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도 바람도 삶도 죽음도 그대의 선행은 결코 지우지 못한다”라고 붓다는 말씀하셨다. 선행은 참 숭고하리만큼 귀하고 보배스러운 것이며 공자께서도 “남의 선을 보면 미치지 못한듯 하라”하셨다. 세상이 각박하다. 비정한 이 사회가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이 시대에 사는 것 자체가 복 없는 인연 탓인지하고 생각하게 되고 뉴스를 보기가 불안할 정도다. 너무 자주 접해지는 악행의 소행에 정신 건강까지 다칠까 두려운 실정이다. 사실 명확히 빠르게 보도하는 것이 언론의 전부이겠지만 가려져야 할 부분은 가려졌으면 할 때도 많다. 착하다라는 한마디의 말은 능력이 없어도 있어 보이고, 선하다는 말은 젊은이에게 자신감처럼 느껴지는 것, 나에게 인식된 그릇된 생각의 이념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나는 참 귀하게 여기는 한마디이다
매일 몇 번씩 만나고 읽는 작품 중에 이런 작품이 계단에 걸려 있다. “성냄을 거두고 욕심을 막아라. 말을 삼가고 음식을 절제하라. 이것이 인생의 큰 방비요 마음 공부의 큰 사업이라”하는 글귀이다. 몇 번씩 보기만 할 뿐 나의 실천행이 안 되다 보니 내 것이 되지 않는다. 성냄, 욕심, 말조심, 음식절제 어느 것 하나 버릴 수 없는, 인생살이에서 삶의 질을 윤택하게 할 수 있는 최고의 보약이다. 이러한 실천의 덕목은 우리에게 적당한 삶의 여유와 심리적 평화를 만들어주는 자양제인 것이다. 공자께서는 `위령공편`에 위의 내용과 세밀하게 덪붙이듯 말하고 있다. 자장(子張)이 세상 살아가는 도리에 대해 묻자 “말이 성실하며 신의가 있으며 행동이 돈독하여 공경스러워야 하며 비록 오랑캐의 나라에서도 살아갈 수 있고
살면서 오랫동안 기억하고 싶은 구절이 있다. 나의 인생에 큰 힘이 되고 축이 되는 구절들이 나를 잡아둔다. 그 중에 하나가 구사구용(九思九容)이다. 구사구용의 내용과 비슷한 내용인 사잠을 고문진보에도 소개하고 있다. 문심조룡의 주(註)에 잠(箴)은 병을 고치는 침(針)의 뜻이며 설문해자에서도 잠은 침(鍼)과 같다고 풀이하고 있다. 箴은 경계하고 근본으로 삼으라는 뜻이다. 그중에 정정숙(程正叔)의 四箴은 視, 廳, 言, 動으로 천하의 명문장으로 손색이 없다. 또한 장온고의 大寶箴에서도 “하늘이 인간의 선악을 모를리 없습니다. 하늘은 저 높은곳에 있으면서도 인간 세상 모든 죄와 업을 알고 있습니다. 악행은 당연 즐거움을 다해서는 안됩니다. 즐거움이 다하면 반드시 슬픈일이 생기는 법입니다. 마음가는대로 욕심을 부
장수사회가 되면서 죽고 사는 일에 대한 여러 가지의 일들이 생겨나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고 있다. 죽고 사는 문제는 우리가 반드시 안고 가야 하는 가장 큰 대사이지만 마땅한 대책도 없이 평균수명만 늘어났다. 이러한 생의 마지막에 이르러 자신의 생을 정리할 수 있다면 참 좋을 것 같다. 인생도 왔던데로 돌아가기 위해 인생의 졸업식을 해야 한다. 공자께서는 15, 30, 40, 50, 60, 70세를 정확히 진단하셨고 삶을 명확하게 구분해서 말씀하셨다. 이는 간략한 자기소개서이며 자기 학습의 지견력에 대한 견해의 변화이다. 우리 모두 깊이 생각해 볼 일이다. 흔히 이 시대를 백세인생이라 하지만 나이의 숫자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삶의 질이 문제이다. 공자께서 평생 존경의 대상으로 모셨던 춘추전국시대 위나라
공자께서는 말씀하셨다. “중용의 덕은 더 이상 바랄 것 없이 지극하도다. 그러나 이 덕을 가진 사람은 찾아보기 힘든지 오래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평상(平常)의 뜻과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지속성의 깊은 뜻도 가지고 있다. 삶에서 너무나 중요한 위치에 존재하기에 중용은 어느 곳에서나 가장 중심의 자리에 있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고 기울지도 채워지지도 않는 완전 접점의 삶의 형태 버릇처럼 `중용의 도`와 `중용의 덕`을 삶의 토대와 기초석에 의미를 두고 자신을 몰아쳤던 것은 우리모두 작금의 현실이다. 중용 또한 시대적 상황에 따른 제각기의 다른 해석은 의미변용보다 그것의 위대성에 있다. 덕이란 단어 또한 정체성이 모호하고 단정된 정의를 내리기는 쉽지 않다. 왜 덕이 있어야 하며 그 덕은 무엇을 위한
사람은 쓰임의 능력이 정해져 있을까? 그릇도 한가지 용도로 국한되어 있지 않다. 그릇은 생각의 문제이며 사유의 물상을 담아내는 일이다. 여기에서 그릇은 단순형상의 그릇이 아닌 정신 함량과 사유의 몫을 담고 기르고 숙성시키는 것이다. 덕을 함양하고 완성하고자 하는 사람은 한 가지 재주에 편중되지 않아야 하며 어디에서든지 쓰임과 우러러봄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옛말씀에 “큰 말을 받아들이지 않고 작은 말에 투철한 것을 소기(小器)라 하였으며, 작은 말을 버리고 큰 말에 기뻐함을 대기(大器)라 하며, 큰 말을 들어 크게 쓰고 작은 말을 들어 작게 쓰면 그것은 불기(不器)”라 하셨다. 또한 주희는 즉석에서 “덕을 이룬 선비는 본체가 갖추어지지 않음이 없고 작용이 두루 미치지 않음이 없기에 단지 한 가지 재주 한
가끔 자신의 모습은 모르면서 주변 지인들이 이러했으면 좋겠다라는 부질없는 생각이 들때도 많다. 가르치는 사람은 가르침의 사표로서, 배우는 사람은 배우는 자의 본분에서, 주인은 주인으로서, 손님은 손님으로서의 제각기 격을 갖춘다면 세상은 다스림없는 다스림 속에 어짐의 사회가 펼쳐질 것이다. 제각기 모습과 생각속에 태어난 몫으로 제 인생을 산다고 하지만 만나면 만날수록 좋은 사람들이 주변에 있다. 그를 만나는 것만이 아니라 그를 통해 나를 환히 들여다 보게 되면 숱한 배움과 반성의 기회를 갖기도 한다. 공자는 자하의 물음에 “사람은 엄숙하고 따뜻하고, 말은 언제나 명확 간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장중한 기품과 무게가 있고 그가 있으면 주변이 밝아지고 환해져야 하고 땅과 바다가 모두를 생육시키고 안아주듯이 만인
팔일편에 “아름답게 웃는 얼굴에 보조개가 예쁘네. 아름다운 눈의 맑은 눈동자가 선명하구나. 흰비단으로 광채를 내도다”라는 말이 있다. 소이위현혜(素以爲絢兮)란 본래 비단 바탕에 채색한다는 말인데 제자 자하가 “흰비단으로 광채를 낸다”라고 잘못 안 것이다. 공자는 자상히 일러준다. “그림 그리는 일은 먼저 바탕이 있는 뒤에 색을 칠해 다듬는 것이다” 자하는 “예 알겠습니다. 예(禮)가 뒤라는 말씀이군요”라는 답에 공자는 크게 성숙한 소견에 흐뭇해 하면서 “나를 일으키는 자가 자하로다. 비로소 너와 더불어 시(詩)를 말할 수 있게 되었구나”라고 덧붙인다. 상상만해도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이요 수준높은 예술 드라마이다. 내 자신도 숱하게 많은 한자 중에서 좋아하는 자 몇 자 중에 이 글자가 포함되기에 차실 이
점으로 시작되고 한 점을 거두어 들이면서 완결되는 것이 서예작품이다. 최소단위인 한 점은 우주 삼라만상을 담는 형상이며 작가의 혼신의 정신 발로이다. 살아있는 자가 죽은 글씨를 쓰지 말라고 하는 말은 무의미하게 최소한 점을 찍지말고 점을 쓰라는 말과도 같다. 획은 점들이 모여 이룬 것이고 선과 선이 모여 글자를 이루고 화합하여 이룬 글자는 작품이 된다. 한 획 속에 인생의 삼막이 있고 한 작품속에 희로애락 젊음 늙음 만용 성실 오만 편견 지식 지혜 모든것이 다 들어 있다. 명작은 한 점과 한 획이 소홀함이 없이 짜여진 절대적인 화합의 결정체이다. 서로 등 내어주고 어깨 벌려주고 끌어 안아주는 우리들의 따스하고 정감어린 토담집 담벽의 이상하지만 밉지않는 결합의 조화가 참 오랫동안 기분이 좋아진다. 획과 획의
□성인처무위지사(聖人處無爲之事):성인은 무위의 일에 처한다 그분은 연고도 없는 동네에 갑자기 들어오셨다. 처음엔 아랫마을에 사셨다. 머리를 박박 깍은 할아버지는 대나무에 소금을 넣어 불에 구워 먹었다. 할아버지가 소금 굽는 모습을 직접 보기도 했다. 죽염이라는 말을 알기도 전에 죽염을 맛보았다. 할아버지는 올 때도 그러했지만 갈 때도 홀연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몇 해가 지나지 않아서였던 것 같다. 할아버지는 다시 돌아왔는데 이번엔 아랫말이 아니라 우리 집 옆집이었다. 오랫동안 비어 있던 집에 쥔을 붙였다. 할아버지는 소금을 굽지는 않았다. 동네사람들의 바쁜 일손을 돕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나무로 의자나 책상 같은 것을 만들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에게 식사를 대접하곤 했다. 소금이나 구워먹는 괴
하늘보다 높은 이치 깨는 일이 공부다. 사는 일 만큼 어려운 공부가 어디 있겠는가. 사는 일은 언제나 죽음을 담보로 하는 위험천만한 일이다. 사는 동안 우리는 어떤 행위든지 하고 산다. 이 일이 대사(大事)이며 공부인 것이다. 경전을 읽고 수행을 하고 두꺼운 백과사전을 펴고 접고 읽는 일, 정보의 바다에 빠지고 사색없이 검색하고, 죽은 지식을 더듬어 가는 이런 것들이 공부가 아니다. 사는 것 자체가 작두날을 타는 아찔한 공부인 것이다. 논어 헌문편에 “자신을 위한 참된 공부”를 강조하고 있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공부 말고 자신의 성정을 위한 참 공부를 해야 한다. 지식 노동자가 아는 것만큼 세상을 윤택하고 슬기롭게 하는 것은 아니다. 노자는 “아는 것 때문에 거짓말을 하게 되고 이로 인해 세상은 혼탁해
몇 년 전 나는 나의 서재 문 앞에 이렇게 써서 붙여놓고 드나들면서 깨우쳤다. “침묵을 통해서 이해하고 침묵을 통해서 효과를 얻고 침묵을 통해서 이익을 얻자”라고. 침묵이라는 것은 말하지 않음의 단순행위가 아닌 쓸데없이 하는 말을 의미한다. 손해를 당하고 비난하지 않음도 쉽지는 않겠지만 우리는 기쁜일에 흥분치 않기와 자랑하지 않는 일이 어렵다. 침묵하려면 적어도 입안이 검어져야 한다고 입구에 검을 흑(黑)을 쓰기도 한다. 두꺼운 침묵만이 명철한 지견력을 가져올 수 있다. 공자께서는 평소 배우는 것에 싫증을 내지 않고 아래 사람에게 묻는 것도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며 제자들 앞에 모른다는 것을 당당히 하셨다. 모른다는 것은 모른다고 하는 것이 진정 아는 것이라는 말씀이 생생하다. 또한 남을 가르치는 일도 평생 게
얼마전 일이었다. 논어의 구절 중에 동업을 하지말라는 뜻의 문장이 무엇입니까라는 느닷없는 물음이었다. 먼거리에 있지만 종종 만나는 관계이고 편히 지내는 사이다. 굳이 예를 들면 위령공제 15절에 “도가 같지 않으면 함께 일을 꾀하지 않는다”는 글귀가 있다라고 했다. 논어에서 도는 사람의 실천 덕목인 인(仁)이기에 동업과의 직접적인 관련은 아니겠지만 인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과 서로 상호관계 속에 손을 잡고 협동해야 한다. 부족한 이에게는 길이 되고 가끔 그들의 배경이 되고 비비고 기댈 언덕이 되어주기도 해야한다. 사람의 사귐에 대해 사마천의 사기에 “한번 귀해지고 한번 천해지며 사귀는 정이 나타난다” 즉 한번 죽고 한번 살아나니 사귐의 정을 알게 되고 한번 가난해지고 한번 넉넉해지니 사귐의 태도를 알
사는 일이 늘 넘쳐서 문제이다. 이 넘치고 행동이 넘치고 사람들의 만남이 진실하지 않는 것이 문제이다. 얼마나 정의롭지 못하기에 세간에 정의란 무엇인가라고 숱하게 정의 되어지지만 실천의 한계는 누구라도 완전할 .수 없는 것이 세상의 구조상의 모순속에 살고 있다. 공자께 제자 번지가 “무엇이 인(仁)입니까 ”하고 여쭈었다 . 공자는 “평소 집에서 거처할 때는 공손한 자세를 지니며 일을 맡아 처리할 때도 공경히 해야 하며 남을 대할때는 충심의 심정을 대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비록 미개한 지역에 가더라도 이 세가지는 버려서는 안된다”라고 말하고 있다. 버려서는 안되는 것이 어찌 이 세가지 뿐이겠는가마는 공자는 제자들의 학습 수행 덕목에 공손을 강조했다. 공(恭)은 공손이며 낮춤은 미덕이며 남을 받들어 모시는 지
웃어 넘기기에는 너무 무서운 일이다. 몇 년 전 주변에 있었던 실제 상황이다. 부모님의 강요에 한문학과에 진학한 아이가 있었다. 한문학도가 되길 바라는 그의 부모님은 적어도 대학 서문 정도는 외우기를 바랬다. 방학때 내려온 아이에게 그간 배운 한문 공부 글귀 속에 가장 의미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침없이 꾸중 하듯 내놓은 단어가 `과즉물탄개(過則勿憚改)`였다. 듣는 순간 화들짝 놀랐다고 한다. “허물이 있으면 즉시 고치기를 꺼리지 말라”는 말이다. 공자는 위령공편에서도 “잘못을 저지르고도 고치지 않는 것이야말로 허물이라”고 했다. `과즉물탄개`는 도리를 어기고 나면 고치기를 꺼리지 말라는 매서운 회초리이다. 과(過)는 월(越)과 통하여 먼곳을 지나가다는 뜻과 도를 지나가다의 의미이며 탄(憚)은 心과
사람의 향기는 만리를 간다. 높고 귀한 덕은 세상에 향기가 되고 지침이 되면 공명자가 생기고 향기는 멀리 세상을 환하게 맑게 만들어 놓는다. 덕은 수신의 첫번째 덕목이며 도를 바르게 닦고 수행했을 때 스스로 얻어지는 것이며 덕이란 한자의 어원은 설문해자에서 밖으로 다른 사람에게 바람직하고 안으로 나에게 언제나 획득한 것, 즉 몸과 마음이 체득한 것이며 다른 사람이 혜택을 받도록 하는 것이다. 한 존재가 다른 존재와 구별되는 독특한 존재 다움을 발현하는 능력을 가진 영원한 대 스승 공자는 헌문편에서 “천리마는 그 힘을 일컬어지는 것이 아니고 그 덕성으로 일컬어지는 것이다. 여기에서의 덕은 조련되어 얻어진 탁월한 능력이며 옛말에 늙은 말이 길을 안다”라는 `노마식도(馬識途)`는 양마(良馬)의 덕성을 일컫는 말
사는 일이 허물의 연속이다. 자기 중심의 삶을 살기 때문에 허물은 자기로부터 오며 자기를 모르기에 반성하는 일이 쉽지 않다. 자나 깨나 반성하고 고치라고 숱하게 듣고 살고 있다. 공자 제자 중에 가장 먼저 학이편에 증자가 나온다. 字가 자여(子與)인 증삼은 학이편에서는 “충(忠), 신(信), 전습(傳習)을 살피고 반성한다”라고 했다. 여기에서 삼성(三省)의 성은 目과 生으로 生은 淸과 통하여 맑다의 의미이며 자세히 보면 덜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성찰(省察)로 주위를 살펴 알아본다의 뜻이며 세 번은 세 번이 아닌 자주 많이라는 뜻이다. 충(忠)은 자신의 모든 것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일이며, 신(信)은 실질적인 것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전수받은 것을 복습하였는가의 전(傳)은 스승에게 받은 가르침
그저 생각만 해도 환해지는 말. 말하기 전에 웃음이 나오는 한 단어 사랑, 참 귀하고 소중하다. 천대 만대의 시간의 흐름속에 사랑이라는 이 단어만큼 가슴 저미고 탈많은 단어도 많지 않을 것이다. 뭐라고 정의 할수도 없지만 인간에게 어쩌면 가장 소중한 언어이기도 하다. 공자께서는 學而편에서 “제자는 집에 들어 와서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가서는 윗사람을 공경하며 행동을 삼가고 미덥게하며 널리 사람을 사랑하되 어진 사람을 가까이 해야한다. 이런 일을 실행하고 남은 시간이 있으면 바른 글을 배워야 한다”라고 했다. 효도, 공경, 미더운 행동, 넓은 사랑 어느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널리 세상 구하는 사랑 박시제중(博施濟衆)이다. 공자의 사랑은 많은 사람을 널리 구하고 사랑하는 통큰 대 군자의 사랑이며 제
태어났다 죽는 일은 한구름 일어났다 사라지는 일이다. 긴 시간인 것 같지만 왔다가는 일이 짧기 그지없다. 사는 동안 누구나 본능적으로 부하고 귀하기를 탐한다. 공자도 부귀와 영화는 모든 사람들이 바라는 것이지만 올바르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을 누리지 말아야하며 가난과 비천은 모든 사람이 싫어한다라고 말했다. 세상에 부귀치고 바르게 얻어지는 것이 많지 않게 보여지고 있기에 재산 축적이 부정만이 방법인 것처럼 인식되는 것도 옳지는 않다. 사실 권력과 명예를 탐하는 사람 중에 이익 앞에 자유로운 사람 만나기 쉽지 않다. 채근담에서도 “명예를 좋아하는 것이 이익을 좋아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好名不殊好利)”라고 하였다. 세상살이 십중팔구가 권력과 명예 즉 부의 쟁탈전이다. 부(富)는 신에게 올
스승이란 뭇 사람들 중에 사리를 분별하여 바르게 인도해주는 사람이다. 곳곳에서 우리는 스승을 만나고 묻고 가르침을 받을수 있지만 눈이 어둡고 오만 방자하여 알수도 없고 뫼실수도 없다. 참스승은 참되게 길찾아 나서는 자에게만 온전히 만나 뵐 수 있는 영광을 준다. 어찌 사람뿐이겠는가! 한 줄의 글과 한 점의 작품도 아니 미물도 자연도 눈뜨면 스승이다. 붓글씨를 가르치면서 전업작가의 생을 살아가는 직업 덕분에 귀하고 좋은 사람도 많이 만나고 살 수 있다는 것. 이것 정말 큰 복이다. 내 스스로 부족하기 그지 없지만 찾아와 주는 사람 모두가 이런저런 점들이 나의 참 스승임을 느낄 때가 많다. 좋은 성품은 배움을 주어서 고맙고, 악하고 못된 점들도 내가 받아야 할 시절 인연이고 버려야 할 깨우침이니, 그것 또한 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