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현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시간은 시위를 떠난 화살의 속도처럼 빠르다는 자명한 사실을. 그래서다. 그들은 이렇게 부연했다.“후회는 언제나 늦는 법이니, 지금에 충실하며 돌이켜 통탄할 일을 경계하라.”이는 흐르는 세월을 그저 그렇게 보내지 말고, 매사에 최선을 다하라는 생의 경구(警句)로 읽힌다.그러나, 보통의 사람들은 엄정한 위의 사실을 이전에도, 아직도, 아니 앞으로도 온전히 깨닫지 못하고 살다 가기 십상이다. 안타깝지만 부정할 수 없는 일.엊그제 열린 듯한 2023년 계묘년(癸卯年)이 벌써 저물고 있다. 달력을 뜯어내며 보니
특별할 것 없는 집안에서 평범하게 태어났다. 일찍부터 군인의 길을 걷기로 결심해 젊은 나이에 군문(軍門)에 들어선다. 뚝심과 과감성이 있고, 처세와 정세 판단에 능했기에 비교적 빠르게 고위 장교로 진급한다. 그리고, 마침내 쿠데타를 통해 국가의 최고 권력자 자리에 오른다. 하지만, 무소불위의 권력을 마음껏 누린 이후의 삶은 결코 행복했다고 볼 수 없다. 20세기 중반에서 21세기 초반에 걸쳐 한국,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에 걸쳐 프랑스. 다른 대륙, 다른 국가, 다른 시대, 다른 사회적 상황 속에서 살았지만 전두환(1931
환한 대낮의 역동성과 활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누군가는 밤이 가진 안온함과 고요한 평화를 기다린다. 이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닌 취향과 성정의 차이다.기자의 경우엔 밤의 매력에 이끌리는 사람. 그래서다. 오래전 아래와 같은 시를 읽었을 때 잠시잠깐 가슴이 술렁였다.시인 나희덕(57)은 어둠이 내려앉은 밤의 미지(未知)를 아래와 같이 노래한 적이 있다.“…(전략) 우리는 어둠의 온도와 속도도 느낄 수 없지알 수 없기에 두렵고 달콤한 어둠아, 얼마나 다행인가어둠이 아직 어둠으로 남겨져 있다는 것은.” 도시 명물 ‘나카스 야타이
낯선 환경을 두려워하거나 귀찮아하지 않는 성향, 거기에 더해 독신이라는 비교적 자유로운 처지 때문인지 주위 다른 사람들에 비해 많은 곳을 여행한 편에 속한다.30대 초반부터 시작해 20년 넘게 적지 않은 나라를 여행했다. 그런 과정과 경험 속에서 몇 가지 깨달은 게 있는데, ‘사람 사는 모습이란 게 어디나 비슷하구나’란 것도 그중 하나다.지난 9월 중순. 뒤늦은 휴가를 일본 후쿠오카로 갔다. 거기서 가장 인상적인 여행지가 다자이후 텐만구(太宰府天満宮)였다. 어떤 곳이냐고? 이 물음엔 ‘위키백과’를 인용해 답한다.“일본의 유명한 학자
한국과 일본 두 나라를 지칭해 ‘가깝고도 먼 나라’라고 하는 이야기는 누구나 들어봤을 터.여기서 ‘멀다’는 건 일본이 한국을 병합해 점령했던 일제강점기(日帝強占期·1910~1945)의 쓰리고 아픈 기억 탓이 크다. 그렇다면 ‘가깝다’는 무슨 의미일까?실제 우리나라와 예전엔 ‘왜(倭)’라고 낮춰 불렀던 일본의 물리적 거리는 매우 가깝다. 왜냐? 비행기는 물론, 선박에 장착해 속도를 높여주는 기계식 엔진이 없던 시절에도 한국과 일본의 왕래는 빈번했다. 이는 역사 문헌에도 드물지 않게 드러나는 사실.임진왜란이 끝난 후 우리는 일본으로 대
서기 676년. 신라는 백제에 이어 고구려를 병합한 후, ‘7세기 아시아 초강대국’으로 불렸던 당나라 세력을 축출함으로써 삼국통일의 여정에 마침표를 찍는다.정치와 군사적인 면, 종교·문화적인 측면 등에서 고구려와 백제보다 발전이 늦었던 신라가 삼한을 하나로 묶어 통일왕국을 만들어간 과정은 드라마틱하면서 지난했다.탁월한 외교협상력을 발휘했던 무열왕 김춘추, 용장(勇將)과 지장(智將)의 면모를 두루 갖춘 김유신, 무열왕의 뒤를 이어 고구려 침공과 당나라 격퇴의 선두에 섰던 문무왕 김법민,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나라를 위해 바치겠다고 맹
화랑(花郞).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꽃 같은 사내’라는 뜻이다. 신라는 전략적으로 외모와 품성 모두가 빼어난 소년(청년)을 뽑아 나라의 지도자로 키웠다.삼한일통(삼국통일)에 이르기 위한 백제, 고구려, 당나라와의 전쟁과 전투가 끝없이 이어지던 7세기. 신라 화랑들은 그 명칭처럼 ‘꽃’이 아닌 매서운 ‘칼’의 역할을 감당해야 할 경우가 더 많았다.신라가 통일왕국을 이루는 과정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한 두 사람, 즉 무열왕 김춘추와 태대각간 김유신 역시 젊은 시절엔 주목받는 화랑의 우두머리였다.660년. 국가의 명운을 걸고 백제와 맞붙었
영덕군 영덕읍 영덕대게로. 시원스레 펼쳐진 푸른 동해를 배경으로 거대한 약사불(藥師佛·약사여래, 약사유리광여래, 약사불로 불리는 부처. 불교에서 중생의 병을 고쳐주는, 즉 의사와 약사 역할을 하는 부처를 지칭)이 우뚝 서게 된다.길이 46m의 약사불 아래로는 법당을 만들어 10만의 부처를 봉안할 예정. 소요될 것으로 추정되는 예산만 200억 원. 어마어마한 프로젝트다. 이름하여 ‘청동 동해 약사불 대작불사(大作佛事)’이를 주도하고 있는 사람은 영덕 기원정사의 주지 자명 스님(58·속명 김상노).호방한 웃음과 거침없는 몸짓으로 대중에
7세기 신라엔 ‘삼한일통(삼국통일)을 이끈 스타급 인물’이 여러 명 출현한다. 백제를 멸망시켜 딸 고타소(古陁炤)과 사위 김품석의 원수를 갚은 동시에 통일의 초석을 닦은 무열왕 김춘추, 강력한 군사대국 고구려가 무릎을 꿇게 만들고, 지속적으로 내정을 간섭하던 당나라를 나라 바깥으로 내쫓은 문무왕 김법민, 통일왕조 권력의 중앙 집중화를 이뤄 문화·예술 발전의 토대를 마련한 신문왕 김정명 등.3명의 왕 모두가 삼국통일의 험로에서 큰 역할을 했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삼한일통 과정에서 가장 주목받아 마땅한 단 한 명의 인물은 누구인가?
“영덕군은 목숨을 걸고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한 의병장 신돌석의 고향인 동시에, 일제강점기 애국항일운동의 역사적 한 장면으로 기록된 3·18 영해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 곳이다. 또한, 1950년 한국전쟁 당시 풍전등화의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해낸 학도병들의 숭고한 희생으로 기억되는 장사상륙작전이 진행된 곳이기도 하다.”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의 숨결이 살아있는 영덕군과 오늘날 한국을 있게 한 국가 유공자에 대한 예우를 담당하는 경북남부보훈지청(지청장 김지현)이 ‘호국 벨트 조성 프로젝트’에 적극 나서고 있다. 실제로 영덕은 228명의 독립
“김유신은 몰락한 금관가야의 후손이라는 태생적 한계에 절망하지 않고, 미래를 직시하며 노력과 땀을 아끼지 않았기에 무열왕 김춘추와 함께 삼국통일이라는 커다란 업적을 남길 수 있었다”성큼 다가선 가을을 몸과 마음으로 실감할 수 있었던 지난 7일. 경상북도와 경주시가 주최하고, 경북매일신문이 주관한 강연회 ‘신라의 삼국통일-무열왕과 김유신의 시대’엔 경주시민과 경북도민, 내외빈을 포함 1천500여 명의 사람들이 찾아 발 디딜 틈 없는 성황을 이뤘다.경주 화백컨벤션센터 3층 대강당에서 열린 강연회에 강사로 나선 이는 공중파와 케이블방송,
‘2022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 5개, 은메달 2개, 동메달 2개를 획득해 종주국의 위상을 드높인 태권도가 ‘2030 세계엑스포 부산 유치’를 기원하며 행동에 나섰다.지난 7월부터 국기원(원장 이동섭)이 ‘2030 부산엑스포 추진본부’와 손잡고 2030 세계박람회 부산 유치를 위해 시작된 태권도 챌린지는 한국의 각 지자체를 순회하며 아름다운 지역
“김유신은 몰락한 금관가야의 후손이라는 태생적 약점에 절망하지 않고, 언제나 미래를 직시하며 노력과 땀을 아끼지 않았기에 무열왕 김춘추와 함께 삼국통일이라는 업적을 남길 수 있었다.”성큼 다가선 가을을 몸과 마음으로 실감할 수 있었던 10월 7일 오전. 경상북도와 경주시가 주최하고, 경북매일신문이 주관한 강연회 ‘신라의 삼국통일-무열왕과 김유신의 시대’엔 경주시민과 경북도민, 내외빈을 포함 1천500여 명의 사람들이 찾아 발 디딜 틈 없는 성황을 이뤘다.경주 화백컨벤션센터 3층 대강당에서 열린 ‘신라의 삼국통일-무열왕과 김유신의 시
무능한 조선의 왕 선조에게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 있사옵니다”라며 필마단기(匹馬單騎)로 끝까지 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임진왜란의 명장 이순신(1545~1598).오늘날로 말하자면 해군 작전사령관격인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로 활약하며 보여준 이순신의 지략과 기개는 50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2023년까지 여러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있다.그리고, ‘장군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 또 한 인물이 있다. 이순신보다 1천 년쯤 앞 시대를 살다간 김유신(595~673)이다. 이 두 ‘장군’은 한국에서라면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
전쟁은 땅을 황폐하게 만들고, 인간의 육체와 정신을 벼랑 끝으로 내몬다. 부정할 수 없는 비극이다. 그건 옛날과 지금이 다를 바 없다.신라는 백제와의 격전, 고구려와의 전투, 당나라 세력을 축출하기 위한 싸움을 오랜 시간 벌였다. 쉽게 이야기하면 7세기 중반과 후반 모두가 ‘전쟁의 시기’였다. 나라가 불길에 휩싸이는 경우가 흔했고, 많은 신라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다.긴 시간의 전쟁이 야기한 처참한 상황이 끝나고, 삼한일통(삼국통일)을 이룬 신라가 안정화의 길을 걷게 된 건 문무왕(김법민) 때에 와서다.아버지 무열왕(김춘추)과 외숙부
현대와 고대가 크게 다를 바 없다. ‘외교’는 국가 발전을 추동한다.이웃한 나라들과의 교류를 통해 얻어낼 건 얻어내고, 양보할 것은 양보함으로써 전쟁의 위험성을 줄이고, 경제 발전의 포인트를 찾아내는 건 7세기에도 중요한 일이었고, 21세기에도 여전히 중요하다.그래서다. 통치자에겐 ‘탁월한 외교 전략가’ 하나를 가지는 게 용맹한 장수 열을 가지는 것보다 더 큰 힘이 될 수 있다.그런 차원에서 청년 시절의 김춘추(무열왕·603~661)는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에게 전폭적인 지지와 신뢰를 받았다. 믿고 일을 맡길 수 있는 듬직한 신하였던
출중한 능력에 빼어난 외모, 거기에 정치적 혜안까지 갖춘 아버지 밑에서 태어난 아들은 마냥 행복하기만 할까?말이 나왔으니 연이어 질문 하나 더.그렇게 잘난 아버지는 물론, 나라 전체의 군사통솔권을 쥐고 수백 명 고위관료 위에 우뚝 군림한 외숙부까지 가졌다면 어떨까? 이 또한 조카에게 행복의 조건으로만 작용할까?한적한 평일 오후. 푸른 파도 일렁이는 경주 봉길리 해변에서 문무왕의 수중릉을 바라보고 있으니 이런 의문들이 떠올랐다.661부터 681년까지 신라를 통치한 문무왕 김법민. 그는 무열왕 김춘추의 아들이며, 신라 태대각간(太大角干
무열왕 김춘추, 흥무왕 김유신, 문무왕 김법민. 인척(姻戚) 관계로 맺어진 이 세 사람은 ‘삼한일통(삼국통일)의 트로이카’라 불러도 무방하다.무열왕과 김유신은 660년 의자왕과 계백을 제압하며 백제를 병합했고, 무열왕 사후(死後)인 668년엔 무열왕의 아들인 문무왕이 외숙부 김유신의 도움을 받아 연개소문 자식들의 갈등으로 혼란스러웠던 고구려까지 절멸시킨다.하지만, 온전한 삼국통일을 위해선 한 가지의 문제를 더 해결해야 했다. 바로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동맹세력으로 활동했던 당나라를 내몰아야 한다는 것. 외부세력의 축출 없는 삼한일통은
668년 고구려의 붕괴와 기원전 207년 중국 진나라의 멸망에서는 적지 않은 유사점이 발견된다.두 사건 사이에는 900년 가까운 시차가 있지만, 양국 모두 호걸(豪傑)의 사망과 간신의 횡포, 죽고 죽이는 형제간 다툼이라는 악재가 단시간에 겹쳤다.진나라의 최초 통치자는 모두가 알다시피 진시황(秦始皇·재위 기원전 246~기원전 210)이다.학자들을 산 채로 땅에 묻고, 농사법과 실용기술에 관련된 책 외에는 모두 불태우라는 명령을 내린 ‘분서갱유(焚書坑儒)의 독재자’로 이름이 높지만, 진시황은 그렇게 두부 자르듯 한마디로 단순하게 평가될
동서와 고금이 크게 다를 바 없다. 대저 ‘제국(帝國)’이 멸망하는 이유는 강력한 외세의 위협도, 바깥에서 오는 충격파 탓도 아니다. 내부가 무너지는 게 가장 큰 몰락의 시그널이다.고구려는 1천500여 년 전 신라와 백제를 포함한 우리 땅 고대 3왕국 중 가장 큰 영토를 차지했고, 당대의 강대국이었던 인근 수나라와 당나라의 모골을 송연하게 한 군사 대국이었다.그럼에도 668년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게 무참하게 패배해 기원전 37년 동명성왕이 세운지 705년 만에 역사 속에서 이름이 지워진다. 허망하고 슬픈 마지막이었다.신라는 고구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