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국수를 싫어했다. 첫애를 갖기 전까지 그랬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임신을 하자 국수가 자꾸만 먹고 싶었다. 국숫집 순례를 다녔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동빈동에 있는 여러 색깔의 면을 파는 칼국수 집이 단골이었다. 그걸로 부족해 남편이 퇴근길에 한일 냉면에 들러 매콤한 비빔냉면을 포장해온 것만도 여러 번이었다.남편 말로는 돌아가신 시할머니가 하루 두 끼 정도 면을 드셨다 한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것이 라면이라고 할 정도로. 배 속에 아이가 할머니 식성을 닮았던가 보다. 그 아이가 지금 청년이 되었고 면을 여전히 즐긴다. 나는 임
현관문 앞에 동서가 귤 한 봉지를 두고 갔다. 결혼해서 남편과 함께 덤으로 얻은 것. 시월드이다. 그중에 제일 고마운 존재가 동서이다. 내가 시집가서 십 년이 지나도록 시동생이 독신이어서 동서 구경을 못 하다가 뒤늦게 맞은 식구이다.나와 나이 차가 많이 난다. 그런데도 내게 잘 맞춰주며 시댁에 적응을 잘해주었다. 그래도 신세대답게 내가 바꾸지 못하던 것들도 웃으며 자연스럽게 만들어버렸다. 아버님 앞에서 눕는다던가 바닷가 시댁에선 먹지 않던 배추전과 솎아낸 푸성귀로 만든 겉절이도 슬쩍 밥상에 올려놓았다. 나는 조심스러워 어머님이 하라
할머니가 조를 추수하고 있다. 창 넓은 밀짚모자를 쓰시고 동그마니 앉아서 조 이삭을 말려 두드리고 있다. 가까이 가 보니 손에 든 것은 법주 빈 병이다. 그 모습이 재밌어 옆에 앉아 이것저것 여쭈었다. 이거 떨어서 뭐 하실 건지, 자식들 오면 준다기에 자식은 몇이나 되는지, 얼마나 자주 오는지 묻자, 좋은 회사에 다닌다며 자랑도 하셨다.친구 아들이 주말에 에버랜드를 다녀왔단다. 사진을 보니 신난 표정이다. 그런데 돌아다니다 용돈을 잃어버렸단다. 에고, 아까운 거, 얼마나 속상했을까. 내 어릴 적 그날이 떠오른다. 할아버지 삼촌이 집
길을 걷다가 시골 마당의 햇살 좋은 바람에 나부끼는 빨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마당의 이쪽과 저쪽을 가로지르며 이어주는 빨랫줄과 바지랑대의 모습은 미덥고 평화로운 풍경 그 자체다. 비 온 뒷날의 빨랫줄에는 어김없이 형형색색의 온 식구가 가득 널린다. 그런 삶의 중심에는 언제나 어머니가 있었다.빨랫줄 없는 마당은 있어야 할 어머니의 향기가 빠진 듯 왠지 허전하고 쓸쓸하다. 가족을 이어주는 탯줄 같은 빨랫줄, 힘겨움을 참으며 입을 꽉 다문 빨래집게, 모든 것을 내어주는 헌신적인 사랑으로 가족을 곧추세우며 중심을 잃지 않는 바지랑대는 영락
퇴근길이었다. 감포 고갯길을 막 들어서는데 늙수레한 산골 아저씨가 팔을 흔들며 차를 세웠다. 가까이서 보니 늦가을 바람에 몸을 움츠렸다. 금방 날이 어두워지겠다 싶어 차 문을 열었다.그는 타자마자 무안할 정도로 굽실굽실 거리며 인사를 했다. 요 고갯길 너머 동네에 산다면서 들통 하나를 발 사이에 놓고 양발로 꽉 잡았다. 이곳에는 버스가 자주 없어서 가끔 지나가는 차를 세워서 신세를 진다고 했다. 만약에 타고 가다가 사고라도 나면 절대로 책임을 안 지게 한다며 묻지도 않은 일에 손사래를 치면서까지 설명했다. 나는 미소로 대답했다. 이
칼융의 심리학에 따르면, 무의식의 세계는 집단무의식, 즉 여러 원형(Archetype)들로 구성되어 있다. 원형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행동 유형이며, 신화와 종교의 원천이기도 하다. 여러 원형들 중에는 아니마(Anima)와 아니무스(Animus)가 있다. 아니마는 남성의 무의식 속에 있는 여성적 요소이고, 아니무스는 여성의 무의식 속에 있는 남성적 요소이다. 예를 들면, 남성의 마음에 ‘아니마’의 원형이 작용하는 경우, 그 남성은 꿈에 아름다운 여성의 모습을 보거나 매혹되거나 한다. 혹은 여성의 사진이나 회화 또는 실재의 여성에게
좋은 글이나 마음에 와 닿는 시를 공유하고, 서로의 생각을 나누는 마음 따뜻한 오랜 친구가 있다. 그 친구와 나는 류시화 작가가 최근 엮은 ‘마음챙김의 시’라는 책을 읽으며 어떤 시가 나에게 왜 와 닿는지를 이야기하였다. 친구는 중학생이 된 아들에게도 가장 마음에 드는 시를 선택해서 엄마에게 낭독을 해달라고 하였는데, 그 낭독한 음성파일을 내게 보내 왔다. 이제 막 변성기가 온 아이의 목소리에서 들리는 시는 ‘눈풀꽃’이라는 시였다. 겨울이 채 끝나기 전 이른 봄에 피는 수선화같은 흰색꽃이다.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내가 어떠
떨켜를 준비하는 나무에 가을바람이 분다. 어쩔 수 없이 남은 잎을 떨구고 새잎을 준비하는 자연의 섭리란 우리의 인연들과도 닮아있는 것 같다. 지난 여름은 소란과 정적 속에서 한 시절이 갔다. 어찌 됐건 만인이 그리워하는 가을의 초입에서부터 나는 지금 추녀가 되고 싶어 설레고 있다. 어느 해 보다 길고도 지루한 여름날이었다. 그동안 보지 못하고 만나지 못했던 지난 계절의 꽃들과 사람들. 어쩌면 시절인연일 수도 있지만 그들의 존재를 기다리며 벌써부터 기쁨에 젖는다. 그들과의 해후는 설레면서도 얼마나 소망하고 갈망한 시간들이었나 생각해
우리 집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동네 체육관이 있다. 이름하여 Mitchell Field Community Center이다. 오후 5시경, 걷기 운동을 하러 갔다. 초가을답지 않은 차가운 기온이라 실내에서 걷기로 하고 체육관에 간 것이다. 아래층 농구 코트에서는 고등학생 정도의 학생들이 무리 지어 농구 연습을 하고 있었다. 2층 워킹트렉에는 열심히 돌고 있는 여인들 대여섯 명이 보였다. 남자는 나 혼자였다. 전광판의 시계를 확인하고 걷기 시작했다.나보다 빨리 걷는 이들도 있고 나와 비슷한 속도로 걷는 이들도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누군가 내게 언제부터 독서에 대한 취미를 붙였느냐고 물어본다면 내 대답은 이러하다.먼저 독서는 나에게 취미로 시작한 것이 아니었다. 초등학교 때 독서 감상문을 써오기 위한 책 읽기였으니 말이다. 매번 검사 받아야 하는 숙제라 여기니 재미있다거나 신나는 일은 더욱 아니었다.생각해보면 언제부터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린 시절 엄마가 자주 쓰시던 부모님전상서를 의미도 모르면서 읽은 것이 그 시작이었을 거라고 얼버무리고 말 성싶다.분명한 것은 이런 일들이 학기 초 교과서 읽기로 이어졌다. 이렇게 책을 가까이 하며 사십이 넘은 지금까지 살고
끝이 보이지 않는다. 지난 겨울에 몸을 움츠리게 하던 찬바람과 함께 뜬금없이 찾아온 불청객은 봄이 지나고 여름을 거쳐 가을이 다 지나도록 떠나지 않고 지척에서 맴돈다. 듣지도 못했었고, 보지도 못했었고, 생각지도 못했던 고약한 그놈과의 불편한 동거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그 끝은 보이지도 않는다.떠나보내야만 하는 절체절명의 이유가 분명한 그놈이다. 가까이해서는 절대 안 되는 생존의 위기를 초래하는 그놈이다. 떠날 조짐조차 보이지 않는 참 끈질긴 그놈이다. 먹고 살기 위한 최소한의 일상마저 앗아간 몹쓸 그놈이다.학교에 가고 싶은 학
나는 요양병원 간호사입니다.코로나 시대에 항상 감염의 중심에 서 있는 것같이 방송에 나오는 위험지역에 근무합니다. 그러나 제가 생각하는 요양병원은 청정지역입니다.갇혀있는 섬이라고 할까?외부인의 출입이 통제된 곳으로 직원이 바깥에서 옮겨오지 않으면 절대 코로나가 발생할 수 없는 곳입니다.그러나 외부에서 잘못 옮겨온 병원균으로 인해 치명적인 결과가 발생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그래서 직원들은 더 조심하고 경계하고 통제합니다.요양병원에서 근무하는 간호사는 육체적으로 심적으로 극한 직업입니다.아니 정말 힘든 사람은 요양병원 환자일지도
공간을 둘러막기 위해 흙이나 돌, 벽돌 등으로 쌓아 올린 것을 담이나 벽이라 한다. 영역을 보호하고 표시하기 위한 수단으로 벽을 만들기도 하고 독립된 공간에서 외부와 단절의 안식을 갖고자 하는 목적도 있다. 종종 아주 미련하여 어떤 사물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을 비유하여 담벼락이라 하기도 한다. 담에 대한 보편적 인식이 꽉 막히고 답답하니 그렇게 비유된다. 이렇듯 담벼락은 자신을 보호하기도 하고 영역을 표시하기도 하지만 자의에 의한 단절과 고립의 용도이기도 하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원초적인 본능을 최대한 잘 나타내는 것이 담
꽃을 키우다 보면 항상 먼저 꽃망울을 터트려 기쁨을 주는 아이들이 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다른 애들이 한창 필 때쯤엔 처음에 핀 꽃들은 시든다. 당연한 결과이리라. 처음 보여준 고마움에, 미련에 시들어 가는 꽃대를 그냥 두면 꽃나무도, 시든 꽃도 피우려고 기다리고 있는 아이들도 모두 힘들어진다. 그래서 부지런히 시든 꽃을 잘라줘야 한다.사람 관계도 마찬가지이리라. 친구 H의 아들이 여자친구랑 헤어지고 1년 넘게 슬퍼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말을 들은 나도 가슴 아픈데, 지켜보는 엄마는 얼마나 속이 시릴까?살다 보면 꽃 피지
아주 오래전에 돌아가신 외할머니는 이가 몇 개 없으셨다. 내 기억에 할머니는 입술 밖으로 살짝 튀어나온 아래 송곳니 하나와 그와 비껴 달려 있는 윗니 두 개가 잇몸에 남아 있으셨다. 그런데 나는 모든 이가 멀쩡한데도 애늙은이란 별명처럼 딱딱한 음식은 잘 씹지도 못하고 좋아하지도 않았는데, 그런 내게 할머니는 사과를 깨끗하게 씻은 후 껍질째 사과를 반 쪼개서 할머니의 왼손바닥에 사과를 얹어 쥐시고는 밥숟가락으로 사과를 긁어주셨다.그렇게 숟가락으로 긁어주셨던 사과는 어찌나 달고 잘도 넘어가던지, 사과 반쪽이 순식간에 내 입속으로 꿀떡꿀
얼마 전 지인에게서 연락이 왔다. 남편과 외출하고 돌아오는 길에 멋진 노을을 보았다고. 그 자리에서 차를 세우고 노을을 보고 싶었지만, 배고픈 남편이 차를 세우지 않고 통과해버려 아름다운 노을을 놓치고 말았다고.문득 호주에서 살 때가 생각났다. 아침에는 학교에 다니느라 도시락 싸서 종종걸음으로 바쁘게 다녔었고, 주말에는 나를 먹여 살리느라 새벽에 나가서 밤늦게 돌아왔다. 그래도 평일 오후에 집 근처 달링하버에서 산책을 할 때면 노을 지는 풍경을 가끔 바라보곤 했었다. 붉은 해가 뒷걸음칠 때면 그리운 가족들, 보고픈 친구들을 생각하면
남편은 몇 년째 대장내시경을 했다. 검사를 할 때마다 암탉이 알 품듯 노른자가 올망졸망 붙어 있었다. 매달린 혹이 해마다 조금씩 줄어들고는 있으나, 무슨 자신감인지 이번 검사가 마지막이 될 거라며 호언장담했다. 검사를 앞두고 자신만만해하는 모습을 보니 내 마음이 가벼웠다.아침에 흰죽을 끓였다. 내시경 검사 전날의 식사는 묽은 죽이었다. 쌀을 씻어 죽을 쑤는데 팔이 저렸다. 꾀가 살살 났다. 네이버양에게 물으니 간단하게 대안을 제시했다. 밥을 지은 후에 쌀뜨물을 부어 다시 끓였더니 시간도 단축되고 팔도 아프지 않았다. 일은 닥치면 요
나는 모임이 여러 개다. 글 쓰는 모임에 독서토론모임이 셋, 대학 동기 모임, 남편 대학 동문 마누라 모임도 있다. 매월 둘째 토요일에 만나는 대학 동기 모임을 오늘 했다. 멤버는 여덟 명이다. 수연이를 빼면 모두 언니들이다. 17살 많은 언니부터 한 살 위 언니까지 나이도 다양하다.H 언니는 악기를 배워 봉사활동을 다니고 어린이집도 일도 하며 아이를 셋이나 어여쁘게 키웠다. 피아노 학원을 운영하는 Y 언니는 늘씬한 키에 늘 같은 몸매를 자랑하는 어여뿐 여인이다. 내가 그녀를 만나는 동안 한 번도 남의 흉을 보는 걸 보지 못했다.
경계는 기준에 의해 양분되는 한계이며 끝과 시작을 연결하는 변화의 기준이기도 하다. 흐름이 중단된 경계에서는 방향을 결정해야만 하는 긴장감의 순간이 된다.우리는 일상에서 수많은 경계에 선다. 밤과 낮의 경계에서 힘겹게 눈을 떠야 하고, 아침과 오전의 경계에서 일터로 갈 채비로 분주해진다. 집과 직장의 경계에서는 늦지 않기 위해 어느 길로 가야 하나 고심하고, 오전과 오후의 경계에서는 점심 메뉴를 무엇으로 할까 고민한다. 오후와 저녁의 경계에서는 술 한잔의 유혹에 빠지고, 일과 삶의 경계에서는 항상 워라벨(일과 삶의 균형·Work-l
흥해 새말리 논 한가운데 ‘참샘’이라는 곳이 있다.여름에는 찬물이 나오고 겨울에는 따뜻한 물이 나오는 곳이다. 우리 남편 어릴 적에 낮에는 남자들이. 밤에는 여자들이 목욕하던 노천탕이었다고 한다. 작은 웅덩이 보다 좀 더 큰 곳이었는데 지금은 ‘새말리 참샘 공원’이라고 하여 종종 어린애들 손잡고 견학을 오기도 한다.여름 햇볕 쨍쨍 하던 날.우리 아들과 친구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참샘에서 정말 손톱만한 청개구리를 한 마리 잡아와서 키우고 싶다고 했다. 개구리를 엄마, 아빠, 가족들과 같이 살게 놔두지 이산가족 만들지 말고 놔 주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