줄 모르고 쉽게 버리곤 했던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는 개인적 경험부터 먼저 한 토막.6년 전이다. 모친과 일본 북부를 여행했다. 70대 노인에겐 이국(異國)의 낯선 음식이 편하지 않기 마련. 그래서다. 여행 마지막 날 저녁은 삿포로 시내의 한식당에 갔다.한국에 비한다면 별 볼일 없는 김치찌개임에도 맛있어하는 모친에게 물었다. “엄마가 한 것만 못하잖아요.” 돌아온 대답이 흥미로웠다.“너,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이 뭔 줄 아냐? 남이 해준 음식이야.”일생 엄마와 아내가 해준 요리만을 먹어본 아들과 남편은 알 수 없는 사실이다. 기자 역시 그런 아들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