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안뜰은 이슬 축제로 수런거린다. 거미는 정교한 설계로 기하학적인 문양을 잣는다. 아이비 푸른 넝쿨 위로 보석들이 쏟아진다. 크리스털 목걸이 여러 겹을 둘렀다. 렌즈를 통해 들어온 보석이 영롱하다. ‘작은 세계 속의 큰 세계’, 새롭게 펼쳐진 우주가 경이롭다. 미시적 세계를 카메라에 담아 보면 우리가 인지하는 못하는 세계를 볼 수 있다. 햇빛 반짝하면 스러지고 말 ‘찰나의 꽃’이라 애틋하다. 매슬로우는 일상에서 행복, 환희, 황홀, 기쁨을 느끼는 순간을 ‘절정체험’이라 했다. 강렬한 애정, 예술과의 만남, 보석 같은 글과
맥문동이 한창인 황성공원을 거닐었다. 지인이 특별히 이 계절에 보라색 향연이 펼쳐진 곳으로 나를 초대한 것이다. 든든한 소나무 사이사이 맥문동은 그야말로 환상이었다. 더위도 잊을 만큼 즐거웠기에 한정식 한상을 대접하기로 했다. 보리굴비가 진수성찬 제일 가운데 놓였다. 이 계절에 가장 좋은 반찬이다.날씨도 무덥고, 습한 날씨가 계속되니 입맛도 없다. 가족들 밥해 먹이는 게 어느 때 보다도 힘이 드는 계절이다. 어릴 때 어머니가 해 주시던 보리굴비에 콤콤한 비린내가 그리워지는 계절, 보리굴비를 손질해서 맛나게 먹여야 겠다.냉장고가 없던
대구에서 나고 자란 내가 결혼을 하며 남편 직장을 따라 포항에 온 것은 26살 초겨울이었다. 집, 직장이 전부였던 내가 타 지역에서 결혼생활을 시작한다는 건 두렵고 설레는 모험이었다. 게다가 신혼집에서 몇 분만 걸어가면 대구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넓은 바다가 그림처럼 펼쳐져 있어서 너무나 신기하고 신나는 일이었다. 그러나 동화처럼 설레는 신혼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지금 생각해보면 그즈음 나는 향수병을 앓았던 것 같다. 호미곶에 큰시누가 살고 있었으나 나이 많은 손위시누가 갓 결혼한 새댁에게 마냥 기댈 수 있는 의지처가 될 순 없
황소처럼 일만 하시다 ‘막걸리 한잔’ 요즘 핫한 노래 가사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온다. 흥겹게 따라 불렀던 노래가 오늘 따라 가슴을 아리게 한다. 내일이 아부지 기일이라 고향인 안동으로 언니와 함께 가는 중이었다.우리 아부지는 자린고비셨다. 절약이 몸에 베이신 분이다. 그런데 나에게만 유독 후하셨다. 오일마다 돌아오는 장날에는 빠지지 않고 나가셨는데 그날만이 열심히 일하시는 아버지의 휴일이다. 장에 가시면 해가 앞산 너머로 고개를 떨구고 나서야 집으로 돌아오셨다. 약주를 하시고 볼이 불그스레, 손에는 봉지 하나를 들고 오셨다.나는 아부
문명의 발달은 강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강과 도시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은 문명 발달에 강이 미치는 영향력이 크다는 것을 방증한다. 이러한 오늘날의 강과 도시, 그리고 문명의 관계를 탐구하는 것은 현재를 직시하고 미래를 예측하여 동시대 인류에게 유의미한 메시지를 제시하고자 함이다. 강과 도시 풍경은 오래전부터 나의 곁에서 나와 대면하며 그렇게 탐구되어 오고 있다. 문명의 발달은 예술 분야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예술사조의 흐름을 보면 그 시대의 시대상이 반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사진예술은 문명의 발달로 인한 영향을 많
2020년 8월 21일. 내 이름은 ‘초롱이’다. 나이는 네 살, 우리 엄마의 이름은 샛별이고 아버지는 가까이에는 사신다는 데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누구인지는 잘 모른다. 초롱이란 이름은 주인님에게 오기 전 외할머니께서 지어주신 이름이다. 나는 초롱이란 이름이 맘에 들지 않는다. 비록 덩치가 작은 발바리지만 싸나이 이름이 초롱이가 무엇인가 말이다. 깡다구 있어 보이게 백호나 청룡이라면 맘에 들겠지만 하다못해 바둑이나 독구는 되어야 하는데 여자이름인 초롱이는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다.그래도 초롱이란 이름이 싫지 않을 때가 있기는 하
부친께서는 6·25전쟁이 발발하여 북한군이 낙동강 아래로 내려올 당시 보급품을 운반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경북도 영덕군 창수를 거쳐 영해로 내려올 당시 적군 비행기가 보급품인 것을 알고 공중 사격을 가하였습니다. 그때 부친께서는 어깨에 짊어진 보급품을 벗어 던지고 숨은 곳이 복숭아 나무 밑이었습니다. 복숭아 나무를 잡으니 나무가 물렁물렁 했다고 합니다. 상황이 얼마나 긴박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또한 복숭아 나무가 그 시절에도 있었던 곳임을 알 수 있습니다. 도연명(陶淵明)의 유명한 산문 ‘도화원기(桃花源記)’에서 나오는 무
궁금하고 설렌다. 딸이 만나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결혼을 해서 사랑하고 자식을 낳고 키워 시집을 보낸다고 생각하니 만감이 교차한다. 시집갈 때는 되었지만 스스로 나서는 것을 보니 이제 다 키웠구나 싶다.나는 퇴근하고 곧바로 식당으로 갔다. 아무도 없는 것 같아서 예약된 이름을 부르면서 주인을 찾았다. 그 소리에 어떤 총각이 방문으로 나와서 목례를 했다. 어이쿠, 목소리가 컸다 싶어 부끄러워 일단 식당 문 밖으로 나왔다. 때마침 딸이랑 남편이 들어왔다. 남편 소매 자락을 잡고 뒤따라갔다.그가 허리 굽혀 인사를 했
“지금 몇 신줄 알아, 시계는 보고 게임 하는 거야.”하면 두 아들들은 건성으로 “알았어요, 지금 끌 거예요”한다. 그러고도 도무지 끌 기미가 보이지 않아 참다못한 갱년기 엄마는 “지금 당장 꺼”하고 욱 하고 고함을 지르면 “알았어요, 알았다구요, 끄면 되잖아요.”하는 신경질적인 대답과 함께 최대한 천천히 폰을 끈다. 꾀 많은 둘째는 “엄마, 지금 제가 게임하는 걸로 보이세요. 유튜브 보고 있어요, 유튜브에 얼마나 배울게 많은지 아세요.”하고 뻔뻔스럽게 대답을 한다. 지금까지 엄마 말이라면 고분고분하던 아들들이 초등 6학년. 초등
어둠이 가장 깊은 시간에 바다를 본 적이 있다. 내 몸속에서 바다와 우주가 출렁이는 듯했다.동빈내항을 지나 죽도시장에 도착하니 여명을 기다리는 시간인데 벌써부터 활기가 넘친다.포항(浦項)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항구에 접한 죽도시장의 수산물 유통은 동해안 최대 규모이며 죽도어시장이라 부른다.바다에서 온 생선이 밥상에 오기까지는 제법 여러 단계의 유통과정을 거친다. 일반적으로 생산조건과 자연환경에 따라 그 구조가 조금씩 다르다.죽도어시장은 바다와 인접한 환경적 조건으로 인해 산지위판의 특징과 소비지 도매시장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아직은 해가 빠지기 전이다. 한낮의 뜨거운 열기가 식고 저녁이 되었다. 해가 빠지려면 아직도 두어 시간 더 있어야 한다. 나는 집 뒤 켠, 집과 붙은 집 뒤쪽의 테라스의 의자에 혼자 앉아 하늘을 쳐다본다. 흰 구름 몇 점이 한가로이 떠간다. 가끔씩 어디에서 오는 바람인가 시원한 바람이 살랑거린다. 살만하다.바로 옆집들의 정원의 나무들이 유월의 녹음을 한껏 자랑하고 있다. 싱싱하고 푸르다. 푸르다 못하여 진녹색이다. 짙푸른 저 나무들은 해마다 저렇게 잘 자란다. 무슨 조화일까? 나뭇잎들은 올해의 몫은 다 컸다. 이제 더 이상 크지 않
여고동창들과 템플스테이를 체험했다. 지난 해 대상포진으로 고생한 친구의 제안으로 떠난 여행이다. 오래된 친구들은 어제 만난 사람들처럼 서로의 일상과 생각을 공유하였다. 휴식형과 체험형이 있는데, 코로나19로 인해 휴식형만 운영하고 있었고, 가격은 성인기준으로 인당 5만원이었다. 삼시세끼가 포함되어 있어서 우리들은 담백한 절밥을 기대했다. 살가운 친구는 소풍가기 전 날인 듯, 간식꾸러미를 야무지게 챙겨왔다. 그 친구 정성을 까먹으며 도착한 기림사는 웅장하면서 기품이 있었고, 단아하면서도 아기자기했다. 보시로 들어오는 꽃과 화분을 심기
습도가 높아지고 있다. 한여름을 무색하게 할 만큼 연일 30도를 오르내린다. 진돗개의 공격을 피해 라일락 그늘이 드리운 담장 위에서 먹고 자던 고양이가 며칠째 보이지 않는다. 아침에 일어나 신문을 가지러 가려고 현관문을 열면 늘 먼저 야옹 하고 내게 인사를 건넸다. 발레리나처럼 몸을 늘려 스트레칭 하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아른거린다.고양이는 7년 전 어미젖을 덜 뗀듯 눈매가 희미하고 털이 보송송한 모습으로 우리 집과 인연을 맺었다. 사람들 왕래가 뜸한 아파트 뒤쪽에서 비틀거리며 걷는 폼이 위태롭게 보였다.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와 가
목요일이다. 아침부터 설레는 마음으로 외출을 서두른다. 평소보다 거울 앞에 서 있는 시간이 길어지고 옷매무새를 매만지는 손끝에서도 즐거움이 묻어난다. 한 주간 같이 수업을 듣는 책친구 선생님들은 뭘 하며 지냈을까? 오전 10시까지 작은도서관 책친구 수업에 늦지 않기 위해서 아침부터 부산을 떤다. 집 가까이 있는 도서관이 아닌 탓도 있지만 빨리 선생님들을 뵙고 싶어서다.여름에 들어서면서 지리 한 장마가 계속되지만 차창 밖의 나무들은 제 색깔을 만들어 놓았고 곳곳에 여름 꽃들도 그 자리를 지키고 앉았다. 차창을 두드리는 빗방울 소리도
달은 얼마만큼의 거리에서 우리를 비추이는 걸까요? 바다가 보이는 휴게소 벤치에 앉았습니다. 빠듯한 일 박 이일의 번개 팅의 일정을 마치는 즈음이었습니다. 마지막 휴게소에서 몸속의 뜨거워진 것들을 비우고 숨 가빴던 하루를 식히던 참이었습니다. 우연히 달과 눈이 마주쳤습니다. 피곤한 줄 모르고 헤매며 다니던 우리들을 향해 그 달이 계속 따라오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달도 바다를 향해 섰고 희미하게 숨어서 우리를 지켜보느라 지친 몸을 식히고 있는 것 같습니다.그날은 첫 출사 수업 날이라 빠질 수도 없는 날이었습니다. 친구들은 수목원까
아내는 몸무게를 재고 있다. 청소나 설거지를 하고서는 어김없이 체중계에 올라선다. 그 때마다 표정은 밝지 않다. 때론 고개를 갸우뚱 거리기도 한다.설을 지나자마자 코로나 바이러스가 순식간에 전 세계를 강타하며 지구촌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집 밖으로 나가거나 사람을 대면하는 자체가 두려웠다. 그 여파로 아내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고 칩거에 들어갔다.그 무렵 때마침 ‘미스터트롯’의 열풍이 불어 집에서 소일하며 지내기에 불편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어 나를 유혹하기도 했고 음악을 듣고 화초를 가꾸면서 나름 즐거
붉게 백일홍이 활짝 핀 형산강변을 걷다보면 마음까지도 상쾌해진다. 고운꽃빛을 담아본다. 어떤 느낌의 사진을 찍었을까? 필름으로 사진을 찍으면 완성될 이미지를 상상하는 즐거움이 있어서 좋다. 사진을 찍는 순간, 이미지를 바로 볼 수 있는 디지털카메라보다 기다림과 설렘의 순간들이 아날로그 사진작업에는 있다.암실에서 필름을 현상하고 인화하는 작업을 거치면서 사진이미지로 만나는 순간들. 설렘은 매순간 낯선 시간과 낯선 공간을 걷게 한다.몇 년 전부터 형산강 주변 풍경을 사진에 담아왔다. 강변에 생활체육공원이 생긴 후로는 운동을 하거나 산책
“와~~아 뱀이다.”“아~악~악 뱀, 뱀이다.뱀을 봤을 때 당신의 반응은 어디에 속합니까?첫 번째는 우리 아들 친구들이 집에서 키우는 도마뱀을 봤을 때의 반응이라면 그 다음은 누구인지 알 수 있겠죠?우리 집에는 너무 작아서 성별을 알 수 없는 레오와 에드라는 도마뱀이 있다.처음에 작은 아들이 도마뱀을 키우고 싶다고 했을 때 식구 모두가 반대했다. 더욱이 육십갑자를 코앞에 두고있는 아빠의 반대가 심했지만 자기가 갖고 싶은 것은 어떻게든 손에 넣고 마는 우리 아들의 집요하고 뱀같이 영리한 꾀임에 넘어가 선악과를 따 먹고 말았다.키우게만
요즘은 아침 일찍 걷기 운동을 한다. 반환지점에서 다시 집으로 올라오는 길에 여우를 만났다. 캐나다 토론토 시내에서는 흔한 일이다. 허리는 길고 빼빼하게 생겼다. 하기야 살찐 여우를 본 일은 없다. 언제인가 골프장에서 여우를 두세 번 본 것 외에는 보지 못했다. 그랬는데 오늘은 동네 안에서 여우를 만난 것이다. 동네 안에서 여우를 만나기는 처음이다. 의외였다. 마침 주위에 걷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여우와 나밖에 없었다. 내가 일부러 여우를 쫓는 척 하면서 뛰어서 가까이 갔다. 그러나 그 놈은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여유롭게 살살
포항시 남구 호미곶면 해맞이길에 작은 문학관이 있다. 영일만과 청보리를 소재로 많은 수필을 남긴 흑구 한세광 선생님을 기리기 위한 곳이다. 평소에 찾는 이가 없는 듯 문학관은 입을 굳게 다물고 있다.헛걸음인가 싶어 발길을 돌리는데 출입문에 붙은 종이 하나가 바람에 나풀거린다. 하얀 종이에 한 획 한 획 꾹꾹 눌러쓴 내용은 휴관을 알리며 우편물과 택배는 건너편‘현대슈퍼’에 갖다 달라는 내용이었다. 길 건너를 바라보았다. 지붕은 한 귀퉁이를 바다에 내어주었는지 떨어져 나갔고, 군데군데 칠이 벗겨졌다. 나직이 앉은 담은 어제도 오늘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