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 사람들은 “이스파한은 세상의 절반(Isfahan Nesf-e Jahan)”이라고 자랑스레 말한다. 이는 이 나라 사람들이 이 도시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는지를 그대로 드러낸 문장이다. 수도 테헤란을 이틀 여행한 후 200여 개에 가까운 모스크가 멋들어진 모습을 뽐내는 `이란 최고의 관광지` 이스파한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수백 년 전 만들어진 여러 개의 근사한 교량과 그 옛날 영화를 짐작케 하는 공중목욕탕까지 즐비한 곳. 유럽 각국의 시인들조차 그 번영의 역사와 휘황한 이슬람 문화유산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도시로. 험상궂은 외모와 달리 한없이 수줍고 순진한 친구 `모하메드` 술 대신 진한 홍차와 물담배로 밤 늦도록 국경없는 우정 나눠 이스파한에 도착한 바로 그날
인근 도시에서 대학을 다닌다는 알리라는 이름의 청년이 노트를 찢어 만들어준 `든든한 이란 가이드북(?)`만을 믿고 테헤란 버스터미널을 나섰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출근시간의 거리는 복잡했다. 누구에게 노트에 쓰인 문구를 보여줄까를 잠시 고민했다. 그리곤, 가장 착해 보이는 인상의 아저씨 앞을 가로막고 그걸 내밀었다. 페르시아어 적힌 쪽지 내밀자 1시간 넘게 숙소 함께 찾아줘 이교도에도 아낌없는 형제의 정 10명 중 7명 이름 `알리` `후세인` 넉넉한 품성, 여유로운 미소 넘쳐 위험한 나라라는 인식 바뀌어 찾는 숙소와 그 숙소가 위치한 거리 이름이 페르시아어로 적힌 찢어진 노트 한 장. 그가 고민한 시간은 불과 10초도 되지 않았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의 부탁에도
문자를 해독할 수 없는 사람들을 문맹(文盲)이라 한다. 세계에서 문맹이 가장 적은 국가들 중 하나에 속하는 한국. 그러나, 그건 한국 사람이 한국에 머물 때 이야기다. 낯선 문자를 읽지 못하고, 처음 가본 나라의 언어를 알아듣지 못한다면 그 순간부터 꼼짝없이 `문맹 아닌 문맹`으로 살아야하는 것이 여행자의 운명이다. 이란에 도착하면서부터 기자는 문맹이 되고 말았다. 터키와 국경을 접한 한적한 이란의 시골마을. 손짓부터 발짓, 거기에 의성어까지 총동원해 어렵사리 이란의 수도로 향하는 버스가 정차된 터미널을 찾았다. 매표소에서도 `밤늦게 출발해도 좋으니 오늘 중으로 테헤란 가는 버스를 타야합니다`란 요구를 몸짓으로 전달했다. 콧수염과 턱수염은 물론 풀린 셔츠 속으로 보이는 가슴에까지
차도르와 모스크의 나라 이란으로의 여행은 쉽게 허락되지 않았다. 1개월짜리 여행비자를 얻기 위해서 인접국 터키의 세 도시를 숨 가쁘게 오갔다. 지금 생각해보니 왜 그처럼 이란 여행을 열망했는지 스스로도 잘 모르겠다. 지금으로부터 15년 전. `9·11 뉴욕-워싱턴 테러`가 일어났다. 미국은 테러의 진원지를 발본색원하겠다며, 배후로 지목된 이라크를 공격했다. 기자와 작가들이 여럿 모인 자리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1개월짜리 여행비자 얻으려 100여개 항목 신청서 써내 가까스로 이란 도착하니 영어 한마디도 통하지 않아 “적지 않은 기자들이 이라크로 가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바그다드를 취재하겠다고 자원한다는데, 당신들은 그들이 이해되는가? 나는 이해가 안 된다. 총알에는 눈이 안
우려가 많았던 알바니아 여행. 그러나, 그곳에서 만난 이들은 그런 우려를 불식했다. 게스트하우스에서 우연히 마주친 예의 바르고 친절한 미국 사내와의 저녁식사는 즐거웠다. 어둠 내린 티라나의 거리를 나란히 걸어 레스토랑을 찾았고, 그가 “가능하면 여행지의 음식을 먹어보자”는 제의에 따라 현지인들이 주로 찾는 식당에 자리를 잡았다. 번성했던 옛도시 베라트의 흔적이라곤 산 위에 황량하게 남겨진 성곽뿐… 국적 다른 커플의 위대한 사랑에 감동 타인에 베푸는 넉넉한 마음도 선사 받아 수염을 기른 무슬림들이 탁자마다 자리를 메운 서민들의 식당. 다진 양고기와 채소를 반죽해 숯불 위에 구운 요리를 주문했다. 맥주 한 병씩을 곁들이니 더할나위 없는 만찬이다. 한 사람당 겨우 6000원의 상차림임에도 만족도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관문인 불가리아와 마케도니아를 거쳐 알바니아의 수도 티라나로 향하는 국제버스에 올랐다. 때는 유럽대륙이 불덩이처럼 달아올라있던 한여름.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아스팔트가 녹아내리는 폭염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냉전·폐쇄정책·독재로 서민들의 경제 어려워도 자신의 나라에 온 손님에게 작은 할인의 선물도 소박하고 선량한 친절을 간직한 티라나 사람들 그 더위에 냉방시설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낡은 버스를 타고 7시간을 넘게 달려야 했으니, 마케도니아 스트루가를 출발해 티라나에 도착했을 땐 기자만이 아닌 탑승자 모두가 지쳐있었다. 무엇보다 시원한 음료 한잔이 절실했다. 머물 숙소를 찾기 전, 허름한 구멍가게에 들러 냉장고에서 차가운 맥주를 하나
가톨릭과 기독교가 주류를 이루는 유럽에서 `소수자`인 무슬림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여기에 더해 “당신들 나라 사람들은 악랄한 범죄조직에 몸담고 사는 이가 많다”는 오해까지 더해진다면 그야말로 첩첩산중에 설상가상이다. 그런 이유에서였을까. 기자는 아직도 알바니아가 타의에 의해 소외받고 고통 받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외로운 섬`처럼 느껴진다. 그랬다. 알바니아는 유럽대륙 안에 외따로 존재하는 섬이었다. 외로움과 고립됐다는 감정은 사람의 정서를 부수기 쉽다. 하지만, 그런 소외감 속에서도 인간은 강직한 마음과 선량함을 향한 신념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 그게 인간만이 가진 힘이기도 하다. 한국인들에겐 이름조차 생소한 알바니아를 여행했을 때, 외부로부터의 수난을 이기고 선함에 가닿
크로아티아 내전이 남긴 상처를 눈앞에서 지켜봐야했던 아픈 경험을 뒤로 하고 두브로브니크와 작별할 날이 왔다. 여행은 인간에게 즐거움만을 제공하지 않는다. 때로는 슬픔도 여행을 지속할 수 있는 힘이 돼준다. 그런 즐거움과 슬픔의 체험을 통해 인간은 성장하는 것이고, 바로 그 `정신적 성장`을 위해 돈과 시간을 투자해 여행을 하는 게 아니겠는가. 아름다운 건축물 간직한 도시 `스플리트` 로마 황제 별궁에서 고대 낭만·매력 충만 두브로브니크를 떠나던 날도 붉은 지붕 위 햇살은 눈부셨다. 머물렀던 사흘의 시간을 통해 정이 들었던 것일까. 이별의식이 길어졌다. 민박집 부부는 기자의 손을 잡고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들이 미안할 이유는 없었다. 전쟁과 그로 인한 상처는 그들의 잘못이 아니었으므
오렌지색 가로등이 어두운 거리의 가파른 계단을 비추던 자정 무렵. 숙소로 돌아갔다. 언덕에서 내려다보는 두브로브니크는 활기 넘치는 낮과 달리 고요한 침묵에 휩싸여 있었다. 민박집 문을 여니 낮에 본 사내가 거실에 혼자 앉아 포도주를 마시고 있다. 한국이었으면 “함께 한잔 할까요”라고 청했을 테지만, 붉어진 그의 눈동자와 어두운 표정을 마주 보기 어색했다. 가벼운 인사만을 남기고 방에 들어가 깊은 잠에 들었다. 무엇인지 구체적으로는 알 수 없지만 남자의 가슴에 새겨진 지울 수 없는 생채기가 짐작되던 밤이었다. 그리고, 아침. 귀가한 여주인이 레몬차를 만들어줬다. 한국식 해장국만은 못했지만, 윙윙거리는 두통이 멀리로 물러나는 기분이었다. 크로아티아 사람들의 배려와 마음씀씀이가 따뜻하다고 느끼기에
전쟁과 테러는 인류의 역사와 함께 해왔다. 이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대다수 전쟁과 테러의 원인이 `종교와 인종의 다름`에 있었다는 것 역시 명백하다. 1990년대 초반.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에 이어 유고슬라비아 연방도 몇 개의 나라로 분리·독립했다. 바로 그 즈음, 크로아티아는 혹독한 내전을 겪었다. 독립을 막으려는 세르비아계와의 전투에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다. 그들 중 한 사람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여행. 그러나, 세상사 어떤 일도 자신의 뜻대로만 되는 건 없다. 아름다운 아드리아해를 피로 물들인 내전의 상처를 안고 사는 중년의 사내. 그와의 만남은 크로아티아 방문 첫날 이뤄졌다. 두브로브니크 국제버스터미널에서 만난 여자가 대우에서 생산된 자동차를
`크로아티아`라는 나라가 한국인들에게 보다 친숙하게 다가온 시기는 2013년 쯤이다. 방송 tvN은 `꽃보다 누나`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크로아티아의 아름다운 풍광을 소개했다. `꽃보다 누나`가 방영된 후엔 “여름휴가 때 크로아티아에 가면 외국인보다 한국인을 더 많이 만나게 된다”는 과장 섞인 풍문이 떠돌 정도로 이제는 익숙한 여행지가 된 크로아티아. 기자의 경우엔 이탈리아 남부에서 1년쯤 생활하며 요리를 공부한 친구에게 크로아티아란 국가가 얼마나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지녔는지 이야기 들었다. 친구가 운영하는 식당에서 연어샐러드에 포도주를 마시며 나눈 대화를 기억 속에서 끄집어내보자. “네가 살던 이탈리아 남부쪽 사람들은 휴가 때 주로 어딜 가냐?” “아드리아해를 건너면 크로아티아가
인간이 살면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뭘까? 무언가를 모르면 그것에 관해 배우면 된다. 그래서 학교와 교사가 존재하는 것이다. 여러 가지 경험을 하며 세상 속에 섞여 살다보니 무지보다 더 무서운 게 편견과 선입견이란 걸 알게 됐다. 사람 사이에 발생하는 불화의 대부분은 바로 이 편견과 선입견에서 시작된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들이다. “무슬림들은 모두가 한 손에는 코란, 한 손에는 폭탄을 든 테러리스트다” “가난한 사람들이 많은 동남아의 밤길은 위험하다” “처음 보는 여행자에게 과도한 친절을 베푸는 사람은 사기꾼일 가능성이 높다” 등등. 여행은 바로 이런 선입견과 편견을 자신의 마음 안에서 허무는 과정이 아닐까. 나 역시 배낭을 메고 세상 곳곳을 홀로 떠돌기 전엔 가슴 속에 작지 않은 편견과
마케도니아의 조용한 시골마을 오흐리드를 떠올릴 때면 해질 무렵의 빛깔이 자연스레 그려진다. 바다처럼 넓은 호수를 배경으로 서서히 붉게 떨어지는 태양. 물론, 석양이 아름다운 곳은 세상에 많다. 라오스의 루앙프라방과 앙코르와트가 있는 캄보디아 씨엠립에서 만난 저녁 풍경도 일품이었고, 사막을 여행하며 본 이란 야즈드의 석양 역시 숨 막히게 아름다웠다. 그러나, 오흐리드의 일몰은 여기에 매력 하나가 더 추가된다. 여행자의 마음을 한없이 평화롭게 가라앉히는 순정함이 바로 그것. 편안함과 나른함의 감정을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호수와 진홍빛 석양. 오흐리드는 석양으로 기억되는 도시다. 낮 동안 빛과 열기를 토해내며 동네와 숲을 달구던 태양이 호수 저편 수평선 뒤로 사라지는 시간. 하늘과 그에 맞닿은 호수는
인간은 누구나 정주(定住)와 유랑(流浪)의 가운데서 삶을 이어간다. 머물러 있는 자는 떠남을 꿈꾸고, 자신이 살던 삶의 터전에서 멀리 떨어진 이들은 익숙한 공간으로 돌아올 날을 기다리는 게 세상사 이치다. 시인 폴 발레리(Paul Valery)가 말한 바 `가장 아름다운 행복`이 정주하는 일상이라면, 여행은 낯선 유랑의 공간과 만나는 시간이다. 여러 여건 탓에 쉽사리 정주의 삶을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유랑은 꿈이다. 잠시 기자의 길을 접고, 유랑의 다른 이름인 여행을 통해 집이 아닌 길 위에서 꿈을 찾으려했던 때가 있었다. 그때의 기록과 단상을 통해 익숙한 곳이 아닌 낯선 곳에서의 경험, 반복되는 일상이 아닌 생경한 체험이 주는 즐거움을 새해부터 독자들과 함께 나누고자 한다. 여행기는 발칸반도, 유럽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