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몇 년째 쓰던 폴더형 휴대전화가 고장이 나서 서비스센터에 가니 정비 기사가 요즘은 모두 스마트폰을 쓰고 있다며 이번 기회에 바꾸라고 권한다. 가격도 만만찮고 통신비도 그렇고, 더군다나 복잡한 기능을 제대로 알 수도 없고…. 몇 번을 망설이다가 스마트폰이 대세라는 권유에 큰맘 먹고 스마트폰을 장만했다. 얼마 뒤 군에 간 큰놈이 휴가를 와서 집중지도를 받은 덕에 이른바 `카톡`이니, `카카오스토리`를 시작하게 됐다. 이젠 제법 능숙해져서 사진도 여러 장 편집하여 올릴 줄 알고 다른 사람에게 나의 소식을 전할 수 있게 됐으나 관심은 내가 올린 글에 몇 사람이 댓글을 달았느냐에 집중된다. 댓글이 몇 개 없으면 괜히 올렸나 싶기도 하고, 나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스
역사가 진행됨에 따라 앞으로 인간의 삶은 획기적인 변화를 겪을 것 같다. 이제 인권은 절대적인 명제가 돼서 각 사람들은 사회의 엄연한 주체가 돼 살아가고 있다. 그에 따라 개개인이 강조되는 사회로 가속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가족은 개인이 모여 있는 사회의 제일 작은 기본단위이다. 서로 사랑으로 녹아들어 있는 각자는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고 가정은 자주성을 인정하는 곳이 될 것이다. 부부간에는 현재도 분업적인 평등한 관계로 변하고 있는 중이다. 이후에는 동거, 유사(계약)가족, 다문화 가족, 독신 가구, 동성 결혼 등 다양한 가족 모양에 대한 인식과 배려를 필요로 할 것이다. 앞으로는 자기 위주의 생각 때문에 원만한 사회생활을 하는 방법이나 이기주의를 극복한다든지 가족 안에서 서로 간에 소통하여
바야흐로 결실의 계절인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황금들판과 오색 단풍으로 물들인 우리의 금수강산은 저마다 관광객을 유혹하는 계절이다. 이와 같이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 풍요를 누릴 수는 없을까. 비단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경제적인 불황을 맞아 여러 가지 많은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다. 선량한 국민들의 시선으로 볼 때 우리나라가 경제면에서는 대체로 세계적으로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다. 하지만 정치면에서는 후진성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현실이다. 이는 우리 국민들은 정치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부정적인 시각으로 정치권을 바라보는데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우리는 각종 모임 등 일상생활에서 친구들을 만나면 정치에 관한 이야기가 단연 단골 화젯거리로
인간은 신석기시대부터 가축을 길러왔다. 가축이란 집에서 기르다가 그러는 사이에 정이 든 짐승을 말한다. 그러나 이제는 정든 짐승이 아니라 대량으로 판매하는 산업생산물로 바뀌고 있다. 살찌워서 양을 최대화하고 비용을 최소화해 효율적으로 가축을 사육하는 장소를 `공장식 가축 농장`이라 부른다. 이때의 가축은 생명체가 아니라 부의 축적을 위한 `상품`일 뿐이다. 가축은 많은 이윤을 위하여 비좁은 공간에서 밀집시켜서 키운다. 여기에 갖가지 동물약품을 사용하고 단일품종을 대량으로 사육하는 소위 `집중적인 가축시설`이 많다. 대규모 공장식 축산 농장은 전체의 2%정도 이지만 시장으로 출하되는 비율은 80%가 넘는다고 한다. 공장식 축산업이란 모든 과정을 수직적 통합으로 계열화한 거대 축산기업들을 말한다.
사람이 살아가는 것은 걷든, 차를 타든 길을 가는 것과 같다. 그 마지막 도달점은 천당이나 극락, 소멸 등 그가 자라온 환경과 믿음에 따라 다르다. 그러나 죽음까지의 과정이 `길을 가는 것과 같다`는 데는 누구나 동감한다. 사람의 인생길에는 논밭 사잇길, 오솔길, 비포장 도로, 등산로, 신작로, 고속도로 등이 있다. 재수있는 사람은 고속도로를 휘파람 불면서 달릴 것이다. 제일 억울한 자는 달리는 길에서, 표식도 없이 낭떠러지를 만나는 사람이다. 짐을 지고 힘겹게 오솔길을 가는 사람은 고속도로를 달리는 사람보다 수십 배의 고통을 당하지만 종교에서는 어느 길로 가고 있든 모두는 신을 찬양하라고 한다. 그 결과에 대한 해답은 신만이 알고 있고 숙명이라면서. 인생길은 험난하다. 평평한 곳은 잠시일 뿐
행복하게 살겠다고 그렇게도 별렀던 날들은 꿈결같이 지나간다. 이전 것은 그리움만 남긴 채 아득한 하늘 저 멀리 점이 되어 사라져간다. 삶에 지치는 매일의 생활 속에서도 인생의 나이테는 불어난다. 운명이라는 덫에 걸린 우리는 시간에 밀리면서 살아 왔고 살아갈 뿐 이런 자연의 흐름을 거스를 수가 없다. 흘러가버린 것들은 이제 기억으로 축적돼서 누구나의 가슴속에 아련히 추억으로 내재되는가 보다. 겹겹이 녹아들어 그리움의 씨앗이 된다. 그리움은 애틋함으로 포장돼 마음 저 깊이 저장된다. 그래서 그것은 우리가 하는 일들과 따뜻하게 정을 나누는 생활 속에서 싹을 틔운다. `사랑한다`와 `보고 싶다`가 만나면 변하여 `그립다`로 한 차원을 높여 준다. 그리움의 대상에는 남녀 간의 문제뿐만이 아니라 고독한 자기
친구와 대화를 하는 중에 어쩌다가 평화 이야기가 나왔다. “이 시대는 어떤 상태라야 평화스럽다고 말 할 수 있을까?”를 그에게 물어 보았다. 조금 머뭇거리더니 “기쁘게 살아가는 곳이겠지. 자기가 할 것은 모두 스스로가 하고, 남을 도우면서 열심히 살아가는 곳이겠지. 때로는 사람들 사이에 의견이 대립되어도 양보하고 타협할 줄 아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이 아니겠는가!”라고 대답했다. 우리들은 여러 가지 생각과 다양한 환경, 그리고 개인 특유의 인격을 가지고 살아간다. 각자의 교육을 받은 정도와 내용은 모두가 다르다. 그래서 각자는 자기만의 개성과 경향, 기호, 경험이 있다. 평화는 사람들의 다양한 입장을 배려하는 곳에서만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도 않다. 많은 시민들을 위하는 복지가
신학대학 재학 중에 결혼이주여성의 상담을 한 적이 있다. 캄보디아에서 온 여성이었는데 상담의 주된 내용은 고부간의 갈등이었다. 한참을 이야기하면서 왜 고부간의 갈등이 발생하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 원인은 너무나도 단순했다. 시어머니의 `말`때문이었다. 자신이 보기에는 두 돌이 지난 자신의 아기가 너무나도 예쁜데 시어머니는 자신의 아기에게 `똥강아지`라고 부른다는 것이었다. 한참을 설명하였지만 도무지 왜 자신의 아기를 강아지라고 부르는지를, 거기다 더럽고 혐오감을 주는 단어인 똥이라는 단어까지 붙여서 부르는지를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결국 시어머니에게 전화를 해서 아기를 부를 때 `똥강아지`라고 부르지 말아달라고 부탁을 했다. 시어머니 역시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했지만 더 이상 아기를 부를 때 `똥강아지`라
뱀띠인 올해도 벌써 음력으로 추석기간이 지나갔다. 뭣이든 이뤄야 한다고 작정했던 것도 점차 윤곽이 희미해진다. 남은 몇 달간이라도 최선으로 노력하면서 훤히 뜬 달에 나의 기원을 띄워보자. 서아시아 지방의 이스라엘도 오순절 등의 절기를 달의 크기를 기준으로 한 음력에 맞췄다. 그래서 그 날들이 현재의 달력에서는 매년 다른 일자에 정해진다. 수천년을 이어온 민족의 음력절기인 추석은 지금도 우리 문화에 엄존하고 있다. 올해는 뱀의 해다. 뱀은 혀를 날름거리면서 소리 없이 접근하며 독이 있기 때문에 징그럽고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구렁이는 집을 지키는 존재로 또 뱀은 매년 허물을 벗기 때문에 변화와 재생을 의미해 왔다. 또 뱀은 다산이나 재물의 풍부함을 대표하는 동물로 여겼다
20여 년 전 어느날 저녁을 먹고 난 후 친구들과 대구가 내려다보이는 산위에 올라간 적이 있다. 누가 노래하자고 말하지 않았는데도 거기서 자연스레 합창이 흘러 나왔다. 그러다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아! 목동아`를 부르기 시작했다. 노래가 끝나자 모두는 박수를 쳤다. 자기들이 불렀으면서도 스스로를 격려하듯이 자연스럽게 박수가 터져 나왔다. 이 노래는 아일랜드 북부에 살던 제인로스(1810~1879)가 창밖에서 한 집시가 바이올린으로 연주하는 곡을 악보로 만들었다고 한다. 원래 이 노래는 시골 목동이 도시로 떠나는 사랑하는 소녀와 헤어지기 안타까워 부르는 이별의 노래였다고 한다. 그 후 웨슬리가 1913년에 쓴 시 `Danny Boy`라는 가사를 붙인 것을 우리가 자주 노래로 부른다. 아일랜드는
`You Raise Me Up`(주님 날 일으키시네). 이 노래는 나의 입술의 중얼거림의 기도가 되었다. 중얼거림이라는 표현과 기도라는 표현이 맞지 않다는 생각을 하지만 나에게는 분명 중얼거림의 기도가 되었다. 중얼거림이란 사전적으로는 “남이 잘 알아들을 수 없는 조금 작은 목소리로 자꾸 혼잣말을 하다”라고 정의한다. 그런데 나에게 있어서 `중얼거림`이란 영어로 설명하면 mumble, mutter가 아니라 murmur라고 하면 보다 이해가 쉬울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응얼거림이 더 나은 표현일 수 있다. “내 영혼 지치고 피곤할 때에, 근심 걱정 내 맘 짓누를 때, 난 잠잠히 주님을 기다리네. 주님 내 곁에 오실 때까지. 주님 날 일으켜 산위에 세우네. 거친 바다 위 걷게
인간이 신을 창조했는가? 또는 신에 의해 만들어진 인간이 신을 새삼 알아가고 있는가? 만일 인간이 신을 설정했다고 하면 무신론이고 그 반대의 개념이라면 창조론이다. 매일의 생활에 자신이 있는 사람은 없다. 오히려 현재의 삶도 두렵고 그것의 미래의 전개에 대해 인간은 불안과 두려움을 느낀다. 더 큰 것은 죽음 이후의 과정을 생각하면 막막함과 아연함을 느낀다. 인간은 개인의 삶의 두려움을 해소하기 위해 모여 살고 그래서 크게는 대도시까지 이루었다. 그리고 심연 모를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 여러 종교가 우후죽순처럼 나타나 있다. 철학자 스펜서 “사람은 삶이 두려워서 사회를 만들었고, 죽음이 두려워서 종교를 만들었다”고 했다. 무신론자인 리처드 도킨스는 두렵고도 불안해하는 인간 군상을 보고서 “누군가가
인간 사고의 성장은 가정에서 형성된 생각을 바탕으로 해 이루어져 간다. 그래서 살아가면서 습득한 체험을 거기에 보태면서 점차 생각의 범위를 넓혀 나간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각자의 삶에 대한 개념을 우리는 그의 `생활 철학`이라고 부른다. 이것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사람은 모두 그가 살던 시대의 흐름 틀 속에서 일생을 마친다. 그 시대의 사람들 생각의 주류를 주의(主義) 또는 관(觀)이라고 한다. 각자는 성장해온 환경의 차이로 인해 자기를 중심으로 형성된 생각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러나 이것은 이기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상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기보다는 장애물로 작용할 가능성이 더 많다. 이때 독서는 우리가 이런 요소를 줄이고 세상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에 큰 도움을 준다.
세상은 보는 관점에 따라 크게 보이기도 하고 작게 보이기도 한다. 아버지가 크게 느껴지다가도 어떤 때는 외소하게 보인다. 세상이 어떤지 모르지만 단지 보는 사람의 마음 크기가 늘었다가 줄었다가 하는 사실이 더 진실이다. 특히 요즘처럼 세상살이가 더 힘들어졌다고 하는 푸념 섞인 마당에 오늘은 살만하다 싶더니 내일은 뭔가 결정을 해야겠다고 또 마음이 바빠진다. 이처럼 마음이란 것은 학교 운동장처럼 소란스럽다가 고요해지는 것을 거듭 반복하는 놀이터와 같은 것이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속담이 있다. 세상에 똑똑하다는 사람들을 모아 우두머리에 앉혀두었더니 하나같이 먹물과 오물을 품어낸다. 대통령, 국회의원, 기업가, 종교 지도자들 등 말은 청산유수에다 눈인사는 사람을 녹이고, 모델처럼 잘 차려 입
누구든지 자신에게 긍지를 가진다면 그는 스스로를 소중히 여긴다. 그는 자존심과 신뢰가 자아 속에서 넉넉하게 녹아있기 때문에 함부로 말하거나 행동을 하지 않고 평상심을 가질 수 있다. 그들은 모두 고통과 시련에서도 자기 자신을 귀하게 여긴다. 이렇게 긍지를 가지고 덕이 되는 일을 해온 사람들을 우리는 인격자라고 한다. 인격자란 사회에서 자기 몫을 해 내는 사람들이다. 또 인격자는 세상을 하직할 때 그가 남을 위해 베풀었던 시간이 많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 그는 살면서 좋은 습관을 가지고 덕을 쌓으려고 노력한다. 인격자가 되려면 먼저 사람을 존귀하게 생각하고 만사에 감사함을 표할 줄 알아야 한다. 또 생활 중에는 좋은 사람과 교류를 가지며 정해 둔 인생목표를 그는 인내심을 가지고 추진한다. 실패하
한 마을에 원님이 부임했다. 고을에서는 연회를 준비했고 그 연회의 밤을 지낸 다음날 아침 일어나니 하인이 세숫물을 담은 대야를 대령했다. 그런데 그 대야 옆에 흰 가루가 담긴 조그마한 접시가 놓여 있었다. 그것을 처음 본 원님이 “이것이 무엇일까?” 생각하다가 입에 탁 털어 넣고 물을 마시고는 삼켜버렸다. 그리고 나서 세수를 했다. 이것을 먼발치에서 지켜보던 하인이 어쩔 줄 몰라 하면서 웃었다. “네 이놈, 무엄한지고! 감히 누구 앞에서 그렇게 함부로 웃느냐? 네놈이 웃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호통을 쳤다. 하인이 황급히 땅에 엎드려 “아니옵니다”라고 이유를 말하려 하지 않자 원님은 더욱 그것이 알고 싶어 호통을 쳤다. 마침내 하인이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원님이 입에 넣은 가루는 소인이 특별히 콩과 팥을
지난달 25일 피델 라모스 전 필리핀 대통령이 대구·경북 지역의 필리핀 이주 노동자들과 결혼 이주 여성들과의 간담회를 위해서 대구가톨릭근로자회관을 방문하였다. 필자 역시도 포항·경주 지역의 필리핀 공동체 담당 신부로서 환영인사를 하고 간담회에 참석하였다. 피델 라모스 전 대통령은 육군 참모총장과 국방부 장관을 역임하고 1992년부터 1998년까지 제12대 필리핀 대통령을 지냈다. 피델 라모스 대통령과 한국과의 인연은 60년 전 한국 전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 전쟁 당시 피델 라모스 대통령은 장교로서 참전하여 혁혁한 전과를 올려 당시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표창을 받았다. 간담회 중 피델 라모스 전 대통령은 한국 전쟁 당시의 한국은 아시아에서 가장 황폐하고 가난한 나라였지만 근면한 국민성을 바
대화를 할 때 분위기에 맞지 않게 뜬금없는 말로 웃기려 하는 사람을 우리는 `싱거운 사람` 또는 `맛없는 사람`이라고 부른다. 이런 같잖은 이야기를 들을 때는 피식 쓴맛이 나는 억지웃음을 지을 뿐이다. 그러나 의미가 있어서 맛있는 말이라면 깊은 대화를 할 수도 있다. 음식에서 맛은 파, 고추, 들깨 같은 것을 사용하지만 그 근본은 소금이다. 특히 매운탕이나 설렁탕은 소금을 많이 넣거나 적게 넣으면 맛이 사라져 버린다. 맛에는 염분 조절이 중요하다. 성경에는 `소금이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라는 구절이 있다. 이때의 `짜다`라는 것은 `맛을 낸다`는 뜻이다. 또 기독교인을 `세상의 소금`이라고 했다. 이 말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장소는 맛이 없는 곳이란 뜻을 강조하면서 맛을 내는
부부의 삶은 둘이서 석양을 바라보며 함께 걸어가는 동행하는 과정이다. 이때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샘솟는 순수한 사랑을 바탕으로 한다. 동행자는 자기의 마음을 오직 한 사람에게 바쳐서 상대방의 심중을 움직일 수 있는 자들이다. 동행을 행복하게 하려면 상대의 마음을 잘 읽어야 한다. 동행은 둘이서 한다. 그래서 자기의 몫만을 주장한다면 대화가 되지 않아 반려하는 동행은 될 수 없다. 동행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아서 상대를 받아들일 공간을 만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행복한 동행을 하기 위해서는 자기가 주장하던 내용을 그만두어야 할 때가 있다. 포기해야 할 것을 포기하지 않으면 갈등의 원인이 된다. 동행을 잘 하려면 배우자를 내 시각으로 이해하려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받아주어라. 조금은 미흡해도
무더운 여름이다. 올 여름은 더위가 더욱 기승을 부리니 바깥나들이를 하기 싫을 정도다. 집이나 직장이나 에어컨을 켜 놓은 상태에서 하루를 보내야 한다. 참 시원하고 여름에도 이런 환경에서 일을 본다는 것이 좋은 시절이다. 그런데 문제는 아이들이 늘 감기기운이 있다. 에어컨이나 선풍기 탓이다. 아이들은 더위에 쉽게 지친다. 그래서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각별한 여름나기를 연구하는데 그 중에 하나가 에어컨에 집착하는 것이다. 문을 꽁꽁 닫아 놓고 에어컨을 켜고 선풍기 바람에 의존하다보니 아이고 어른이고 호흡기 건강에 지장이 많다. 이럴 땐 우리가 어릴 적에는 여름을 어떻게 보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어릴 적 여름이면 방문을 활짝 열어 놓고 매미소리 들어가며 할머니 무릎을 베고 할머니가 흔들어 주는 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