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의학수준이나 구료 대책이 역병에 매우 무력했기에 주민 90% 이상이 살기 위해서는 타 지역으로 대피했다. 한양에서 역병이 돌면 한성부가 역병환자나 죽은 주검을 적발해 성 밖으로 격리시키는 조치를 취했고 혜민서나 동서활인원에서 역병으로 굶주린 이들을 보살폈다. 하지만 후기로 오면서 이 활인원의 의관들은 태만했고 약을 횡령하기 바빴기에 제대로 운영되지 않다가 결국 1882년에 사라졌다. 당시 극성을 부리던 역병으로는 두창(痘瘡), 콜레라, 장티푸스, 이질, 홍역 등으로 가장 피해가 큰 것은 두창과 콜레라였다. 질병사(疾病史)에
한반도에서 역병의 최초 기록은 백제 온조왕 4년(BC15년)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전염병은 조선 후기 이르러 더욱 많이 유행하여 7세기 중반부터 19세기 중반까지 인구를 감소시키는 가장 큰 요인이었다.역병은 역신(疫神)이 사람에게 붙어 괴롭히다 데려가는 것으로 생각했기에 이 귀신을 복숭아 나뭇가지로 때리거나 불을 이용해 겁주어서 쫓아내는 방법인 축귀(逐鬼)와 달래서 귀신을 떼어주는 ‘굿’과 ‘여제(祭)’ 가 시행되었고, 더 큰 신령의 도움을 받아 벗어나는 방법으로 장승이나 성황당 등에 비는 방식이 예방과 치료의 수단으
우리가 사는 이 사회의 시스템의 핵심 동력은 탐욕이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은 탐욕 덕분에 첨단기술 등을 개발했지만 바로 그 탐욕 때문에 도덕을 무시하기도 한다. 신이 아니고서야 사람에게는 양면의 모습이 존재한다. 즉 ‘예의바른 나쁜 인간’이다. 과일을 아무리 얇게 잘라도 그 반대 면이 있는 것처럼 인간의 이중성도 여기에 해당된다. 다만 자신의 신앙과 양심 그리고 도덕정신에 따라 선과 악 중 어느 부분이 크게 될 수 있어 나머지 한쪽을 제어하게 되는 것이다. 인도 신화에 ‘아수라’ 라는 신이 있다. 어느 날 자기 여동생을 희롱하던 ‘
‘승정원일기’ 영조 7년 2월 27일의 기록을 보면 ‘새 법을 세우지 말고, 옛 법을 바꾸지 말라.’고 적혀있다. 영조 7년 2월 27일 경상도 암행어사 이흡은 자신이 둘러보았던 고을 중 재해가 가장 심한 고을의 상황을 임금에게 아뢰면서 고을 현감이 백성들을 진휼하기 위해 감영(監營)에서 빌려와 쓴 돈은 공적으로 쓴 것이니 규정을 조금 고쳐서라도 그 일부를 관찰사가 탕감해 줄 수 있게 해달라고 건의하였다. 그런데 이 자리에 함께 입시한 우승지 조명신은 이 건의를 반박하며 탕감 받는 사례가 늘어나서 새로운 규례가 된다면 나중에는 재정
양두구육은 양 머리에 개고기라는 뜻이다, 겉과 속이 다른 속임수를 꼬집는 말이다. 이 고사성어의 배경은 춘추시대 제나라 영공이 궁인들 가운데 잘생긴 여자들을 뽑아 남장을 시키고서 그 모습을 바라보며 즐거워하는 괴상한 취미에서 비롯되었다. 궁궐의 소문이 널리 퍼지자 백성들 가운데 예쁘다는 여자들도 모두 남장을 했다. 그러자 영공은 대궐 밖 여인들에게는 남장을 금한다고 포고령을 내렸다. 그래도 금령이 잘 지켜지지 않자 재상인 안영을 불러 그 까닭을 물었다. 안영이‘왕께서는 지금 궐내의 여인들에게는 남장을 시키시면서 궐 밖의 여인들에게는
13세기에 남러시아에 성립한 몽골왕조를 금장한국(金帳汗國)이라 한다. 칭기즈칸의 손자인 바투는 몽골 서정군의 총수가 되어 러시아 및 동유럽과 남러시아를 장악해 킵차크한국의 기초를 구축했다. 1347년 무렵 이 킵차크 군대가 제노바 시를 향해 페스트 환자의 시신을 쏘아 보냄으로써 유럽에 페스트를 전파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설이다. 그러나 이전부터 동방 원정에 나섰던 십자군 병사들이 보석과 동방 문화를 약탈해 오면서 부수입으로 나병과 흑사병을 얻어 왔다는 것 또한 정설이다.그때부터 순식간에 퍼져나간 흑사병은 불과 수년 동안 이탈리아, 영
세습(世襲)은 신분이나 재산, 생활양식 및 각종 규범 등이 혈연이나 지연에 의하여 다음 세대로 전수되는 행위를 말한다. 우리나라 왕조사회에서는 세습이라는 말을 그 대상에 따라 여러 가지로 표현하여 왔다. 왕권세습 경우에는 정치적, 법률적 용어에 한정하여 사용되어 왔으며 재산세습은 특별히 상속(相續)이라는 말로 표현했고, 학문이나 기예의 세습은 사사(師事)라는 용어가 널리 쓰였다. 이처럼 다양한 의미들을 담은 포괄적인 생활언어로는 대물림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경국대전, 예전편(禮典篇) 노비토전사패식조(奴婢土田賜牌式條)’에는 왕이 공
공(公)이란 글자는 본래 ‘사(私)를 나눈다’는 뜻에서 비롯됐다. 그리고 사를 나눈다는 말은 바로 가난을 같이 한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개인적인 욕심을 버리고 여러 사람과 어려움을 같이하는 것이 바로 공적인 행동이라는 풀이로 해석되며 거둬들인 국민 세금으로 생활하는 모든 공무원을 공인이라 하는 것이다.여씨춘추를 비롯한 중국의 여러 고전에 인사 원칙으로 이런 기록이 실려 있다. ‘공직을 추천하는데 밖으로는 원수를 피하지 않고, 안으로는 친척을 피하지 않는다. 원수를 배제하지 않았고 아들이라고 피하지 않았으니 기황양이야말로 대공무사(大
정치세력 간 갈등은 동서고금 어디에나 있다. 그럼에도 조선후기의 당쟁과 세도정치가 유독 거센 비판을 받는 데엔 그 이유가 있다. 왜란과 호란이라는 큰 전쟁의 와중을 겪은 후에도 지배층은 국가나 백성은 안중에도 없이 그들의 영욕만을 위한 권력다툼을 벌인 탓이다. 이러한 지도층의 갈등은 반대를 위한 반대가 일상화됐다. 조선후기 국왕의 위임을 받아 정권을 잡은 특정인과 그 추종세력에 의해 행해지던 세도정치는 사회변화를 바탕으로 한 조선의 전통적 지배체제가 전반적으로 한계를 드러내자 마지막으로 도달한 정치운영의 한 형태였던 것이다. 조선후
공자는 제자들과 일찍부터 춘추오패의 하나였던 제나라 환공의 묘당을 찾았다. 묘당 안에 들어서자 한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는 쓸모없는 술독이 바로 눈에 띄었다. 이 술독을 반기는 공자를 보고 그의 제자들이 의아해하자 제자들에게 술독에 물을 채우도록 시켰다. 물이 반쯤 이상 차오르자 신기하게도 비스듬했던 술독은 바로 섰고, 물이 점점 더 가득 차자 다시 비스듬히 기울기 시작하더니 이내 엎어지고 말았다. 이 독이 제나라 환공이 항상 의자 오른쪽에 두고 가득 차는 것을 경계하며 나라를 다스렸다는 술독이다. 일명 좌우명(座右銘)이라고도
빛나는 문화와 풍요로운 경제력을 자랑했던 송나라 태조 조광윤은 백성을 위한 모범적인 정치를 위해 ‘언론으로 인해 죽는 사람이 없도록 하라’라는 유훈을 남겼다. 왕이 간신의 아첨에만 빠져 있으면 올바른 정치를 할 수 없으며 결국 망국으로 치닫는다. 귀에 거슬리는 말을 했다는 이유로 피해를 입게 되면 어느 누가 나라를 위해 바른 말을 하겠는가.송 태조가 언로(言路)를 보호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조선의 건국 주체들의 생각엔 언로의 보장은 그들의 이상에 매우 적합한 제도였고 언관(言官)제도의 강화를 위해 왕명과 정책에 직접 간쟁을 담
춘추시대 위나라 혜왕은 백성 수 증가를 바탕으로 부국강병을 위해 노력했으나 별 효과가 없자 맹자한테 그 원인을 물었다. 이에 맹자는‘전장에서 전쟁이 한창일 때 한 병사가 갑옷과 투구를 던져 버리고 도망을 쳐서 백 보쯤 가서 멈추었습니다. 또 다른 병사는 오십 보쯤 도망치다가 멈추어서 백 보 도망친 사람을 겁쟁이라고 비웃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혜왕은 ‘오십보나 백보나 도망친 것은 마찬가지가 아니요?’이에 맹자는 ‘그것을 아신다면 이웃 나라보다 백성이 많아지지 않는다고 한탄하지 마십시오.’라고 말했다. 결국 혜왕이 흉년이 들
조선시대는 토지에 세금을 부여하는 것이 국가의 가장 큰 재원이었다. 건국 초기에는 손실답험법(損失踏驗法)이라 하여, 풍·흉년을 직접 조사하여 세금을 매겼으나, 토지를 조사하는 관리들의 성향에 따라 좌우되었기 때문에 문제가 많아 세종시대 역시 과세기준에 고민이 있었다. 이에 임금은 공법(貢法)이라는 새로운 세법을 마련했다. 공법이란 국가가 수취하는 토지세의 한 제도로서, 수년간의 수확고를 통산하여 평년의 수익을 정해진 비율로 삼아 세금을 매기는 제도였다. 세종 12년의 ‘세종실록’ 기록을 보면 세종은 공법 결정 이전에 과거시험에 공법
조선의 중종 시대는 연산군 시절의 잘못된 정책과 사회풍속을 바로잡으려는 시기였다. 이 시기에 조광조는 도학정치의 실현을 위해 사림을 천거하여 인재를 등용하는 현량과를 주장하며 사림 28명을 선발했다. 또한 중종을 왕위에 오르게 한 정국공신(靖國功臣)들의 공을 삭제하는 위훈삭제 등 개혁정치를 서둘러 단행하다가 사흘 후 반발한 훈구세력에 의해 기묘사화가 일어나 이 개혁정책은 무산되고 한 달 만에 사사됐다. 후일 율곡 이이가 경연일기(經筵日記)에서 조광조를 평가한 내용은 오늘날 위정자들이나 관료들은 귀담아 들을만하다.‘옛사람들은 학문이
맹자는 공자의 사상을 체계화하고 학문으로 성립시킨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맹자가 내세운 천심(天心)에 대해 공자는 ‘민심이 곧 천심이니 민심을 얻은 자가 천심을 가진 자’ 라고 정리했다. 맹자 역시 왕조는 천명에 의해 일어나며 천명(命)이 바뀌는(革) 것이 곧 역성혁명(易姓革命)이라 했다.이 혁명론은 민본주의와 직결되며 혁명의 주체는 엄격한 도덕성과 정의가 요구된다. 고려 말 목은 이색의 문하인 정몽주는 시경(詩經)의 이념을 바탕으로 고려왕조를 유지하면서 개혁을 하려는 온건파인 반면, 동문수학한 정도전은 서경(書經)의 정치이념과
단식은 건강이나 항의 표시를 할 때 동원되는 행위이다. 의학계에서는 단식을 대체로 에너지 섭취를 1일 200㎉ 미만으로 정의한다. 대략 커피믹서 4개 먹는 정도이다. 만약 저항의 의미로 단식한다면 72시간 이상이 필요하며 이때는 물 이외 다른 것(소금은 예외)은 입에 대서는 안 된다. 단식에서 중요한 것은 72-72(72시간-72일)법칙이다. 의학적으로 72시간 가량 굶으면 체내 포도당이 모두 사용돼 인체는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뼈와 근육, 장기 등에서 에너지를 모두 빼앗아간다. 학자들이 단식의 한계를 72일로 보는 경우는 대부분의
지식의 축적이 인격의 성장과 비례하지 않는 것이 사회의 현실이다. 배움이란 현실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실천적 지식으로 활용돼야 가치가 있으며 이 지식이 선(善)쪽으로 사용돼 사물의 이치나 도리를 깨닫고 상황에 현명하게 대처할 때 지혜라 한다.캐나다 출신의 사회인지학습이론의 창시자인 반두라는 사회학습이론에서 특정 행동에 대한 직접적인 강화보다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관찰하고 모방함으로써 사회적, 인지적 행동을 배우고 좀 더 효율적인 학습이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즉 사람의 성장과정 속에는 역할모델이 있다. 이 역할모델은 아이가 성장하면서
인조실록(仁祖實錄)에 ‘왕이 하교하였다. 옛날에 은(殷)나라 임금 수(受)가 극악무도하였지만 삼인(三仁)이 떠나버리고 나서야 나라가 망했다. 이를 보면 나라에 어진 이가 존재하는 것은 물고기에게 물이 있고 가뭄에 비가 내리는 일에 비유할 정도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세 사람의 어진 이는 은나라 왕 주의 이복형 미자와 종실인 비간 그리고 기자를 가리킨다. 인조반정 후 집권한 서인정권은 반정에 대한 부정적 여론을 잠재우고 정국을 안정시키기 위해 남인계 인사 이원익(1547∼1634)을 영의정으로 발탁했다. 이원익은 인조의 부름
지난 2010년 오세훈 서울시장 시절에 발가벗은 어린이가 주요 부위를 식판으로 가리고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을 무상급식 광고포스터를 만들어 논란이 됐다. 당시 서울시에서 만든 이 포스터는 전면무상급식을 강행하면 학교보건시설 확충, 저소득층 급식비지원 등 실질적으로 필요한 교육현장 예산을 삭감할 수밖에 없다는 취지로 만들었다. 하지만 어린이 모델을 나체로 기용한 것에 문제가 일자 해명에 나섰고, 해당 사진은 얼굴과 몸이 합성 사진이었음이 드러났다. 당시 무상급식에 찬동하는 네티즌들은 해당 포스터 얼굴에 오세훈 시장 얼굴을 합성
영조(1694∼1776)가 스스로를 반성하는 한편 세자를 가르칠 목적으로 유교경전과 역사서에서 수신과 위정에 관련된 내용을 주제로 자신의 견해를 기록한 책으로 어제자성편(御製自省編)이 있다.이 책에서 영조는 수신의 요체를 마음을 다스리는 것으로 보았고, 위정의 요체를 기미(幾微)를 살피는 것으로 보았다. 기미를 살핀다는 것은 선악이 나뉘는 조짐을 살핀다는 것으로 선한 인재를 변별하고 등용하여 국가를 다스리는 바탕으로 삼는다는 의미이다. 영조는 젊은 시절부터 노론과 소론의 격렬한 당쟁을 목도하였고, 왕세제(王世弟)가 되어서는 충신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