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년 전 분단 서도이칠란트로 유학을 떠난 기억이 아직 생생하다. 난생처음 타본 비행기가 알래스카의 앵커리지를 경유(經由)해 북극항로로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한 일을 잊은 적이 없다. 당시 한국 여권의 결혼 관련 질문은 두 가지였다. 미혼이냐 기혼이냐, 그것이 전부였다. 나 역시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기에 당연하다 여겼다. 그런데 도이칠란트에 가보니 당연한 것이 당연지사가 아니었다. 문화적 충격이 쿵, 하고 다가왔다.유럽의 유일 분단국가 서도이칠란트의 여권에 기록된 결혼 관련 질문은 다채로웠다. 미혼, 기혼, 이혼, 별거, 동
월남(越南) 작가 이범선(1920∼1982)의 단편소설 ‘오발탄’(1959)을 읽다 보면 숨이 턱턱 막힌다. 요즘엔 상상하기도 힘든 새빨간 가난이 등장인물들을 날로 먹어 치우기 때문이다. 가장인 철호의 모친은 해방이 되었다고 곱게 차려입고 만세까지 불렀지만, 토지개혁으로 집과 땅을 빼앗긴 채 남한으로 내려온다. 6·25 한국동란 와중에 폭격으로 실성한 그녀 입에서는 ‘가자, 가자’하는 소리만 흘러나온다.계리사(공인회계사) 사무실 서기로 일하는 철호에게는 이대를 졸업한 아내와 다섯 살 먹은 딸아이, 남동생 영호와 여동생 명숙이 있다.
언제부턴가 대한민국은 선진국이 되었다. 누가 어떤 근거로 선진과 후진을 규정하는지 알 수 없지만, 우리나라가 선진국 대열에 올랐다고 한다. 좋은 일이다. 반갑고 가슴 벅찬 일이다. 어린 시절엔 후진국 소리를 들어야 했고, 청소년 시기엔 개발도상국 소리를 지겨울 정도로 들어야 했다. 그러다 어느 날 대한민국은 선진국이 되어 있었다. 실로 경천동지할 일 아닌가?!닷새 전인 11월 23일 서울 서대문구 다세대주택에서 모녀 사망 사고가 보고된다. 그들이 살던 방 앞에는 미납된 5개월분 전기요금과 월세를 독촉하는 주인의 편지가 있었다고 한다
대학원 들어갈 무렵 당시 스물다섯 살이었던 나는 중대한 결론에 도달한다. 공자보다 10년을 더 살기로 한 것이다. 중니(仲尼)는 생애주기별로 자신의 성취나 경지를 낱낱이 밝혔다. 15세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30세에 홀로 섰으며, 40세에 불혹에 이르렀으며, 50세에는 천명을 알았고, 60세에는 이순, 70세에는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欲不踰矩)’의 경지에 도달했다.공자보다 10년 늦게 학문을 뜻을 둔 나는 공자보다 10년 늦게, 하지만 그가 도달한 경지에 확실하게 이르겠다고 다짐한 것이다. 어언 세월이 물처럼 흘러 오늘에 이르렀다
마쓰오 바쇼(1644∼1694)는 하이쿠(俳句)를 배우의 유희에서 예술의 경지로 승화시킨 인물이다. 평생을 가난과 방랑으로 일관한 그는 돈이 지배하는 시대에 당당하게 맞선 인물이다.에도 막부(1603∼1868) 초기를 살아간 그는 자본주의의 광풍에 휘둘리는 군중과 시류에 온몸으로 저항한다. 그가 남긴 하이쿠 한 수는 이렇다.“두견새 운다 / 지금은 시인이 없는 세상”봄의 서정이 피를 토하며 우는 두견새의 울음소리로 단출하게 구상화된다. 그런 봄날에 에도의 시인들은 시를 버리고 돈을 찾은 지 오래다.서정주는 ‘귀촉도’에서 먼저 세상
2012년에 시작되어 올해로 열한 번째를 맞은 ‘대구 여성영화제’가 지난 11월 3일부터 5일까지 열렸다. “우리는 거침없이 나아간다”는 표어를 내건 주최측의 주장이 마음에 닿는다.‘여성과 소수자들에 대한 혐오와 차별에 대해 영화로 이야기하고 연대하고자 합니다.’ 성소수자와 미혼모, 트랜스젠더, 딸을 잃어버린 어머니, 일자리 구하는 청소년, 갈등하고 대립하는 모녀, 사회적 참사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가 앞다투어 상영되었다.우리 사회에서 여성과 소수자의 입지는 제대로 마련된 적이 없다. 대규모 참사가 일어난 이태원
지난 10월 13일 22세 쿠르드족 여성 마흐사 아미니가 테헤란에서 이란 ‘도덕 경찰’에 체포된다. 그녀가 체포된 이유는 머리카락 일부가 보일 정도로 히잡을 제대로 쓰지 않았다는 것이 전부다.사흘 뒤에 의문사한 아미니를 추모하면서 ‘히잡 시위’가 불타올랐다. 히잡 시위의 슬로건은 ‘여성, 생명, 자유’다. 히잡 시위로 지금까지 사망자 200여 명과 2천명 이상의 구금자가 발생했다고 외신은 보도한다.검사 출신으로 검찰총장을 역임한 에브라힘 라이시 대통령이 7월 22일 제정한 ‘히잡과 순결의 날’이 히잡 시위의 원인 가운데 하나다. 여
오전 10시 반에 강의가 있는 아침은 여유롭다. 이번 학기 수업 가운데 사흘이 9시에 시작한다. 그런 아침나절에는 7시에 운전대를 잡아야 한다. 강의 내용을 미리 살피고, 이것저것 보충하려면 조금 서둘러야 한다.하지만 2교시 수업이 있는 이틀은 상대적으로 넉넉하다. 그런 날 아침 대학원동 앞 너른 인도에 꼬맹이들이 풍선을 하나씩 들고 저쪽에서 걸어온다. 재잘재잘 조잘조잘 웅얼웅얼하면서 손에 손 맞잡고 걸어오는 것이다.숫자 헤아리는 버릇이 있는 나는 아이들이 11명, 인솔 교사가 3인임을 확인한다. 네다섯 살 먹은 녀석들이 앙증맞게
길은 사람을 설레게 한다. 그 길이 새로운 길이든, 이미 익숙한 길이든 길은 나그네의 마음을 들뜨게 한다.2019년 한 해 동안 광주 전남대에서 교환교수로 있으면서 나는 광주와 대구, 청도와 광주를 뻔질나게 오고 갔다. 하지만 길을 나설 때마다 가슴을 채우는 설렘과 기대는 매번 다른 색깔과 향기로 다가온다. 타고난 역마살 덕택일지도 모를 일이다.신천대로를 지나 남대구 톨게이트를 거쳐 갈림길에 이른다. 예전의 구마고속도로와 지금의 달빛 고속도로가 갈려 나가는 길이다. 잠시 후 고령과 합천으로 이어지는 길과 만난다. 500년 넘도록 번
공자와 동시대인이었던 진항(陳亢)은 당대 최고의 사상가이자 교육자인 공자가 아들 교육을 어떻게 하는지 궁금했다. 어느 날 공자의 외아들 백어(伯魚)에게 아버지에게 특별한 무엇을 배운 게 있는지 묻는다. 골똘히 생각한 백어가 답한다. “어느 날 아버지께서 제게 시를 공부하느냐고 물으시길래 그렇지 않습니다, 대답했더니 시를 공부하지 않으면 말을 할 수 없다(不學詩 無以言)고 하셔서 시를 공부했습니다.” (‘논어’ 계씨편)여기서 시는 공자가 당대에 엮은 ‘시경’에 들어있는 305편의 작품을 가리킨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시는 서정시에 한
영화배우 겸 가수로 이름을 날린 나애심(1930∼2017)의 대표곡 가운데 하나가 1958년에 나온 ‘과거를 묻지 마세요’다. 고통스러운 시간이 흘러 이제 꽃이 피어나고 희망이 환하게 빛나는데 지나간 시절을 새삼 물을 이유가 있느냐는 노래다. 지금과 여기에 초점을 맞추며 살아가는 사람의 관점에서 보면 천만번 지당한 얘기다.하지만 세상은 온갖 종류의 사람이 모여 사는 공간이다. 그나 그 여자의 과거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사람도 적잖다. 그들에게도 논리가 있다. 과거의 누적이 현재에 응축돼 있고, 과거는 미래에도 깊고 너른 그림자를
교과서에 실린 안톤 쉬나크(A. Schnack·1892∼1961)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을 학창 시절에 여러 번 읽었다. “울음 우는 아이들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정원 한편 구석에서 발견된 작은 새의 시체 위에 초추(初秋)의 양광(陽光)이 떨어져 있을 때, 대체로 가을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그래서, 가을날 비는 처량히 내리고, 그리운 이의 인적은 끊어져 거의 일주일이나 혼자 있게 될 때.” 이렇게 시작하는 미문(美文)의 결정체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깊이 물든 선홍색 단풍잎처럼 마음이 내려앉아 있을 때, 나는 쉬나크
누구에게나 타인과 말하고 싶은 욕망이 있다. 내가 전하고 싶은 지식과 정보 혹은 정서의 교감을 바라기 때문이다. 대화가 잘 되는 사람에게 우리는 친밀감과 신뢰감을 가진다. 그럴 때 우리는 말이 통하는 사람이야 하고 중얼거린다. 주변에 말이 통하는 사람이 있는 경우와 그렇지 못한 경우 인간관계의 질적인 차이가 확연해진다. 인간은 식주의(食住衣) 세 가지만으로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얼마 전에 전화를 받았다. 정치에 관해 이야기해보고 싶다는 젊은이의 전화였다. 나는 몇 번이고 거절했다. 정치와 정치가에 대한 믿음을 접은 지 많은 시간이
기역과 지읒의 차이 하나로 아주 다른 뜻을 가지는 두 단어, 거울과 저울. 이런 어휘가 우리말에는 차고 넘친다. 겨울과 여울, 장마와 악마, 선발과 후발, 밥상과 책상. 이런 본보기는 거의 무한대다. 하지만 나는 거울과 저울의 상관성에 관해 생각하고 싶어진다. 왜냐면 거울과 저울 양자가 우리 시대의 단면 가운데 하나를 적실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거울아, 거울아!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 익숙한 질문이다. 백설공주(白雪公主) 의붓어미가 마법의 거울에 던지는 질문이다. 그녀가 물어볼 때마다 거울은 백설공주라고 답한다. 여기서
젊어서는 사람 하나 만나고 헤어짐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그런 의미를 알지 못했다. 나이를 제법 먹은 후에 그런 의미를 곧바로 깨우친 것도 아니다. 그것은 별리(別離)의 각별한 고통을 경험한 뒤에 불현듯 찾아왔다. 누군가를 만나서 서로 이해하며 부대끼고 살아간다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문제는 우리가 그 뜻을 온전히 헤아리지 않고 일상을 영위한다는 데 있다.내가 이상엽을 알게 된 것은 1991년 5월 일이다. 여느 때처럼 저녁 8시 뉴스를 보려고 도이칠란트 국영방송 ARD 앞에 앉은 나는 그대로 굳어버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이하 ‘우영우’)가 연일 화제를 뿌리며 시청률 고공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요즘 한국 드라마가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현실을 생각하면, ‘우영우’의 폭발적인 인기가 새삼스럽지 않다. 하지만 드라마의 주인공 우영우를 수식하는 ‘천재적인 두뇌와 자폐 스펙트럼을 동시에 가진 신입 변호사’를 생각해보면 상황이 녹록지 않다. 천재성을 가진 자폐 장애인 우영우가 대형 법률회사에 입사하여 좌충우돌하는 게 기둥 줄거리이기 때문이다.그동안 자폐 장애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화와 드라마는 적잖다. 영화 ‘말아톤’ (200
얼마 전 인터넷에 의미심장한 통계자료가 올라왔다. 한국갤럽이 제시한 ‘우리 사회 차별 정도 인식’의 8개 항목 수치가 그것이다. 구체적인 항목을 열거하면 이렇다. 빈부 차별, 비정규직 차별, 학력-학벌 차별, 장애인 차별, 성 소수자 차별, 국적-인종 차별, 성(性)차별, 나이 차별이다. 여덟 가지 차별 가운데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한 사회문제라 할 것이다. 그중에서 몇 가지만 생각해보고자 한다.차별 정도가 매우 심각하거나 약간 심각하다고 응답한 비율을 보자. 빈부 차별 81%, 비정규직 차별 79%, 학력-학벌
제헌절은 1948년 7월 17일 헌법이 공표된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2022년 7월 17일은 74번째 맞이하는 제헌절이었다. 그동안 우리 헌법은 9차례 개정되었는데, 그 가운데 2, 5, 6, 7, 8차의 개정은 권력구조 개편을 위한 것이었다. 달리 말하면 대통령 1인을 위한 헌법개정이 다섯 번이나 이루어졌다는 얘기다. 더욱이 마지막 헌법개정은 지난 1987년의 일이었으니, 35년 동안 헌법개정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영화 ‘1987’에도 나오지만, 1987년 헌법개정을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의 피와 눈물과 희생이 있었는지, 우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황금 세기라 부른다. 다른 유럽 국가들의 문학과 비교할 때 상당히 늦게 출발했지만, 러시아 문학이 세계문학을 선도하는 위치에 올라섰기 때문이다.푸쉬킨에서 시작하여 레르몬토프, 고골을 거쳐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를 지나 체호프에 이르는 19세기 러시아 문학 거장들의 운항은 경이롭다.그중에서도 도스토예프스키의 장편소설 ‘죄와 벌’(1866)은 한국 독자에게도 퍽 친숙하다.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전당포 노파를 죽이고, 그녀의 돈을 사회의 유용한 곳에 쓰겠다는 생각을 구체화한다. 자신의 거처에서 전당포에 이르는 거
누구에게나 나름의 습관이 있다. 타인과 구별되는 버릇이 있기 마련이다. 나는 좋아하는 영화가 있으면 여러 번 본다. 지겹거나 귀찮은 노릇 아니냐고 묻는 사람도 있다. 그러면 이렇게 대꾸한다. ‘좋아하는 음식을 한 번만 먹고 마나요?! 혹은 좋아하는 사람을 한두 번 만나고 그만 만나시나요?!’ 열댓 번 본 영화도 있다. ‘동사서독’이나 ‘천공의 성 라퓨타’가 그렇다.이런 영화는 여러 번 보아도 질리지 않는 구석이 있다. 사람을 끄는 강렬한 매력이 부설돼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쿠지로의 여름’은 그런 부류에 속하지 않는다. 일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