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의 기능옷은 ‘구별 짓기’의 본능을 적극적으로 반영하여 다양한 형태로 만들어 냈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키톤(Chiton)’이라고 불리는 옷을 입었다. 옷이라고 했지만, 몸에 천을 두르는 수준에 불과했다. 그러나 당시의 기술로는 그 정도의 천마저도 생산하기가 쉽지 않았다. 지금도 생산이 까다로운 모직물이나 비단은 고대사회에서는 더욱 생산이 어려웠을 뿐 아니라 귀하고 비쌌다. 그러니 이런 옷은 한정된 일부 계층의 사람만 입을 수 있었을 것이다.로마시대 원형경기장으로 가보자. 이곳에서는 검투시합이 벌어지곤 했다. 시합이라고 했지
△돈키호테의 에피스테메‘돈키호테’(Don Quixote)는 17세기경 스페인의 라만차 마을에 살았다. 그는 당대에 유행하던 기사 이야기에 매료되어 스스로 기사 수련을 떠난다. 이 얼빠진 기사가 풍차를 거인이라고 생각하여 돌진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이런 이유로 그는 과대망상증 환자나 무모한 도전을 일삼는 사람의 대명사가 되었다.그런데 왜 돈키호테는 풍차를 거인으로 생각한 것일까? 푸코는 돈키호테를 ‘유사성의 에피스테메Episteme’와 ‘새롭게 발현되는 에피스테메’ 사이에서 방황하는 인물이라고 해석했다. 이 말은 어렵게 보이지만 사실
△최초의 발명자앞에서 공학이 시대를 앞지르는 경우와 시대적 요구와 공학이 만나는 경우를 보았다. 그런데 시대가 공학을 요구한다는 것은 무슨 말일까? 이것은 공학적 발명품이 한 개인이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았던 많은 사람의 노력에서 기인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예컨대 최초의 증기기관을 개발한 사람은 누구일까? 분명히 최초로 발명한 사람이 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최초의 발명자를 특정하기 어렵다. 증기기관을 최초로 발명한 사람으로 알고 있는 제임스 와트는 사실 증기기관을 대폭 개선하여 그 사용의 가능성을 확대한 사람이다. 와트보다 먼
△관념: 생각의 틀우리는 너무도 쉽게 생각의 틀에 갇힌다. 파란 안경을 쓰면 세상이 파랗게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생각 바깥으로 나가면 새로운 세상을 만날 수 있지만 안타깝게도 세상의 바깥은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의 바깥엔 또 다른 세상이 있을 뿐이다.우리는 저마다 사물에 대한 관념을 가지고 있다. 관념이나 개념을 그냥 대상에 대한 이미지라는 말로 바꾸어 생각하면 쉽다.사과를 떠올려보라. 어떤 사과가 떠오르는가? 누군가는 빨갛게 익은 탐스럽게 생긴 사과를 떠올릴 것이고, 어떤 사람은 연초록색의 사과를 떠올리기도 할 것이다. 우리가
영화 ‘여인의 향기’에서 프랭크는 도나가 사용하는 고급비누의 이름을 알고 있다. 그의 후각은 개처럼 예민하다. 프랭크는 당시 상류층의 생활 패턴을 알고 있으며, 여성의 성향에 대해서도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 프랭크는 능숙하다. 여자에 대해서는 물론 탱고에 대해서도 능숙하다. 도나는 미숙하다. 남자에 대해 미숙하며 물론 탱고에 대해서도 미숙하다.이들이 무대로 걸어 나오자 곧바로 음악이 뒤따라 나온다. 도나가 자신의 테이블로 돌아가기엔 이미 늦었다. 도나는 프랭크를 무대로 안내했고, 프랭크는 도나를 무대 속으로 안내한다. 프랭크는
△기술 복제의 시대사진의 초창기에 ‘라이프치히 시보(市報)’는 이렇게 썼다.“찰나적 영상을 고정해 보겠다는 것은 철저한 독일의 연구 결과가 말해주듯 불가능한 일일 뿐만 아니라 이러한 것을 해 보려는 소망부터가 이미 신을 모독하는 일이다. 인간은 신의 모습 그대로 창조되어진 것이고, 또 신의 모습은 어떠한 인간의 기계에 의해서도 고정시킬 수가 없는 것이다. 기껏해야 신의 경지에 이른 인간만이, 그것도 일체 기계의 도움을 받지 않고, 천상적 영감에 의해서 최고의 계시를 받는 순간 그의 천부적 재능의 높은 부름에 따라 신의 모습을 닮은
0.위화는 중국의 소설가다. 그는 치과 의사라고 한다. 중국의 치과 의사는 우리나라와는 사정이 달라 이를 뽑지만 다른 직업과 마찬가지의 월급을 받는다. 그 일을 하는 동안 위화는 너무 고단하고 무료했다고 한다. 그런데 길 건너의 사무실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볼 때마다 모여 이를 드러내고 잡담을 하더라고. 그래서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저렇게 하루 종일 놀아도 되는 직업이 다 있나 하고 알아봤더니 그게 다름 아닌 소설가였다고 한다. 그래서 위화도 매일같이 사람들의 이를 보는 일 대신 이를 드러내고 말을 하는 일을 하기로 결심했다고 한
11월 달에 설악산을 다녀 온 후 딱 두 달만이다. 꼭 챙겨야 할 준비물은 아이젠과 헤드 랜턴이다. 산행을 갈 때마다 하나씩은 빼먹는다. 지난번엔 아이젠을 못 챙겨서 사야했는데, 이번엔 랜턴을 빼먹었다. 열심히 충전까지 해놨는데 그걸 두고 오다니 한심하다. 다행히 같이 간 일행에게 여분의 랜턴이 있어서 산을 오를 수 있었다만, 2019년에는 덤벙대는 버릇 좀 고쳤으면 좋겠다.밤 10시 반에 만나 대절 버스를 타고 진도까지 갈 예정이다. 점찰이었나, 첨철이었나. 이것도 저것도 아니고 첨찰산(尖察山). 진도에서 제일 높은 산이라고 한다
가정방문을 오신 담임선생님은 하늘과 가까운 동네라며 웃으셨다. 우리 집은 내가 고등학교를 다니느라 읍내에서 자취를 할 때도 대학을 다닐 때에도 그리고 지금도,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 밤에도 불이 꺼지지 않는 서울이, 눈이 오면 우산을 쓰고 종종걸음 치는 이 바쁜 서울의 삶이 낯설어질 때 나는 집으로 돌아와 군불을 활활 지피고 등을 지지며 동면에 든 짐승처럼 오래도록 칩거한다.돌아가고 싶을 때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나와 달리 미륵은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생을 마감했다. (‘압록강은 흐른다’를 읽으며 이미륵 선생이 오래 알고
1. “커서 뭐가 될래?” 이 말을 다시 듣게 된 것은 20대 후반이었다. 그때 나는 대학을 졸업한 후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방황하고 있었다.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을 할 수 없었고 번번이 대학원 진학에 실패했다. 무엇을 하는지도 모른 채 삶은 조금씩 닳아가고 있었으며 그 속에서 나는 형체도 흔적도 없이 사라져 가고 있었다. 하루는 친형처럼 따르던 동네 형과 어울려 술을 마신 일이 있다. 술을 따르던 친구가 술병을 놓치는 실수를 했다. 재치있는 형은 동네 어르신이 개구쟁이들에게 한심스럽다는 듯이 던지는 말투로, “으이그, 커서 뭐가 될라카노?” 이 말이 너무 재미있게 들렸다. 우리는 더 이상 자랄 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고, 우리는 저마다 이미 무엇인가가 되어 있었거나 되어가고 있었
담배를 처음 피워본 것은 중학교 3학년 때였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나를 친구들은 의아하게 생각하곤 했다. 그래서 한 대쯤 피워줬다. 나는 담배를 피우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중학교 2학년 흡연예방캠프를 하면서 거기에서 보여준 사진들이 너무 끔찍했었기 때문이다. 나는 사내자식이 쪽팔리게 그 사진들을 보며 눈물을 펑펑 흘렸는데, 그건 담배를 피우고 있는 아버지를 생각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담배를 피우게 될 미래의 나에 대한 이른 애도였는지도 모른다. 돌이켜보면 담배를 끊고 싶어 부단히 노력한 것 같다. 대학교 1학년 때부터 말이다. 부모님이 담배 피우는 것을 그것도 아버지가, 대단한 흡연가였다가 금연을 하신 뒤로 더욱 담배의 무익함을 소리 높여 이야기하셨고, 그래도 담
△놀이 하위징아는 놀이의 규칙을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놀이 파괴자는 놀이를 잘못하거나 놀이를 속이는 자보다 죄질이 더 무겁다. 왜냐하면 놀이를 속이는 자는 아직도 게임을 하고 있는 것처럼 시늉하면서 겉으로는 마법의 원(놀이를 유지하는 규칙)을 여전히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놀이 파괴자는) 게임에서 벗어나 버림으로써 그는 자기와 다른 놀이꾼들이 일시적으로 만들어낸 놀이 세계의 상대성과 취약성을 폭로한다.”(“호모 루덴스”) 하위징아는 놀이를 속이는 자와 놀이를 파괴하는 자를 비교하면서, 놀이 파괴자의 죄질이 더 무겁다고 말한다. 문제는 이런 주장의 근거가 없다는 것. 다만 하위징아는 놀이는 규칙을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놀이의 규칙은 유지되어야 한다는 (수정되어야 할) 전제
어느 비평가의 말처럼 이 정도라면 ‘시를 통과한 소설’(신형철)이라 부를 만하다. 그럴 때마다 마루엔 괴괴한 적막이 빈 항아리처럼 도사리고 앉았다 사라지곤 한다(169면). 빛 한 점 없는 새까만 내가 몹시도 서글펐던 것이다.(175면) 하늘에서 신발이 매우매우 떨어져요?(192면) 신발도 없이 밖에서 밤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려온다.(194면) 이것은 ‘빛의 걸음걸이’(윤대녕 ‘반달’, 문학동네)에서 따온 문장들이다. 최소한의 언어로 어떤 사건 전체를 강렬하게 꿰뚫어버린다. 시가 함축적인 이유는 이 때문이다. 시의 무기인 이미지를 윤대녕은 시인만큼이나 잘 다룰 줄 안다. 이런 문장도 있다. “맞선을 본 자리에서 여동생은 꼭이 입양되는 아이처럼 결혼에 응했다고
1988년은 문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해다. 왜냐하면 이 해에 “납월북 작가의 작품에 대한 해금 조치”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월북을 했거나 납북이 된 문인을 가르칠 수도 없었고 작품을 읽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1988년 이전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사람들은 이기영, 박태원, 김남천과 같은 소설가와 정지용, 김기림, 백석과 같은 시인에 대해서는 배우지 못했다. 그런 세월이 있었다니 정말 수상한 시대였다. 이 때 해금조치 된 120여 명에 달한다. 이런 시인 중에서도 정지용은 단연 돋보이는 시를 썼다. 정지용은 1902년 충청북도 옥천에서 태어났고 1950년 9월 납북 도중 폭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휘문고등보통학교 학생 시절에 요람동인으로 활동하였고, 일본 교토의 도시샤 대학 영문과를 다녔으
△난해시의 난해함 심지어 말라르메는 시를 써놓고 일부러 의미를 알 수 없도록 고쳤다고 한다. 말라르메가 시를 어렵게 쓴 이유, 그러니까 말라르메가 난해시를 쓴 이유는 아마도 모름을 모르는 채로 남겨두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순수한 모름’ 이것은 한 시인의 바람에 그치지 않는다. 많은 시인들은 아무도 해독할 수 없는 난해시를 한 편 남기고 싶어한다. 왜일까? 그 이야기를 하려면 먼저 앎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한다. 우리가 안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 안다고 여길 뿐 온전한 앎일 수는 없다. 예컨대 우리가 말하는 사랑은 사랑의 한 국면이거나 일반화된 사랑이다. 우리가 사랑이라고 알고 있는 것은 사랑의 개념이지 그것이 곧 사랑은 아니다. 규정된 사랑은 특수하고 개별적인 (당신의) 사랑 앞에서 그 효력을 잃
카렌 암스트롱의 ‘신화의 역사’는 신화가 어떻게 변해왔는가를 말하고 있다. 그녀에 따르면 구석기 시대의 신화는 초월성과 타성의 본질 그 자체라 할 수 있는 ‘하늘’에 대한 숭배였다. 그러나 인간이 하늘에 영향을 미칠 수 없고, 하늘 역시 인간에게 그 무엇도 원하지 않는 것과 같이, ‘하늘신’은 인류와 괴리되어 있다. 평범한 인간의 삶에 관여할 수 없는 초기 신화는 결국 실패하고 만다. 농경 사회를 이룩하였던 신석기 시대 사람들은 대지의 신을 섬겼다. 여신은 부드럽고 인자한 신이기보다는 무자비하고 광포한 여신으로 등장한다. 이것은 농업이 끊임없는 싸움이나 치열한 고투의 과정이었기에 그러하였을 것이다. 당대의 사람들은 이러한 신화를 통해 고통스럽고 충격적인 죽음의 얼굴을 직시할 수 있었으며, 이를 감내하
중학교 땐 그랬다. 영어나 한문 문제를 풀 때는 특히 더 그랬다. “야, ‘미래’가 어떻게 ‘완료’되냐?”(김애란, ‘도도한 생활’, 31면)는 그나마 양반이었다. 어떨 때 ‘have’를 쓰고 또 어떨 때 ‘has’를 써야 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문제집을 들여다 봤자 몽롱했다. 해도 꿈은 씩씩했다. 헌데 이런 몽롱함을 십 수 년이 지나 다시 느끼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우여곡절 끝에 대학원엘 들어갔을 때는 이미 서른이었다. 남들보다 조급했다. 2년 안에 석사를 마치고 박사과정에 진학하는 것, 그런 생각이 제멋대로 자라나 목표가 되어버리더니, 어느 틈에 물리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당장 지구가 끝장이라도 될 것 같은 강박에 시달렸다. 하지만 논문이라는 놈은 여간 성가신 것이 아니
△이중사고 조지 오웰의 유명한 소설 ‘1984’에서는 ‘이중사고’에 대해서 설명하는 부분이 나옵니다. 그 부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윈스턴은 양팔을 축 늘어뜨린 채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의 생각은 이중사고의 미궁 속으로 빠져들었다.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것, 진실을 휜히 알면서도 교묘히 꾸민 거짓말을 하는 것, 철회된 두 가지 견해를 동시에 지지하고 서로 모순되는 줄 알면서 그 두 가지를 동시에 믿는 것, 논리를 사용하여 논리에 맞서는 것, 도덕을 주장하면서 도덕을 거부하는 것, 민주주의가 아닌 줄 뻔히 알면서 당이 민주주의 수호자라고 믿는 것, 잊어버려야 할 것은 무엇이든 잊어버리고 필요한 순간에만 기억에 떠올렸다가 다시 곧바로 잊어버리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그 과정 자체에다 똑같은 과정을
1. 나는 숱한 ‘나’들로 이루어져 있다. 전 부인을 여전히 사랑하지만 오늘은 술이 취해서 아무나와 사랑을 하고 싶은 것도 ‘나’다. 운영체계인 사만다가 8천316명과 동시에 대화하고 841명과 동시에 사랑한다는 것은, 분열되어 있는 ‘나’의 극단적 표상이 아니겠는가. 2. 아무리 ‘나’가 많더라도 나는 어떤 상황에서 특정한 패턴을 보이게 된다. 사만다가 테오도르를 책처럼 읽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인공지능 컴퓨터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3. 상대가 ‘나’를 읽을 때보다 내가 ‘나’의 패턴을 읽게 될 때 문제는 심각해진다. “가끔씩은 그런 생각이 들어. 난 앞으로 내가 느낄 감정을 벌써 다 경험해버린 게 아닐까, 그리고 여기서부터는 앞으로 쭉 새로운 느낌은 하나도 없게 되는 건 아닐까,
1.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친구 재식이는 발령이 나기를 기다리며 집에 머물렀다. 그 때가 4월쯤이었으니까 내가 방학하기까지 두 달 정도를 고스란히 혼자 집에서 보낸 셈이다. 원체 조용한 친구였는데, 술을 마시기 전부터 녀석은 들떠 있더니 술기운이 돌자 더 수다스러워졌다. 공무원이 된다는 게 좋긴 좋구나, 했더니만 그게 아니었나보다. 부산에서 공부를 하다가 시골의 집으로 돌아온 녀석은 처음엔 조용하고 아늑했다고 한다. 그게 딱 두 주 가더란다. 그 후로는 단조로운 일상 속에서 무료해졌다고. 낮에는 논이든 담배 밭이든 일거리라도 있지만, 밤에는 아홉 시만 되면 불이 꺼진다. 그때부터 고요가 쌓이기 시작해서 적적해지고 막막해진다. 그 적막이 낯설어 잠이 들 수 없게 되면 동네 주위를 어슬렁거리게 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