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모사를 아는가?살짝만 건드려도 잎이 밑으로 처지고 싸늘하게 오므라드는 풀꽃이다. 뜬금없이 날아든 시끄러운 소리에 마음이 불같이 달아올라, 결국은 부족한 스스로에게 상처받아 의기소침해진 나는 한 포기 미모사가 되어 집을 나선다.에 ‘반문문성(反聞聞性)이라는 말이 있다. 어떤 소리를 듣고 있는 나를 다시 들여다 본다는 말이다. 나의 반문문성은 늘 한 발 늦게 행해져 스스로를 비참하게 만든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감정의 노예가 되어 허둥대는 마음을 또 다른 내가 조용히 지켜보는 일은 쉽지가 않다.무작정 절을 찾아 팔공산 순
길은 와인 터널 옆 감나무 밭을 끼고 이어진다. 소란스러운 인파의 그림자를 사뿐히 벗어날 즈음 감나무 잎새에 머물던 계절이 풀잎 위로 내려앉는 소리가 들린다. 최대한 느긋하고 여유롭게 시간을 즐기고 싶었지만 길은 짧았다. 키가 큰 나무들 사이로 높은 석축이 보이고 절은 그 위에서 흔들림 없이 고요하다.대적사(大寂寺)는 876년(신라 헌강왕 2년) 보조선사가 토굴로 창건한 후 조선 숙종 15년 성해대사가 중수하면서 사찰의 면모를 갖추었다. 돌계단에는 젖은 이끼가 법문처럼 자라고 절 문 안으로 불교도의 이상향인 극락정토를 표현한 극락전
적요를 먹고 크는 배롱꽃, 깊이를 알 수 없는 평화, 오래된 침묵, 그리고 무슨 말이 필요할까. 오후의 햇살이 관심당 툇마루의 나이테를 세다 창살에 기대 졸고 있다. 모두 하나가 되어 멎어 있는 풍경들, 발걸음 소리에 정제된 시간들이 파문을 일으키며 깨어날 것만 같아 고양이 걸음으로 들어선다. 귀 밝은 솔이가 컹컹 영산암이 떠나가도록 짖는다.봉정사 영산암은 석가불이 법화경을 설법하던 영취산에서 유래되었으며, 영취산에 모여 설법 듣는 나한을 모신 응진전이 주법당이다. 온통 국보와 보물로 가득한 봉정사와 달리 경상북도 민속자료라는 아주
십여 년 전 원적사에 들렀던 적이 있다. 청정한 절의 경관보다 닳고 해진 소매끝과 천을 덧대 기운 젊은 스님의 승복 앞에서 가슴 서늘했던 기억이 또렷하다. 그 청빈한 산사의 이미지는 오랫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불자도 아닌 내가 산문을 쉽게 개방하지 않는다는 선원에 다시 가볼 기회는 오지 않았다.무작정 원적사를 찾아 나섰다. 문경과 상주, 괴산을 끼고 있는 청화산 중턱을 향해 가파른 산길을 오르자 ‘청정수행도량이니 돌아가라’는 표지판이 가로 막는다. 절은 660년(신라 태종무열왕7년) 원효 대사가 창건하였다는 설이 있지만 확실
막 깎아놓은 풀냄새가 좋다. 먼 곳으로 자식을 떠나보낸 늙은 부모처럼 국보 제 112호 감은사지 동서 삼층석탑은 오늘도 기다림에 젖어 있다. 장중함의 눈빛이 하도 외롭고 쓸쓸하여 한참 동안 고개를 젖히고 우러러본다.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이 왜구의 침입을 부처의 힘으로 막으려고 짓기 시작한 감은사는 신문왕 2년(682년)에야 완성된다. 죽어서도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부왕의 유언을 받들어 동해에 해중릉을 만든 후, 절의 금당 밑으로 용이 드나들 수 있도록 물길을 낸 충과 효가 배어 있는 절이다.천천히 서탑을 돌며 까마득히 역사 속
포장된 외길을 오르다보면 은둔하듯 숲속에 터를 잡은 김천 수도암을 만난다. 가파르게 이어지는 길이 울창한 초록숲의 유일한 출구이다. 본사인 청암사가 수도산을 지키는 여신(女神)같다면 해발 1000m 쯤에 자리 잡은 수도암은 남신(男神)이라 할 만하다.신라 헌안왕 3년(859년) 절을 창건한 도선국사가 터를 발견하고 만대에 수도인이 나올 곳이라 기뻐했다는 천하 명당, 풍수적으로 여인이 베틀에 앉아 베를 짜는 형국이다. 대적광전 앞에는 베틀의 기둥을 상징하는 동탑과 서탑이 늠름하고, 실 감는 도토마리석이 발견되어 전설 같은 이야기에 힘
비가 지나간 뒤 숲은 온통 젖어 있다. 도랑물이 콸콸 젖어 흐르고 이끼 낀 부도들도 잿빛으로 젖어 있다. 젖은 나무들이 천년고찰의 일주문을 대신한다.영지사의 주차장은 키 큰 참나무 숲이다. 세속을 비켜 앉은 무념의 기운이 지배하는 소박한 곳, 잠시 마음을 내려놓고 싶다. 발 빠른 변화를 요구하는 시대를 담담히 돌아앉아 고요히 참선하는, 그런 절이다.영지사는 신라 무열왕 때 의상대사가 웅정암(熊井庵)이라 창건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선조 때 중창하면서 영지사(靈芝寺)로 바뀌었다. 영조 50년에 중수하였다는 유적비와 지금까지 사찰
지난 밤 꿈에 그가 하얗게 핀 파꽃을 안고 찾아왔다. 안부를 물어야 하는데 그만 가위에 눌려 잠을 깨고 말았다. 더 이상 잠들지 못하고 정원으로 나갔더니 젖은 달빛아래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넘쳐흐른다. 잔디밭이나 바위 틈, 담장 너머 빈터의 강아지풀숲까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울어댄다. 생의 가장 눈부신 한 때를 위한 이 장엄한 합창들이 나를 숙연하게 한다.고요의 겹을 벗고 아침이 열리는 시간, 운문사로 향한다. 미처 가슴 속에서 떠나보내지 못한 것들과의 재회는 세월이 흘러도 아름답다. 그런 기억들이 사라질까 두려워 우리는 가슴 속에
봄을 시샘하는 무리들이 저만치 물러났다 싶더니 또다시 기승을 부린다. 그래도 통도사 자장매는 시기를 놓치지 않는다. 선암사의 선암매나 백양사의 고불매보다 가장 서둘러 눈을 뜬다. 고혹적인 자장매 향기를 품고 서운암을 오른다. 투두둑투두둑 실밥이 터지듯 내 가슴에서 홍매화가 쉼 없이 꽃을 피운다. 서운암은 봄이 완연해질 때 와야 좋다. 매화밭에서 한바탕 꽃축제를 열고나면 더 낮은 자리에서 봄꽃들이 지천으로 핀다고 했다. 봄의 문턱에서 여전히 바람은 차건만 영축산은 봄꿈을 안고 나를 맞는다. 꽃등처럼 환하게 서운암을 밝히는 수많은 장독대들, 어둡고 답답한 장독 안에서 발효되어가는 먹거리들을 생각하면 저절로 숙연해진다. 매화꽃 아래에서 익어갈 서운암 된장을 상상하며 나를 돌아본다. 더러더러 매화가 하
눈이 녹아서 비나 물이 된다는 우수다. 우수, 경칩에 대동강 물도 풀린다는데 내 몸과 마음은 지칠대로 지쳐 있다. 며칠간의 불면증을 털어버리지 못하고 남쪽으로 달린다. 도로는 확장공사로 흙먼지를 일으키며 부산한데 그 틈바구니로 봄이 오는 소리가 들린다. 실눈을 뜨고 봄을 기다리는 나무들의 두근거림을 찾아 나는 좁고 어수선한 도로를 달린다. 어쩌면 홍매화가 꽃망울을 터뜨렸을 통도사를 애써 외면하고 곧장 자장암으로 향한다. 만개한 홍매화 소식을 접하고 두어 번 문안인사를 드리러 온 적은 있지만 일부러 암자를 찾은 적은 없다. 요염한 자태와 향기에 젖기 위한 나만의 시간, 그 사치스러운 여유를 오늘은 즐길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통도사에서 바라보던 가파르고 잘 생긴 영축산의 품은 뜻밖에도 넓고 크다
운람사는 산아지랑이(嵐)가 구름(雲)으로 피어오르는 절, 혹은 구름(雲)과 바람(嵐)으로 만든 절이란 뜻을 가졌다. 이름에서 설렘이 묻어난다. 하늘로 오르는 산, 천등산 정상 부근에 자리하고 있는 사찰을 향해 차는 가파른 오르막길을 꺾고 꺾으며 힘겹게 오른다. 이름처럼 운람사의 풍경은 장관이다. 정확한 창건 연대는 전해지지 않지만 유적과 유물을 통해 신라 신문왕(682-692년)때 의상 조사가 창건한 천년 고찰로 추정하고 있다. 운람사가 위치한 지형이 구름 가운데 반달이 솟은 형상, 운중반월형이라 그런지 굽이굽이 산능선이 파도처럼 물결치며 한 눈에 들어온다. 소박한 절은 소나무 숲에 둘러싸여 모락모락 연기를 피워 올린다. 묘한 향수와 정감에 싸여 경내로 들어서는데 뜻밖에 소란스럽다. 사찰 같지
겨울 공기가 유난히 맑고 상큼하다. 한 차례 진눈깨비가 다녀갔는지 들과 길은 드문드문 잔설을 이고도 눈부시다. 어렵지 않게 찾은 소금강산은 초입부터 정갈한 기운으로 가득하다. 소나무 숲 아래로 이어진 길은 호젓하고 평화롭다. 오르막길을 걷는 사람들의 발걸음도 산책하듯 가벼워 보인다. 소나무와 바위가 적당히 어울린 산은 천년 신라의 숨결을 간직한 야외 박물관으로 손색이 없다. 국보 28호 금동약사여래입상을 경주 국립박물관에서 만난 후 백률사를 만나고 싶었다. 두 팔이 없지만 풍만한 얼굴에 미소가 아름답고 우아한 불상 앞에서 백률사라는 출처는 생소하고 낯설었다. 삼국유사에도 백률사의 영험한 관음상 이적 이야기가 소개된 것을 보면 큰 사찰이었음이 분명하다. 백률사는 불국사의 말사로 이차돈의 순교와도
잔뜩 찌푸린 하늘을 달래며 반룡사를 찾아 나선다. 절은 깊은 산속이 아니라 마을과 들을 동무 삼아 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다. 넓은 주차장 위로 성벽처럼 둘러싸인 석축과 큰 누각이 위용을 자랑하지만 깔끔한 전각들이 조금은 어색하다. 반룡사는 661년(문무왕 1년) 이 지역 출신인 원효 대사가 창건하였다. 신라 삼국 통일의 성업을 달성하기 위한 호국도량으로 한국의 3대 반룡사(경산, 고령, 평양) 중 하나로 낙조가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고려 중기에는 원응국사가 중창하여 신흥사로 불렸으며 수많은 고승과 명사들이 줄지어 찾아와 한 때는 5개의 암자와 26개의 당우를 가진 대가람이었다. 그 후 반룡이 승천한 격이라 하여 반룡사라 명명하였지만 영화롭던 절은 배불정책의 폐해와 원인모를 화재로 폐사되었다가 복원을
전국을 강타한 한파가 누그러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한동안 움츠러들었던 마음이 풀리지 않는다. 정겨운 다도해와 낭만의 편린들을 안고 살아가는 동양의 나폴리, 따뜻한 통영 앞바다가 그립다. 그곳에 가면 미륵불이 오기를 기다리며 살아가는 미래사를 볼 수 있다. 오늘 같은 날은 절을 에워싼 편백나무 숲을 거닐고 싶다. 피톤치드 향기로 샤워를 하고 나면 온몸은 파랗게 물이 들고 지쳐 있던 영혼도 금세 생기를 찾을지도 모른다. 바다를 끼고 달리던 차가 어느 지점에서 급하게 산비탈을 향해 꺾어들고, 1Km쯤 오르면 하늘을 찌를 듯 키 큰 편백나무들이 나타나 미래사가 지척에 있음을 알려 준다. 미래사는 미륵신앙이 살아 숨 쉬는 미륵산 남쪽 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 조계종 초대 종정을 지낸 효봉 스님의 상
햇살 좋은 오늘, 영해 바다는 화사한 옥색 치마를 두르고 저 혼자 꿈을 꾸듯 살랑댄다. 바람까지 상큼하다. 장육사 가는 길은 바다를 두고 산을 향해 달린다. 슬쩍 돌아보면 여전히 눈부신 바다가 따라올 것만 같다. 저만치 일주문이 보이는데 길은 엉뚱한 곳으로 비켜나 있다. 오직 한마음으로 진리에 귀의한다는 뜻을 가진 일주문은 사바세계에서 오는 사람을 맞지 못하고 개울 건너에서 섬처럼 홀로 떠 있다. 쓸쓸함을 삼키고 먼 곳을 응시하는 일주문이 자꾸만 마음에 걸린다. 제 역할과 기능을 다 하지 못한다는 건 얼마나 슬픈 일인가? 장육사는 1355년 고려 공민왕 때, 이곳이 고향인 나옹선사에 의해 창건되었다. 열두 살에 친구의 죽음을 보고 문경 공덕산 묘적암에서 승려가 된 나옹 선사는 공민왕의 스승으로
뜬 눈으로 겨울밤을 새운 내소사 달빛은 참으로 교교하다. 인시를 넘기자 도량석을 알리는 목탁소리가 정적에 싸인 사찰과 능가산을 깨운다. 시린 달빛을 밟으며 대웅전으로 향한다. 새벽 공기가 제법 차다. 선잠을 깨고 나서는 길이지만 마음은 맑고 명징하다. 대웅전 법당에는 두 개의 대형 히터가 돌아가지만 냉기를 몰아내기에는 역부족이다. 법당을 지키는 부처님보다 예를 갖추고 새벽 예불을 준비하는 스님에게서 더 서늘한 기운이 느껴진다. 좌복 위에 다소곳이 앉아 마음을 가다듬는데 히터 돌아가는 소리와 벽쪽을 흐르는 찬 공기가 보채듯 신경을 자극한다. 스님 몇 분이 올리는 단출한 새벽 예불에 템플스테이에 참가한 인원들이 하나씩 자리를 잡고 앉는다. 내소사는 백제 무왕 34년(633년) 혜구두타라는 비구니
겨울 안개가 자욱한 아침, 새해 첫 산사기행을 나선다. 남편의 차에는 클래식 음악이 흐른다. 바쁘다는 핑계로 남편의 음악적 취향이 바뀐 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부재된 아내의 자리 앞에서 약간의 어색함과 미안함이 밀려든다. 다행히 좁은 차 안은 음악실이 되어 활기를 띤다. 그는 웅장하고 스케일이 큰 심포니 곡을 좋아하고 나는 고독과 애잔함이 느껴지는 독주곡이나 콘체르토를 좋아한다. 곡이 바뀔 때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짧은 지식을 곁들인다. 베토벤의 열정, 쇼팽과 연상의 여인 조르주 상드의 사랑, 슈베르트의 가난과 요절 따위를 이야기하며 남쪽으로 달린다. 평이하던 그가 연인처럼 새롭게 다가온다. 안개 속으로 숨어든 겨울 풍경, 자동차들이 질주하고 음악이 강물처럼 흐른다. 이순신 대교의 날렵하면서
삶은 맑은 날이 지속되는 걸 지켜봐 주지 않는다. 가끔은 회오리바람을 일으켜 단내가 나도록 오열케 하고 반성할 기회를 안겨 주는 게 삶의 매력인지도 모른다. 무겁고 우울한 마음으로 맞은 아침, 또 비가 내린다. 참 구슬프게도 내린다. 하지만 어김없이 짐을 챙겨들고 우중의 산사기행을 나설 수밖에 없다. 일부러 시간을 내어 준 친구와의 동행길에 겨울비는 추적추적 쉬지 않고 따라온다. 작은 연못이 있는 식당에서 수면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을 바라보며 숱하게 밀려오는 생각의 고리를 끊고 대화를 나눈다. 거침없이 수직으로 하강하는 빗줄기처럼 단순하게 살다갈 수는 없을까. 소소한 풍경들이 쉼표가 되어 마음을 달래 준다. 선석사 가는 길은 한적하다. 겨울 안개가 들길을 헤맬 뿐, 거리도 마을도 유령의 도시처
고급 전원주택단지를 지나 작은 솔밭을 넘으면 곧바로 묘향사가 모습을 드러낸다. 빼어난 산세나 절경을 자랑하는 것은 아니지만 산책하듯 다녀올 수 있는 길이라 부담이 없다. 기온이 뚝 떨어져 제법 날씨가 찬데 상큼한 상춧잎이 반들거리며 겨울정원을 밝힌다. 절은 솔숲에 숨어서 낯선 객을 기웃거리는 바람을 무심히 쳐다볼 뿐 고요하다. 계단을 오르자 울릉도 굴피집 같은 작은 지붕을 인 하얀 콘크리트 건물이 우리를 반긴다. 예술미 듬뿍 안은 갤러리나 카페, 세련된 전원주택을 연상시키는 대웅전이다. 소박한 법당에는 높은 법상도 없고 단정한 나무문살과 창호지 사이로 배어든 햇살만 뒹굴고 있다. 모든 게 생경하고 이색적이다. 짧은 기도를 끝내고 법당을 둘러본다. 장인의 숨결이 느껴지는 다양한 종류의 연등도 아름
또 비가 온다. 올 가을은 유난히 길었고 시도 때도 없이 비가 내렸다. 단풍이 고운 오어사(吾魚寺)를 뒤늦게 떠올리며 안타까워했지만 철 지난 우중의 사찰 기행을 놓칠 수가 없다. 적당히 사색할 수 있는 한적한 고속도로와 비 내리는 호수의 풍광, 게다가 절은 고독할 만큼 조용할 게 분명하다. 비가 오는 날은 무작정 마음이 먼저 집을 나선다. 드문드문 남아 있던 단풍이 운제산을 밝히는데, 오어지(吾魚池)는 수면위로 떨어지는 빗방울만 그려낼 뿐 반영이 없다. 물가에 피어 있는 단풍이나 먼 하늘, 새로 놓인 출렁다리조차 밀어내고 묵묵히 비를 맞는다. 산은 산대로 나무는 나무대로 각각 그렇게 생각에 잠겨 묵언 중이다. 오어사는 불국사의 말사로 신라 진평왕 때 창건하여 항사사(恒沙寺)라 하였다. 신라 고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