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인터넷에 의미심장한 통계자료가 올라왔다. 한국갤럽이 제시한 ‘우리 사회 차별 정도 인식’의 8개 항목 수치가 그것이다. 구체적인 항목을 열거하면 이렇다. 빈부 차별, 비정규직 차별, 학력-학벌 차별, 장애인 차별, 성 소수자 차별, 국적-인종 차별, 성(性)차별, 나이 차별이다. 여덟 가지 차별 가운데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한 사회문제라 할 것이다. 그중에서 몇 가지만 생각해보고자 한다.차별 정도가 매우 심각하거나 약간 심각하다고 응답한 비율을 보자. 빈부 차별 81%, 비정규직 차별 79%, 학력-학벌
제헌절은 1948년 7월 17일 헌법이 공표된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2022년 7월 17일은 74번째 맞이하는 제헌절이었다. 그동안 우리 헌법은 9차례 개정되었는데, 그 가운데 2, 5, 6, 7, 8차의 개정은 권력구조 개편을 위한 것이었다. 달리 말하면 대통령 1인을 위한 헌법개정이 다섯 번이나 이루어졌다는 얘기다. 더욱이 마지막 헌법개정은 지난 1987년의 일이었으니, 35년 동안 헌법개정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영화 ‘1987’에도 나오지만, 1987년 헌법개정을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의 피와 눈물과 희생이 있었는지, 우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황금 세기라 부른다. 다른 유럽 국가들의 문학과 비교할 때 상당히 늦게 출발했지만, 러시아 문학이 세계문학을 선도하는 위치에 올라섰기 때문이다.푸쉬킨에서 시작하여 레르몬토프, 고골을 거쳐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를 지나 체호프에 이르는 19세기 러시아 문학 거장들의 운항은 경이롭다.그중에서도 도스토예프스키의 장편소설 ‘죄와 벌’(1866)은 한국 독자에게도 퍽 친숙하다.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전당포 노파를 죽이고, 그녀의 돈을 사회의 유용한 곳에 쓰겠다는 생각을 구체화한다. 자신의 거처에서 전당포에 이르는 거
누구에게나 나름의 습관이 있다. 타인과 구별되는 버릇이 있기 마련이다. 나는 좋아하는 영화가 있으면 여러 번 본다. 지겹거나 귀찮은 노릇 아니냐고 묻는 사람도 있다. 그러면 이렇게 대꾸한다. ‘좋아하는 음식을 한 번만 먹고 마나요?! 혹은 좋아하는 사람을 한두 번 만나고 그만 만나시나요?!’ 열댓 번 본 영화도 있다. ‘동사서독’이나 ‘천공의 성 라퓨타’가 그렇다.이런 영화는 여러 번 보아도 질리지 않는 구석이 있다. 사람을 끄는 강렬한 매력이 부설돼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쿠지로의 여름’은 그런 부류에 속하지 않는다. 일본의
세상에 우연히 일어나는 일은 없다. 모든 일은 예정된 궤도와 시간 순차성에 따라 수미일관하게 진행된다. 이를테면 이렇다. 언젠가 잠시 살았던 곳 인근에 있는 자동차 정비공장에서 차를 수리하거나 엔진오일을 교체한다. 저녁마다 방문하는 방송국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4년 넘게 산 적이 있다. 열일곱 살 때 처음으로 와보았던 대구에서 30년 넘도록 인연과 관계를 맺고서 살아간다. 우연처럼 보이는 이런 인과율은 곳곳에서 작동한다.개체에서 발생하는 우연이 유기체에서 필연으로 작동한다는 명제가 있다. 소규모로 일어나는 우연이 필연으로 기능한다는
6월 21일은 하지(夏至)다. 북반구에서 밤이 가장 짧고 낮이 가장 긴 날이 하짓날이다. 여름의 정점이다.본디 빛을 좋아하고, 어둠을 꺼리는 성정인지라, 아파트와 거리를 두었다. 해가 늦게 떠서 일찍 사라지는 시멘트 콘크리트 건축물. 촌에서는 해가 일찍 떠서 늦게까지 사위를 밝힌다. 그런 밝음은 사람을 무연하게 행복하게 해준다. 층간소음에 괴로워했던 기억도 사라진 지 오래다.상강(霜降) 지나고 입동(立冬) 거치면서 낮은 짧아지고 밤이 길어지기 시작하면 상황이 역전된다. 시골의 고요는 거룩하고 심오하기가 비할 데가 없기로, 처연함과
1987년 그해 여름은 습하고 무더웠다. 하지만 군부독재 세력과 건곤일척의 회전(會戰)을 앞둔 청춘들의 결기는 공고했다.종철이를 민주주의 제단에 바친 이 나라 민중의 혈맥은 힘차게 뛰놀았다. 그들에게 지거나 밀릴 수 없다는 의지는 욱일승천하는 기세였다. 6월 10일을 기점으로 우리는 18일과 26일 세 차례에 걸쳐 거리로 춤추듯 나아갔다. 학교 부근 개운사 승려들까지 장삼(長衫)에 유인물을 들고 광화문 가는 버스에 동승했다.거리 곳곳에서 터지는 최루탄과 지랄탄의 굉음과 뽀얀 연기도 전진하는 행렬을 막지 못했다. 일부는 명동성당으로
6월 1일은 ‘의병의 날’이다. 국가의 위기에 자발적으로 일어선 백성들의 조직을 가리켜 의병이라 한다. 누란지위(累卵之危)의 국가와 민중을 위해 궐기한 의병을 기리는 날이 의병의 날이다. 임진왜란과 구한말에 거병(擧兵)한 의병이 가장 많았다고 역사는 전한다. 의병 하면 암군(暗君) 선조가 때려죽인 김덕령과 수도 진공 작전의 총대장 이인영이 떠오른다.김덕령(1568∼1596)은 광주 출신 의병장이다. 그는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24살의 나이에 형과 함께 의병을 일으킨다. 그는 호남과 영남 곳곳에서 왜군을 격파하여 공을 세우지
살다 보면 의지와 무관하게 일이 겹치는 수가 있다. 그럴 때 우리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중얼거린다. 참, 재미있네. 그런 유쾌한 일이 지난주와 그 전주에 있었다. 2주 전 금요일 오후에 포항으로 승용차를 몰았다. 30년 인연을 맺어오는 졸업생을 찾아가는 길이다. 바다에서 조금 떨어진 마을에 집을 구한 그가 집을 말끔하게 수리하고 난 다음 나를 초대한 것이다.나는 가끔 내 집을 찾아오는 그와 늦은 시각까지 이야기를 나누곤 한다. 이번에는 내가 그의 집을 찾아간 게다. 그가 안내한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돌아와 식탁에서 예의 정담을 이어
오늘 5월 16일은 성년의 날이다. 성년의 날은 만 19세 성인이 되는 청년들을 격려하고, 책임감을 일깨워주려는 의도로 제정된 법정 기념일이다. 성인이 됨은 가슴 벅차고 유쾌한 일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적 책무를 의식해야 한다는 점에서 부담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이제는 자신의 언어와 행위 하나하나 신중하게 판단하고 실천해야 하는 시기다. 밥만 축내고 나이만 먹는다고 성인 대접을 받는 것은 아니다.요즘 한국인들의 인식에 깊게 자리한 것 하나가 젊어지고 싶은 일이다. “젊어지셨네요”라거나 “젊어 보이세요!” 하고 말하면 누구나 반
음력 4월 8일인 어제는 ‘부처님 오신 날’이었다. 올해가 2,022년이고, 불기(佛紀)로는 2,566년이기에 고타마 싯다르타는 기원전 544년에 태어난 셈이다. 도이칠란트 철학자 칼 야스퍼스는 1949년 에서 ‘축의 시대’라는 개념을 창안한다. 기원전 800년부터 기원전 200년까지 유라시아에 걸출한 사상과 종교가 동시다발적으로 출현했다는 것이다.놀라운 발상이자 탁월한 지적이 아닐 수 없다. 춘추전국시대 중국에서 공자를 비롯한 제자백가가 등장하고, 인도에는 우파니샤드 철학에 바탕을 둔 자이나교와 불교가 출현한
해마다 5월 1일은 ‘노동절’이다. 이날은 세계 전역이 노동자와 노동을 생각하면서 하루 노동을 내려놓는 날이다. 그야말로 노동하는 인간들의 휴식과 노동의 의미 반추를 위해 만들어진 날이다. 그래서 이름도 ‘노동절’이다. 하지만 선진국이라 자부하는 이 나라에서는 노동절이 아니라, ‘근로자의 날’이다. 해괴한 일이다.1886년 5월 미국 시카고에서 발생한 노동자 시위와 관련하여 노동자 8명이 죽어 나간 비극적인 사건이 노동절의 발단이다. 1889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2인터내셔널’ 창립대회에서 5월 1일을 ‘노동절’로 정해 기념하
누구나 좋아하는 꽃과 나무가 있다. 나는 이팝나무꽃과 작약꽃 그리고 배꽃을 특히 좋아한다. 이팝나무꽃의 하얗고 풍성하며 우아하고 여유로운 자태와 그윽한 향기. 작약꽃의 은은하고 새침하며 깔끔한 자태. 배꽃의 화사하고 조화로우며 미끈한 형상이 정말 멋지다. 조선 시대 선비들은 복숭아꽃과 배꽃을 천시하고 구박했는데, 그것은 꽃에도 인문적인 의미와 가치를 부여했던 유자(儒者)들의 유난함 때문이었다.나무 가운데서는 느티나무와 단풍나무 그리고 대나무를 좋아한다. 가정집에서 느티나무를 키우는 일은 격에 어긋나는 일이어서 단풍나무를 기른다.화분
차고 건조한 겨울이 길게 이어지더니 마침내 봄이 왔다. 예년보다 늦게 피어난 꽃들은 무질서하게 몸을 활짝 열었다. 매화와 산수유, 살구와 목련이 필 무렵 사람들은 온통 벚꽃의 개화에 신경을 곤두세운다. 벚꽃 환한 길이 역시 봄날의 장관이다. 하지만 일시에 사라지는 벚꽃은 허무의 극치를 선사하기도 한다. 어쩌면 그런 까닭에 벚꽃이 더 매혹적인지도 모를 일이다.하지만 나는 화사하고 장려(壯麗)하게 피어나는 꽃에만 눈길 주지 않는다. 작고 앙증맞은 녀석들도 땅바닥에 낮게 엎드린 채 피어난다. 봄의 전령인 봄까치꽃과 영춘화(迎春化)가 앞을
세상이 작게 보이는 때가 있다! 그래, 뭐 그리 대단해서 괴로워하고 미워하며 끔찍하게 생각할 게 있냐는 생각에 너그럽고 관대해지는 때가 있다. 딱 이맘때 일이다. 지지 않았으면 하는 벚꽃이 바람에 날리고, 라일락 향기가 오가는 바람에 내년을 기약하는 이즈음 일이다. 붉은머리오목눈이 철모르고 둥지 만들어 뻐꾸기의 탁란(托卵)을 허하던 때다.거친 바람, 괘씸한 바람 불어, 가슴이 바싹 조여오면 하늘과 나무와 구름장 들여다본다. 저리 작은 목숨 지탱할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한밤 지나가는 때 있다. 사람 마음이야 언제나 항상 같지 않
새로운 옷이나 물품이 유행하기 전에 남보다 빨리 사거나 시험해보는 사람이 있다. 반대로 가장 늦게 어쩔 수 없는 얼굴로 따라오는 사람도 있다. 우리는 그 중간 어디쯤에서 부유(浮遊)하며 살아간다. 물질적인 부나 정신적인 여유 또는 대담성이 완비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최후의 모히칸이 되기도 싫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 중간자로 살아가는 일은 가장 평안하고 안전하기 때문이기도 하다.나도 언제부턴가 유튜브를 가까이하게 되었다. 오래전에 텔레비전을 두지 않았기로 저녁 시간을 넉넉하게 보낼 수 있다. 책을 읽거나 기타를 치며 노
한국의 노인들은 서럽다. 어디 가나 찬밥이다. 돈 없고 냄새나고 구질구질하다고 핀잔이다. 누구 하나 노인을 따사롭게 보는 사람은 없다. 노인도 노인을 싫어하고 경원(敬遠)한다. 비단 여기서만 그런 게 아니다. 2007년에 제작된 코엔 형제의 문제작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황혼에 접어든 보안관 벨은 말한다.“개목걸이를 목에 두르고 알몸으로 거리에 뛰쳐나와야 겨우 사람들의 이목(耳目)을 끌 수 있어. 늙은이들한테는 누구 하나 관심이 없잖아.”21세기 유일 세계 제국 아메리카에서도 노인들은 소외당하고 방치되고 살해되고 있다. 코
코로나19의 선물 가운데 하나는 세계의 다채로운 영화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관객들로 만원이 되곤 했던 2020년 이전의 대형 영화관들은 장삿속에 혈안이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이윤이 남는 미국 할리우드 영화를 주로 수입하여 배급했다. 복합 상영관이라는 것은 말뿐이고, 실제로는 잘 팔리는 서너 개 영화 일색이었다. 그런 상황이 코로나19 이후 일변하였다.장삿속에 정신이 나가 있던 복합 상영관들이 정말로 다양한 영화를 세계 전역에서 수입하고 있다. 작년과 올해 내가 본 영화는 대개 미국 이외의 나라에서 제작된 것이다. 프랑스, 에스
벨기에 시인이자 극작가인 모리스 마테를링크(1862∼1949)가 쓴 ‘파랑새’가 떠오르는 시점이다.1908년 출간된 ‘파랑새’를 러시아 연출가 콘스탄틴 스타니슬라프스키가 ‘모스크바 예술극장’ 무대에서 곧바로 상연한다. 외견상 ‘파랑새’는 어린이를 위한 작품 같지만, 그 내면에는 삶의 본질을 찾아가는 기나긴 여로가 자리한다.크리스마스 전날 밤 가난한 남매 치르치르와 미치르는 선물을 받지 못해 의기소침해 있다. 그때 옆집 할머니가 들어와서 앓고 있는 딸을 위해 파랑새를 찾아달라고 부탁한다. 아이들은 할머니가 건네준 요술 모자를 쓰고 길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제20대 대통령 선거가 코앞이다. 지금까지 있은 어떤 대선보다 후보들에 대한 유권자들의 호감도가 낮다는 게 중론이다. 지난 대통령 선거를 돌아보면 이런 견해가 올바르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왔을까, 하는 심사를 금하기 어렵다.‘87체제’ 이후의 대선만 회고해 보자. 1노 3김 경쟁체제로 치러진 1987년 대선은 문자 그대로 ‘양김’의 분열과 노태우의 어부지리로 종결됐다. 하지만 박정희·전두환의 체육관 선거를 종식했다는 점에서 기억할 만한 대선이었다. 1992년 김영삼-김대중-정주영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