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석사는 신라 문무왕 16년(676)에 의상대사가 창건한 절이다. 산의 지형을 이용해 계단과 축대를 쌓아 극락과 깨달음을 향해 가는 9품 만다라의 이미지를 가진 도량이다. 하품하생인 천왕문을 지나면 중품중생인 범종루를 거치고 상품상생인 안양루를 지나면 마침에 극락정토인 무량수전에 이른다. 아홉 단계를 착한 공덕을 쌓고 수행하면 극락세계에 환생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일행들이 문화해설사의 설명을 듣는 사이 나는 서둘러 극락세계로 향한다. 모처럼 고요한 부석사의 품에 홀로 안겨 사색에 젖고 싶다. 햇살이 따갑게 내리꽂히는 계단을 묵묵히 오른다. 얼굴은 벌겋게 익고 몸은 땀으로 젖지만 겸손한 초록빛이 마음을 씻어준다. 한 단계 한 단계 석축을 올라설 때마다 새로운 기쁨과 감동들이 더해진다. 나는 부석
연미사(燕尾寺) 법당에 앉아 있는데 자꾸만 마애석불이 아른거린다. 조심스럽게 달려간 내게 불자 한 분이 온기가 남아 있는 좌복을 건네주고 총총히 사라진다. 거대한 바위불상 아래 두 손을 모으고 서 보지만, 석불의 표정은 읽을 길이 없다. 바위에 둘러싸인 작은 공간은 어머니의 자궁처럼 아늑하다. 어떤 근심도 들어서지 못할 태곳적 신성함이 전해진다. 적당히 흐린 하늘과 숨을 죽이는 바람, 깊은 강물과도 같은 침묵이 나를 에워싼다. 조용히 가부좌를 하고 앉는다. 대웅전에서 들려오는 예불 소리가 물꼬가 되어 영혼으로 흘러든다. 마음은 제 멋대로 과거를 향해 치닫다가 내면을 더듬기도 한다. 이 은밀한 공간은 내가 우주와 연결되어 있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해 줄지 모른다. 섣부른 욕심이다. 딱딱하게 굳어 있는
자동차가 천등산 자락을 힘겹게 오른다. 신라의 고승 의상 대사가 수도할 때 하늘에서 큰 등불이 비춰주어 99일만에 도를 깨쳐 99칸의 절을 짓게 되었다는 개목사(開目寺)가 저기 저 산 아래 숨어 있다. 사찰과 불교에 박식한 동행인이 고찰에 대한 전설을 풀어낸다. 개목사는 처음 흥국사(興國寺)라 하였다. 당시 안동 지역에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들이 많았는데 비보(裨補)사찰을 삼은 후에 소경들이 없어졌다하여 개목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또 조선 초기 재상 맹사성이 안동부사로 부임해 왔을 때, 안동의 지세가 눈병 환자가 많을 형상이어서 개목사로 이름을 바꾸었더니 눈병 환자가 없어졌다고 한다. 종교적인 색채를 풍기는 설화든, 훌륭한 목민관의 자세와 풍수도참설을 귀히 여기던 시대성이든, 내게는 크게 다가
몸살 기운이 채 가시지 않은 몸을 이끌고 청도 운문사 사리암으로 향한다. 이른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유월의 아침은 상큼하다. 벚나무 가로수들이 가르마처럼 하늘 길을 튼 채 신록의 터널을 이루고, 나무들 사이로 깊고 푸른 운문호가 인사를 건네 온다. 때마침 FM에서 흘러나오는 슈베르트의 피아노 3중주의 선율 속에 빠져 나는 꿈을 꾸듯 황홀하다. 일주문에서 운문사를 지나 사리암까지 이어지는 솔숲 길로 접어들었다. 저절로 아픔이 치유되고 삶이 맑아지는 기분이다. 이토록 정갈하고 호젓한 산사 길이 있을까? 출입을 제한하며 숲을 관리해 온 까닭에 골짜기는 생태계의 보고로 풍성하고 기름지다. 모래가 섞인 흙길이 사각거리며 자신의 존재를 알려오고 계곡물도 신록 속에 몸을 감춘 채 소리없이 흐른다. 몸과 마음이 부
청량사는 신라 문무왕 3년(663년) 원효대사가 창건했다. 육육봉이 연꽃잎처럼 절을 둘러싸고 그 연꽃 수술 자리에 청량사가 자리 잡고 있다. 당시 봉우리마다 크고 작은 암자가 27개나 있어 스님들의 독경소리가 청량산을 메울 만큼 불국토를 이루었다고 한다. 지금은 청량사와 외청량사라 불리는 응진전만 남았지만 겸재 정선의 동양화 한 폭을 보듯 비경을 자랑한다. 몇 년 전 처음 청량사를 찾았을 때 가파른 시멘트 포장길은 그야말로 고행길이었다. 서둘러 사찰을 보고 싶다는 욕심 때문에 길은 더 험난하고 고되게 느껴졌다. 오늘은 여유를 가지고 수행하는 마음으로 느긋하게 오른다. 결코 쉽게 넘보아서는 안 될 사찰이다. 한걸음 한걸음 뗄 때마다 다리는 아프지만 백팔번뇌 내려놓고 마음을 모으다 보면, 이내 기왓
오월의 품속에서 반짝이던 경호강 물길이 어느새 가슴 속에서 찰랑거리며 흐른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시간 밖의 절, 겁외사를 찾아가는 오후는 따뜻하고 평화롭다. 뜻밖에도 어수선한 로터리를 끼고 있는 사찰 앞에서 잠시 혼란스럽다. 저절로 백팔번뇌 내려놓고 하심(下心)이 생기는 고요한 사찰을 기대했었다. 18개의 기둥으로 이루어진 누각이 일주문인 셈이다. 정면은 `지리산 겁외사`, 뒤편은 `벽해루`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잘 정돈된 마당 한가운데 성철 스님의 사리가 봉안된 입상이 들어서는 나를 멀리서 지켜보고 있다. 생전의 모습으로 걸어 나오실 것만 같다. 조용한 경내에 긴장감이 돈다. 석가모니불이 아니라 비로자나불이 봉안되어 있는 대웅전으로 곧장 향한다. 보통 사람의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광명
새내기 직장인 딸이 잦은 야근으로 힘들어했다. 꽃다운 나이에 자아 실현은커녕 존재의 결핍과 허무, 상실감들을 토로하는 그녀를 어떻게 위로해 주어야 할지 난감했다. 원 없이 잠만 자고 싶다는 딸을 데리고 완주 송광사로 향했다. 무언가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막연한 기대를 안고 떠났다. 신라 진평왕 5년(583) 도의선사가 터를 잡고 경문왕 7년 보조 체징선사에 의해 중창된 송광사는 산속이 아니라 마을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호흡하고 있었다. 국보급 보물들이 많은데도 입장료가 없는 문턱 낮은 가람이다. 일주문부터 다포계 팔작지붕의 화려한 금강문, 여닫을 수 있는 문이 있는 보물 1255호인 천왕문이 대웅전까지 일직선상에 놓여 있다. 범종을 중심으로 목어, 운판, 법고가 모셔져 있는 아(亞)자형 종루의
봉화 분천역은 첩첩산중에 있는 작은 간이역이다. 열차가 유일한 교통수단이었을 것만 같은 깡촌이다. 엽서 속에나 숨어 있을 듯한 풍경들이 협곡열차가 생기면서 알려지게 되었다. 이 오지에 봄과 관광객이 찾아와 들썩인다. 열차는 백두대간을 뚫고 내려오는 낙동강 지류를 끼고 느리게느리게 달린다. 보이는 것은 봄볕에 설레는 산과 계곡뿐이다. 열차는 묘한 향수를 싣고 나아간다. 어린 시절, 여행을 좋아하시는 할아버지를 따라 나설 때면, 엄마는 잊지 않고 간식거리를 준비해 주셨다. 껍질이 잘 벗겨지지 않는 달걀을 까먹을 때쯤이면 열차는 낙동강 철교 위를 철커덕철커덕 심장이 얼어붙는 소리를 내며 건너갔다. 빨려들 것만 같던 도도한 물살과 철교 위를 지날 때면 어김없이 들리던 거칠고 난폭한 문명의 소리가 그리워지곤
봄비가 성주호를 적신다. 운무의 흐느낌조차 안온한 4월, 자기만의 색깔로 다투어 피어나던 파스텔톤의 빛깔들이 차분하게 호수 속에 잠들었다. 봄날의 유혹 앞에서 호수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고요하지만 그 내면에는 굉장한 소용돌이가 있음을 안다. 뒤늦게 핀 산벚꽃들과 색색깔의 연둣빛 치장이 이어지는 무흘구곡을 따라가면 청암사가 나온다. 청암사는 직지사의 말사로 헌안왕 3년(859) 도선 국사가 창건하였으나, 인조 25년 화재로 전소되어 혜원 스님이 중건하였다. 여러 번의 전소와 폐사로 성쇠를 거듭했지만 지금은 청암사 승가 대학이라는 비구니 강원이 설치되어 100여 명의 스님들이 공부하는 사찰이다. 단청 없이 나무의 속살이 그대로 드러난, 반가의 고택 같은 전각들이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불령산
염불 소리가 봄 햇살을 업고 마중을 나온다. 대웅전 법당문은 활짝 열려 있고 한 켤레의 신발만이 기도 중인 뜰에는 햇살이 눈 부시다. 문턱을 넘어 나오는 예불 소리에서도 봄 향기가 묻어나고, 작은 법당에서는 탁 트인 경관이 들어와 함께 기도중이다. 만어사는 46년 수로왕이 창건하여, 신라 시대에는 왕들이 불공을 올리는 장소로 이용되던 사찰이다. `동국여지승람`과 `택리지`의 기록에 의하면, 옛날 동해 용왕의 아들이 수명이 다한 것을 알고 낙동강 건너에 있는 무척산(無隻山)의 신승(神僧)을 찾아가서 새로 살 곳을 부탁하였다. 신승은 가다가 멈추는 곳이 인연 터라고 일러주었다. 왕자가 길을 떠나자 수많은 종류의 고기떼가 그의 뒤를 따랐는데, 머물러 쉰 곳이 이 절이었다. 그 뒤 용왕의 아들은 큰 미륵돌로
아름드리 갈참나무의 중후함과 파스텔 톤으로 물들어가는 애기단풍들의 두근거림이 길을 밝힌다. 연못에 몸을 담근 쌍계루의 반영도 봄빛으로 수줍다. 하늘과 나무, 햇살, 말끔한 차림의 백암산까지 연못 안에 모여 자기를 반추한다. 약간의 긴장과 평화로움이 살아있는 완벽한 데칼코마니, 백양사의 봄날은 유난히 투명하다. 해인사, 통도사, 송광사, 수덕사와 더불어 5대 총림의 하나인 백양사(白羊寺)는 632년(무왕 33)에 여환이 백암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하였다. 고려 때 중연 선사가 중창하면서 정토사로 이름을 바꾸었다가 조선 선조 때 환양 선사가 다시 백양사라 고쳐 불렀다. 백양사의 이름은 흰 양을 제도한 데에서 유래한다. 환양이 백학봉 아래 영천암에서 금강경을 설법하는데 수많은 사람이 몰려들고 흰 양도
선암사 찾아가는 길은 용기를 내야할 만큼 먼 초행길이지만 봄비가 온다는 소식에 마음이 설렌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선암매를 비롯하여 수백 년 된 매화 70여 그루가 자란다는 절, 나는 우중(雨中)에 고령(高齡)의 선암매와 마주하고 싶었다. 선암사는 신라 진평왕(542년) 때 아도 화상이 비로암 자리에 창건했지만 도선 국사가 지금의 터에 중창하고 신선이 내린 바위라 하여 선암사라 명명했다고 한다. 또 절 서쪽에 10여 장이나 되는 큰 돌이 평평해 옛 선인이 바둑을 두던 곳이라 하여 이름 붙여졌다는 설도 있다. 1500여 년의 역사를 간직한 사찰답게 깊고 중후한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대가람이다. 늦게 찾아온 봄이 깨어날 채비를 서두르는데 봄비 몇 방울이 듣다가 그친다. 부도밭을 지나고 보
지평선을 볼 수 있을 만큼 너른 곡창지대에 우뚝 솟은 산, 그 품에 안긴 금산사가 보고 싶었다. 강인하고도 넉넉한 어머니를 떠올리며 금산사로 향했다. 우리를 맞아준 것은 심한 황사 속에서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서성이는 겨울의 그림자였다. 봄 햇살의 몸짓이 어딘지 불안하다. 보제루 앞을 지키는 목련 봉오리의 창백한 눈빛과 관광객들의 분주한 발걸음, 넓은 터와 웅장한 전각에서 여느 사찰과 달리 장군다운 기상이 느껴진다. 이른 봄날의 사찰은 어수선하지만, 희망과 기대감으로 술렁인다. 황사가 물러가기를 기다리는 목련처럼 금산사는 미륵불이 도래할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금산사는 백제 법왕 원년(599)에 창건되어, 통일신라 때 진표율사가 중창하면서 대가람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하여 최고의 미륵도량으로 알
아침 설거지를 하다가 그릇 부딪치는 소리에 지난 시간의 문을 열고 말았다. 유쾌하지 않은 기억들이 또 다른 기억과 생각을 몰고 온다. 무심코 주고받은 말들이 시퍼렇게 살아서 상처를 내기도 하고, 좀 더 신중하지 못했던 행동들에 자조적인 물음을 던져보기도 한다. 이런 날은 침묵하고 싶다. 홀로 거조암으로 향한다. 자동차는 고속도로 위를 질주하다, 개발의 훈풍을 기대하는 소도시의 국도를 천천히 달린다. 낯선 길은 새롭고 신선한 감동을 안겨 주지만 이 길은 익숙하고 편안하다. 오늘 같은 날, 봄빛이나 흙냄새를 기대하는 건 사치다. 사금파리가 되어 내면을 아프게 하는 것들과의 조우, 나는 애써 외면하지 않는다. 아픔이 힘이 될 때도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거조암은 은해사보다 먼저 지어 원래 거조사
문득 봄소식이 궁금하여 남해의 섬, 비진도를 찾았다. 산수가 수려하고 풍광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해산물이 풍부하여 보배에 견줄 만하다하여 이름 붙여진 섬이다. 공기는 투명하고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다. 한 무리의 등산객들이 벌써부터 돌아갈 뱃시간을 생각하며 바쁜 걸음으로 산을 오른다. 나는 모처럼 낯설지 않은 것들과 호흡하며 바닷가 산책로를 걷는다. 밭둑에서는 매화꽃이 터지고, 길가에는 새로 돋은 쑥이 무리지어 나풀거린다. 햇살에 반사되어 빛을 가늠할 수 없는 바다 위를 통통배가 지나간다. 길바닥에 주저앉아 하염없이 바다와 마주 하고 싶다. 통통배 소리조차 정적 속으로 흡수되는 시간, 친구는 저만치 뒤에서 카메라에 섬 풍경을 담느라 정신이 없다. 나는 타박타박 봄빛 속을 걷는다. 똑같은 풍경
지척의 거리에 있는 고도 경주는 가깝고도 먼 도시이다. 자주 들르긴 하지만 천 년의 역사를 제대로 음미하거나 감동해 본 적은 거의 없다. 신라의 전통 문화와 예술이 가까이에서 숨 쉬고 있다는 것은 큰 축복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언제나 소극적이었다. 용장골에서 시작된 긴 산행의 행렬을 개구리가 요란하게 울어대며 맞는다. 봄이 오는 소리가 가득하다. 그리 높지 않지만 신라 불교예술의 보고인 지붕 없는 박물관, 간 밤에 내린 비로 자욱한 운무가 숲을 지키고 있었다. 신비롭고 몽환적이다. 젖은 솔 내음이 후각보다 가슴을 먼저 자극한다. 감탄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아름다운 광경 앞에서 말문이 막히고 겸허해질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정직한가. 자연은 끊임없이 비경을 만들어내면서도 교만하지 않은 예
통도사에 홍매화가 피었다는 소식을 접한 지는 한참이나 지났다. 바람이 분다는 소식에 친구의 가슴에도 분분히 매화 꽃잎이 떨어지기 시작한 걸까. 통도사의 자장매가 궁금했나 보다. 그녀의 용기에 내 마음은 이미 매화 꽃잎 화사한 나무그늘에 앉아 있다. 자장율사를 기리기 위해 스님들이 심고 자장매라는 이름을 붙여준 홍매화, 그를 만나러 가는 길은 설렘으로 가득하다. 봄은 언제나 통도사 홍매화에서 시작된다. 꽃봉오리를 터뜨렸다는 소식이 들리면 겨울은 갑자기 수척해지고 내 안에서도 전혀 다른 세상이 꿈틀대기 시작한다. 파란 싹을 틔우듯 새로운 각오로 무언가를 꿈꾼다. 칙칙한 일상도 산뜻해질 것만 같다. 이러한 통과의례를 거치고 나면 그제야 세상은 봄빛을 쏟아낸다. 통도사는 영축산에 자리한 대사찰로 신라
옛 기억을 더듬으며 군위 인각사를 찾았다. 부푼 기대와 달리 평지에 있는 경내는 쓸쓸하다 못해 황량하다. 개울 건너 학소대만 차가운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절을 지키고 있다. 인각사는 한 때의 영화를 기억이나 하고 있을까. 신라 선덕여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해서 일연 스님으로 인해 유명해진 인각사는 전국불교의 본산이었을 정도로 대가람이었다. 그러나 조선의 숭유억불정책으로 퇴락하기 시작하여 옛 전각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고 폐사나 다름없게 되었다. 그러다 삼국유사의 고향으로 각광받으면서 조금씩 옛 모습을 복원하려고 노력 중이지만 발굴할 게 많아서 그런지 어딘지 어수선하다. 고조선의 건국신화와 신라의 향가 등 귀중한 자료가 기록된 문헌, `삼국유사`를 일연 스님이 이곳에서 완성하셨다. 혹자는 삼국유사
함월산 기슭에 자리한 골굴사는 신라인의 호국불교 정신과 불가의 전통 수행법인 선무도(禪武道)를 양성시키는 중요한 사찰이다. 초입부터 여느 산사와는 분위기가 다르다. 일주문 앞에 무예 조각상들이 일렬로 서 있어 소림사에 온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선무도가 어디에서 열리는지 몰라 헤매고 있을 때 벽안의 앳된 청년이 서툰 우리말로 알려 준다. 선무도장 안에는 무복을 입은 젊은이들이 맨발로 무예를 펼친다. 절도 있는 동작들과 흐트러짐 없는 눈빛이 실내를 긴장시킨다. 연마된 몸동작, 정신의 혼연일체, 모두 숨을 죽이고 하나가 된다. 일곱 동물의 동작에서 따온 선무도를 보며 나는 호랑이의 포효하는 듯한 강인함과 학의 고고함을 느낀다. 단순히 공격이나 방어의 무예가 아니라 내면의 정신세계를 함께 수양하는
함월산(含月山)은 넉넉하게 기림사를 품고 있다. 몇 번을 다녀가도 그리움이 묻어나는 품격 있는 사찰이다. 일주문을 통과하면 넓고 완만한 숲길이 천왕문까지 이어진다. 기림사는 한때 불국사를 말사로 두었을 만큼 큰 사찰이다. 인도의 승려 광유가 창건하여 임정사라 부르던 것을 신라 선덕여왕 때 원효대사가 절을 중수하면서 `기림사`로 바꾸었다. 부처님이 생전에 제자들과 수행하던 승원 중에서 첫 번째로 꼽히며 당시 최초의 절인 기원정사에서 따온 이름인데 여전히 고찰다운 풍모를 자랑한다. 푸른 대숲이 겨울바람에 몸을 떨며 천왕문 입구를 밝힌다. 검(劍), 비파(琵琶), 탑, 용을 쥐고 있는 사천왕상이 오늘도 부리부리한 눈으로 사바세계의 중생들이 불도에 따라 올바르게 살아가는지를 살핀다. 저절로 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