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는 방어축제로 술렁이는 모슬포 항을 떠나 섬 속의 또 다른 섬을 향해 달린다. 겨우 20분이면 닿는 거리지만 뱃길은 결코 만만치 않아 보인다. 몇 명 되지 않은 승객을 실은 배는 생각보다 컸다. 하지만 높은 파도의 힘에 크게 울렁이며 가파도로 향한다. 어제까지 내린 비로 가파도에 갇혔던 사람들이 흐린 하늘을 이고 몰려 있다. 내리는 사람보다 떠나는 사람이 많은 선착장에서 우리를 맞는 것은 바람뿐이다. 봄이면 청보리 축제로 몸살을 앓는 곳, 인적이 드문 가을날 찾은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한 무리는 우측 해안을 따라서 걷고 우리는 좌측 해안도로를 걷는다. 우리 나라에서 가장 키가 작은 섬, 해발 20.5m의 나지막한 가파도는 그 흔한 언덕하나 없이 평평하다. 송악산에서 바라본 가파도는 밋
종려수들이 비바람을 맞으며 제주의 아침을 연다. 한라산 등반은 무산되고 홀로 우중의 관음사를 찾기로 마음먹었다. 애초부터 관음사가 목적이었기에 속으로는 쾌재를 불렀는지 모른다. 한라산의 가슴팍을 향해 난 산간도로도, 관음사의 주차장도 텅 비어 있다. 빗물들이 모여 작은 개울을 방불케 하며 힘차게 흐른다. 거친 빗속에서도 미소를 잃지 않는 석조대불이나 폭우를 뚫고 달려와 머리를 조아리는 불자의 모습에서 삶의 진지함을 읽는다. 침묵을 공유하며 돌아서는 불자의 얼굴에는 안온함이 어려 있다. 그 한 줌의 희망이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리라. 거짓말처럼 비가 온순해졌다. 일주문을 통과하자 잘 뻗은 삼나무와 돌담 아래 수인이나 표정, 입고 있는 가사의 모양이 저마다 다른 현무암 석불들이 일렬로 반긴
해인사 진입로는 가을 단풍이 숨넘어갈 듯 절정이다. 금빛 햇살 아래 나뭇잎은 속살을 투명하게 드러낸 채 수줍고도 요염하다. 차는 단풍 터널을 미끄러지듯 달린다. 계절에 충실한 자연으로의 초대는 우리를 겸허하게 만든다. 오늘은 가을 귀빈이 따로 없다. 해인사에는 암자가 많아서 백련암이 어디쯤 숨어 있는지 알 길이 없다. 사람들을 따라 걷다가 정갈하게 누워있는 아스팔트길로 접어든다. 포장된 길은 내 인생의 탄탄대로처럼 여겨졌으며, 길은 호젓한 숲으로 이어져 있다. 이 계절에 가슴 벅차지 않은 것이 어디 있을까. 30년 지기와 모처럼 시간을 낸 것을 아는지 가야산 단풍들이 떼 지어 반긴다. 뜻밖에도 백련암 가는 길은 오래도록 한적하다. 꽃이 진 자리마다 신록이 들어서는가 싶더니 이내 숲은 이별을 서두
아침부터 가을비가 내린다. 문득 운부암 은행나무가 비의 무게를 감당치 못해 서둘러 낙화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에 마음이 바빠진다. 손톱이 빠지는 듯한 아픔을 감내하며 가을을 보낼 나무 한 그루를 떠올리며 빗길을 재촉한다. 언젠가 벽안의 노랑머리 처녀가 보화루에 앉아 계절에 빠져들던 모습은 잊을 수가 없다. 동양적인 분위기에 매료된 서양 처녀의 고독은 엄숙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은행나무는 유난히 색이 고왔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도 샛노랗게 물이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암자와 은행나무, 젊음의 혼연일치가 빚어내는 환상적인 가을날이었다. 은행나무의 이별가만큼 가슴을 서늘하게 하는 것은 암자를 지키는 노구(拘) 누렁이의 존재다. 손님이 오면 덩치 큰 몸을 이끌고 나와 인사를 건네는 누렁이의 눈빛은 고
그윽한 국화향을 생각하며 중양절 아침을 맞는다. 국화잎을 따서 술을 담그고, 화전을 부쳐 먹으며 국화 감상을 해야 하는 멋진 날, 하늘은 뿌옇게 미세 먼지로 덮여 있다. 가난하면 막걸리에 국화를 띄워 마실 정도로 조상들은 삶에 멋과 여유를 곁들였다. 시야는 한껏 흐리지만 우리는 가을을 노래하며 남쪽으로 달린다. 홍룡사는 신라 문무왕 13년(673년) 원효 대사가 낙수사(水寺)라는 이름으로 창건하였다. 원효 대사가 당나라 승려 천 명에게 화엄경을 설법하여 모두 득도하였기에 원적산이라는 이름이 천성산(千聖山)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터만 남았다가 1910년대 통도사의 승려 법화가 중창하고 1970년대 말에 주지 우광이 중건 및 중수하였다. 양산의 팔경으로 알려진 홍룡폭포 때문인지
앞산이라는 이름에는 친구처럼 편한 정겨움이 숨어 있다. 은적사가 있는 앞산은 비슬산, 대덕산, 최정산이라는 명칭이 있지만 사람들은 앞산이라 부르기를 좋아한다. 옛날에는 남쪽을 `앞`이라 했기에 `남쪽에 있는 산`이란 뜻에서 앞산이라 부르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안타깝게도 큰골로 향하는 구길은 순환도로가 나면서 점차 잊혀져 가고 있다. 봄기운에 취해 나풀거리는 벚꽃들의 향연이 슬프도록 그리운 날이나, 새로 난 도로가 통행량으로 몸살을 앓을 때, 나는 이 길을 떠올릴 뿐이다. 옛 친구를 만난 듯 가슴이 따뜻해져 오지만 자주 찾지 못하는 것은 마음에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언젠가 앞산 자락길을 걷다 우연히 은적사를 만났다. 먼발치에서 대웅전을 올려다보고 자목련을 배경으로 사진 한 장을 찍고 돌아왔을 뿐
중양절을 앞두고 국화 축제가 한창인 동화사를 찾아 나선다. 도로는 연휴 첫날의 신고식을 호되게 치르는 중이다. 속수무책 끼어드는 차량들 틈에 갇혀 나는 느긋하게 브람스의 첼로 소나타를 듣는다. 중저음 첼로 음색이 우울한 마음을 다독인다. 아침 하늘도 나만큼이나 심기가 흐려 보인다. 단풍이 든 도로를 휘이휘이 돌고 걸어서 큰 금강문을 통과한다. 승시축제로 모여든 인파들로 수미산 불국정토는 간 곳이 없다.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국화를 좋아하는 마음만 챙겼던 것 같다. 옛날 스님들이 물물 교환하던 이색적인 장터도 인파에 떠밀려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동화사는 493년(소지왕 15년) 극달 화상(極達和尙)이 창건하여 유가사(瑜伽寺)라 하다가 832년(신라 흥덕왕 7년)에 심지 왕사(心地王師)가 중창하였다
일상이 버거웠던 젊은 날, 법정 스님은 나직한 소리로 무소유의 가치를 일러주셨다. 스님의 말씀은 바람에 댓잎이 서걱대거나, 물결에 쓸려 내려가는 조약돌 구르는 소리가 났다. 지치고 힘들 때면 단비처럼 마음을 적셔 주던 분, 나는 몇 번이나 벼르고 별러 불일암을 찾았다. 불일암은 송광사의 사내 암자로 고려시대 자정국사가 창건하여 자정암으로 불리었다. 몇 차례 중수를 거듭했지만 6.25 전쟁으로 퇴락하여, 1975년 법정스님이 중건하면서 불일암으로 불리며 스님의 명성만큼 유명세를 타게 된다. 스님의 무소유 정신은 종교를 초월하여 각박한 시대와 황량한 가슴에 윤기를 더해 주었다. 키 낮은 대나무 사립문이 한쪽 문만 열고 기다린다. 자기를 낮추고 들어오라는 뜻일까 컴컴한 조릿대 숲 터널이 이어진다.
산길은 가파르고 인적이 없다. 가을의 숨결이 은은히 숲 속을 떠돌 뿐, 햇살은 나무 위 높은 곳에서 어른거리고 새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등줄기가 촉촉해져 올 무렵 도토리 떨어지는 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린다. 모처럼 동생과 둘이서 갑장사를 오른다. 해발 806m의 그리 높지 않은 갑장산은 연악이라 불리기도 한다. 뾰족하면서도 모가 나지 않아 상주사람의 순후한 인심을 대변하는 산이다. 게다가 내 유년의 기억을 오롯이 품고 말없이 받아주는, 거부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는 핏줄과도 같다. 상사바위와 백길바위, 사선암이 풀어내는 다양한 전설과 멋진 풍광을 자랑하는 갑장산의 9부 능선에 갑장사(甲長寺)가 자리 잡고 있다. 절은 상주 4장사(북장사, 남장사, 승장사) 중 으뜸가는 사찰로 고려 공민왕 22년(
이정표를 따라서 부소암을 찾아간다. 웅장한 암석들이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내고, 길은 능선을 따라 친절하게 흐른다. 작은 헬기장을 만나고 쭉 뻗은 나무 계단을 지나는 동안 마주치는 사람은 없다. 가을 오는 소리로 가득한 숲 속에 오솔길만 홀로 외롭다. 갑자기 하늘이 뚫리고 우뚝 솟은 부소암(扶蘇岩)이 툭 트인 남해를 배경으로 반긴다. 사람의 뇌를 닮은 듯한 거대한 바위는 협곡 건너편에서 하늘과 교신을 하듯 신령스럽다. 중국 진시황의 장자 부소가 유배되어 살았다는 전설과 단군의 셋째 아들 부소가 방황하다 이곳에서 천일기도를 했다는 설이 무색하지 않을 만큼 경이롭다. 신비한 부소암(扶蘇岩)의 품에 안겨 어딘가 부소암(扶蘇庵)이 자리 잡고 있을 거라 생각하니 마음이 급해진다. 바람과 운무가 길을 잃고
유영하듯 이어져 있는 길을 달리다 보면 이내 사색이 거추장스러워진다. 몇 채 되지 않는 집들이 이마를 맞대고 살아가는 산골마을에는 정갈하게 다듬어놓은 밭이랑 사이로 부는 바람처럼 욕심 없고 순박한 사람들이 시간을 잊고 살아갈 것만 같다. 찔레꽃이 하얗게 피는 봄이면 마을은 햇살에 반사되어 그야말로 눈이 부시도록 투명하다. 압곡사는 은해사의 말사로 신라 문무왕 17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했다. 아미산 봉우리에서 나무로 오리를 만들어 던졌더니 이곳에 떨어져, 절 이름을 압곡사(鴨谷寺)라 지었다. 배 모양을 한 선암산의 조타석 자리에 법당을 앉혀 군위에서 가장 오래된 절로 기록되어 있다. 물을 상징하는 수태사가 산 너머에 있어 풍수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명당인 셈이다. 방금 지나온 사하촌이 옹기종기 발아
화엄사, 쌍계사와 함께 지리산 3대 사찰로 알려진 천은사는 신라 덕흥왕 3년(828년) 인도의 승려 덕운조사에 의해 감로사라는 이름으로 창건되었다. 고려 충렬왕 때는 남방 제일 선찰로 승격되기도 했지만 화재로 소실되고 1679년(숙종 5년) 단유선사에 의해서 중건되었다. 중건 당시 샘가에 구렁이가 자주 나타나 한 승려가 잡아 죽였더니 그 후 샘이 말라버렸다. 그래서 샘이 숨었다하여 천은사라 이름을 바꾸었다. 이름을 바꾼 뒤 원인 모를 화재가 끊이지 않았다. 이 소식을 들은 조선 4대 명필의 하나인 원교 이광사가 수체(水體)로 `智山 泉隱寺`라는 글씨를 써서 수기를 불어 넣고 일주문 현판을 달았더니 다시는 화재가 나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도 새벽녘 고요한 시간에 일주문에 귀 기울이면 현판 글씨에서 물소
녹음 짙은 가로수 터널을 달린다. 한때는 화사한 벚꽃잎이 구름처럼 피어오르다 분분히 떨어졌을 시린 날의 기억을 안고 길은 묵묵히 산을 향해 달린다. 이내 가파른 산길이 나타난다. 아름드리나무들이 가리고 있는 성성한 하늘빛, 천 년 고찰이 만든 숲 터널은 오르막에서도 지치지 않는다. 자동차로 굽이굽이 계곡이 없는 산길을 오른다. 도리사는 신라불교 초전법륜지로 잘 알려진 불교의 성지이다. 19대 눌지왕 때(417년) 고구려의 승려 묵호자로 알려진 아도화상이 포교를 위해 처음 세운 신라불교의 발상지이다. 아도화상이 수행처를 찾기 위해 다니던 중 한겨울 복숭아꽃과 오얏꽃이 활짝 핀 것을 보고 좋은 터임을 알고 모례장자의 시주로 절을 짓고 이름을 도리사로 지었다. 아도화상이 모셔온 세존 진신사리가 사리탑
인가를 벗어나 한참을 달려서야 고운사 입구에 닿았다. 잔디밭이 넓은 현대식 전원주택 몇 채가 눈길을 끌 뿐 천년 고찰에 어울릴 법한 사하촌이나 식당도 없다. 산문 앞에서 할머니 한 분이 한낮의 적막과 싸우며 여름 과일을 팔고 있다. 노송들과 잡목이 어울려 만든 천년의 숲, 그 사이로 매끈한 흙길이 누워 있다. 여름이 짠 푸른 그늘과 고요만이 머무르는 길은 마치 꿈 속에서 본 듯하다. 일주문까지 걷기로 했다. 과거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착각이 인다. 아주 느리게 끝도 시작도 없는 곳으로 거슬러 오르는 것도 같다. 이 길은 변화에 흔들리지 않는 고운사의 순결한 자존심이다. 고운사는 신라 신문왕 원년(서기 681년)에 화엄종의 시조인 의상대사가 창건한 절이다. 원래 고운사(高雲寺)였는데, 최치
아침부터 폭염의 방해가 만만치 않다. 영호남의 분수령인 지리산, 그 영산의 기운 앞에서 무엇이 두려우랴. 오랜 벗이 있어 더욱 든든한 여행길이다. 짙은 녹음과 노고단에서 흘러내리는 계곡물 소리에 싸여 시원한 일주문이 우리를 반긴다. 의창군이 썼다는 `지리산 화엄사`라는 필체에서 천년 고찰의 웅혼함이 느껴진다. 화엄사는 544년(백제 성왕 22년)에 연기조사가 창건한 사찰로 절의 이름을 화엄경(華嚴經)에서 따서 화엄사라 하였다. 부처님의 세계이며 깨달음의 성지라는 뜻이다. 그 후 의상대사가 화엄종의 원찰로 삼아 머물고, 신라 경덕왕 때는 8가람, 81암자의 대사찰이 되어 남방 제일 화엄대종찰이란 명성을 얻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30년(선조 30년) 벽암선사가 복원시켰다. 짧은 시간에
하늘은 곧 비를 뿌릴 듯 잔뜩 찌푸리고 있다. 표충사 주차장은 한산하다. 뜻밖의 호젓함을 즐기며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어느 새 홍제교 너머에서 일주문이 반겨준다. 흐트러진 마음을 하나로 모아 진리의 세계로 향하라는 일주문은 편액도 없이 빈 몸으로 서 있다. 애써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는 일주문이 좋다. 시원스럽게 뻗은 길과 신록이 토해내는 풍요로움 속에서 벗과 함께 걸을 수 있으니 무엇을 더 바라랴. 우리는 천천히 세속적인 잡담을 내려놓고, 유교와 불교 문화가 같은 공간에 자리하고 있는 호국불교의 본산지를 향해 걸어 들어간다. 사기에 의하면 신라 무열왕 원년(654년) 원효대사가 삼국 통일을 기원하고자 산문을 열고 죽림정사라 하였다. 이후 흥덕왕 4년(829년) 인도의 고승 황면선사가 석가
사불산 중턱에서 길은 갈라진다. 윤필암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오솔길을 걷는다. 깊은 산 중에 숨어서 자라는 전나무들이 있어, 가파른 시멘트 길은 구도자의 길처럼 숙연하면서도 평화롭다. 나는 습관처럼 하늘을 올려다본다. 나뭇잎 사이로 드러나는 햇살 사이로 누군가의 마음이 스쳐 지나가기도 하고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따사로움도 기억된다. 다람쥐가 숨바꼭질을 하고 풀벌레 소리가 지지 않고 존재감을 알려오는 곳, 숲은 푸른 허파처럼 싱그럽고 울창하다. 등줄기에 땀이 흐르지만 하염없이 걸을 수 있을 것만 같다. 머지않아 숲을 장악할 매미의 울음에도 제법 힘이 실려 우렁차고, 내 안에도 어느 새 초록 물결이 일렁인다. 묘적암은 신라 646년(선덕여왕 15)에 부설거사가 창건하였으며 고려말에 나옹 선사가 출가
태풍 `찬홈`의 영향으로 파도가 심상치 않더니 결국 마라도 가는 뱃길이 막히고 말았다. 성당과 교회, 절이 사이좋게 모여 있는 최남단의 섬, 오랫동안 꿈꾸었던 마라도 기행은 무산되고 말았다. 궁여지책으로 택한 약천사는 고색창연함 대신 키 큰 야자수들과 넓은 잔디밭, 29m의 통층으로 지어진 대적광전이 동양 최대의 사찰임을 자랑한다. 알 수 없는 끌림으로 일정에도 없던 하루를 이곳에서 머물기로 했다. 영천 은해사 말사란 점과 잠시 인사를 나눈 도관 스님의 대구 사투리 때문인지도 모른다. 서귀포 앞바다와 넓은 정원이 한 눈에 들어오는 방에 짐을 풀고 절을 둘러본다. 구례 화엄사의 각황전과 금산사의 미륵전의 구조를 응용하여 설계된 대적광전 안에는 4.5m의 커다란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아미타불과 약사여래불
비 오는 날의 산책은 일기를 쓰는 것과 같다. 함부로 들뜨지 않고 차분히 일상을 돌아보며 나를 점검할 수 있는 프리즘과 같다. 나만큼이나 비를 좋아하는 친구와 함께 불국사로 향한다. 처연하게 비를 맞는 천년의 고도 속에 갇혀 신라인의 숨결을 제대로 느끼고 싶었다. 시를 쓰는 친구는 요즘 천년의 미소와 하회탈의 매력에 빠져 있다. 비오는 날의 첫사랑처럼 그녀의 이야기는 설렘과 감동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경주에 도착하자 이미 빗줄기는 그쳐 있었다. 마음을 내려놓고 천천히 시간을 거슬러 오르는 동안 모래알들이 발밑에서 바스락대고, 아름드리나무 그늘에는 청이끼가 세월의 깊이를 자랑한다. 비 온 날의 색 다른 풍경들도 좋다. 역사를 알 무렵부터 만나온 불국사는 단순한 사찰이 아니라 한국인의 긍지이며 자
아름드리 소나무 숲길을 기대했지만 인적 없는 주차장에는 오후의 땡볕만 이글거린다. 바람 한 점 없는 길에는 열기가 가득하지만 햇살과 신록, 맑은 하늘빛이 아름답다. 사천왕상이 모셔져 있는 회전문과 커다란 법고가 있는 해운루를 통과하면 고요한 적멸의 공간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첫인상이 유난히 정갈한 사찰이다. 용문사는 870년(신라 경문왕 10년) 두운 선사에 의해 창건된 천년고찰이다. 고려 태조 왕건이 신라를 정벌하러 내려가다 이 사찰을 찾았으나 운무가 자욱하여 지척을 분간치 못할 때, 청룡 두 마리가 나타나 길을 인도하여 용문사라 불렀다. 한 때 영남 제일강원으로 불릴 만큼 큰 사찰이었으나 화재로 인해 사세가 크게 줄었다고 한다. 해운루를 누하진입식으로 통과하면 높다란 계단 위에서 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