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무쌍 나라 안에 둘도 없는 뛰어난 무사. 천하제일의 인재라는 뜻의 말이다. 중국의 초한쟁패기에 활약했던 한의 명장 한신을 두고 소하가 평했던 말에서 비롯됐다. `사기회음후열전` 등에 기사가 나온다. 진이 멸망하고 항우와 유방 두 영웅이 자웅을 겨루던 때의 일이다. 당시 유방의 군대는 고향을 떠나 산간오지의 척박하기 이를 데 없는 촉땅에서 세력을 키우고 있었는데 그중에는 한신이라는 하급군관도 끼어 있었다. 그는 회음 출신으로 처음에는 초왕 항우를 섬겼으나 사람볼 줄 모르는 항우의 눈에 들지 못했다. 크게 실망한 한신은 결국 초의 진영을 도망쳐 나와 유방의 군대에 몸을 의탁했던 것이다. 여기서 그는 부장 하후영에게 발탁되어 정승 소하의 눈에까지 띄게 되었지만 여전히 말단군관 신세를 면치 못했다
무가 무불가(無可 無不可) 가(可)도 없다. 원래는 `행동에 중용(中庸)을 지켜 어긋남이 없다`는 뜻이나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다`는 뜻으로 더 많이 쓰인다. `논어` 미자(薇子)편, `후한서(後漢書)` 마원전(馬援傳)에 나온다. `논어` `미자`편에는 공자가 옛날의 여러 일민(逸民)을 평한 내용이 있다. `일민`이란 학문과 덕행이 있으면서 초야에 묻혀 벼슬하지 않는 사람, 곧 은자(隱者)를 가리키는 말이다. 공자는 백이와 숙제등의 평을 열거한 후 끝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그들의 행동과 달라서 가한 것도 없고, 불가한 것도 없다` 맹자의 설명에 의하면, 공자는 벼슬한만하면 벼슬하고, 그만둘 만하면 그만 두었으며, 오래 머무를 만하면 오래 머물고, 속히 떠나야 하면 속히 떠났으
춘추필법(春秋筆法) `춘추필법(春秋筆法)`은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에 대해 형식적이고 간결한 문장을 통해 엄격하게 포폄(褒貶)을 가한 `춘추(春秋)`의 독특한 필법을 가리키는 말이다. `일자포폄(一字褒貶)`, `진언대의(微言大儀)`라는 말도 여기서 나온 것이다. 춘추란 춘추시대노나라 은공(隱公) 원년(B.C. 722)부터 (哀公) 14년(B.C. 482)에 이르는 12공 242년 간의 기록을 담고 있는 역사서이다. 이것은 원래 노나라의 사관(史官)이 기록한 일기체의 궁정연대기(宮庭年代記)인데, 공자가 여기에 자신의 독자적인 역사의식과 가치관을 가지고 미묘한 필법 아래 필삭(筆削)을 가했다. 이를 가리켜 춘추필법이라 한다. 공자의 기준은 `명분을 바로잡은 (正名分)`과 `포폄에 의거함`이었다. 그
남쪽 나뭇가지의 꿈이란 뜻 곧 덧없는 한때의 꿈 훅은 인생의 덧없음을 비유하는 말이다. 비슷한 말로 한단지몽(邯鄲之夢)이 있다. 당대(唐代)의 전기작가(傳奇作家) 이공좌(李公佐)의 소설 `남가태수전`에서 비롯된 말이다. 당(唐)나라 德宗(덕종) 때 광릉(廣陵)지방에 순우분이란 사람이 있었다. 어느 날 그는 술에 취해 집 앞의 큰 홰나무 그늘에서 잠이 들었는데 어디선가 남색 관복을 입은 두 사나이가 나타났다. 그들은 순우분 에게 절을 하며 이렇게 말했다. 저희는 괴안국왕(槐安國王)의 명을 받고자 대인을 모시러 온 사신입니다. 저희 와 함께 가시지요. 순우분은 얼떨떨했지만 사신이 권하는 대로 그를 따라 홰나무 구멍 속으로 들어갔다. 화려하게 차려입은 국왕이 성문 앞에서 그를 반갑게 맞이하는 한편 그를 당장에
연리(連理)는 서로 다른 나뭇가지가 맞닿아서 결이 하나로 통해버린 것, (理: 나무나 무늬의 곁을 말한다) 원래는 지극한 효도를 비유하는 말이었는데 후에 부부간의 지극한 사랑을 비유하는 말로도 쓰였다. 연리의가지(連理枝)라고도 한다. 후한서 채웅전의 기록이다. 후한 말의 문인 채옹(蔡雍)은 뛰어난 학자였지만 효성이 지극한 사람으로도 유명한 인물이다. 그의 어머니가 병으로 눕자 그는 병간호하는 3년 동안 계절도 잊어버렸으며 옷을 벗고 잠을 자본 적이 없었다. 어머니의 병이 위독해진 후 백 일 동안은 아예 잠을 자지 않고 간호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그는 무덤 옆에 초막을 짓고 시묘(侍墓)살이를 했는데 모든 일에 예의격식에 따라 했다. 그 여묘 옆에서 나무가 났는데 그것들의 가지가 서로 붙어 자라더니 곁이
하늘과 땅 사이에 충만한 지극히 크고 지극히 강한 원기(元氣)를 뜻한는 말로서 맹자(孟子)의 용어이다. 정기(正氣) 혹은 정대한 기(氣)라고도 한다. 맹자 `공손추`상에 나온다. 전국시대의 철인 맹자가 어느날 제자인 공손추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진정한 용기와 부동심(不動心·동요가 없는 올곧은 마음 상태) 등에 대해 묻고 대답하던 끝에 공손추가 이렇게 물었다. “감히 묻겠습니다만 스승님께서는 어디에 장점이 있으십니까” 이 질문은 맹자가 앞서 자신의 부동심과 고자(告子·맹자의 성선설에 대하여 사람의 본성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고 논박하던 전국시대의 사상가)의 부동심을 비교하면서 자신의 것이 더 우위임을 말하자 공손추가 맹자의 부동심에는 어떤 장점이 있어서 그렇게 다른 것인지를 물은 것이다. 여
빈자일등(貧者一燈) 가난한 사람의 정성스러운 등불 하나 이는 곧 가난하지만 성심껏 보시(布施)하는 자세를 비유하는 말이다. 불교의 경전 중 하나인 `현우경(顯憂經)`의 빈녀난타품(貧女陀品)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석가가 사위국(舍衛國)의 한 정사(精舍)에 머무르고 있을 때의 일이다. 그 나라의 난타(陀)라는 가난한 여인이 있었다. 그녀 역시 다른 사람들처럼 부처에게 공양을 바치고 싶었으나 남에게 구걸을 하며 살고 있는 자신의 처지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녀는 하루종일 돌며 구걸을 한 끝에 간신히 1전을 얻게 되었다. 그 돈으로 기름을 사서 부처에게 등불을 바치려고 했으나 기름장수는 그렇게 적은 양은 팔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난타는 자신의 간절한 심정을 주인에게 털어놓으며 사정을 했다.
관포지교(管鮑之交) 관중(管仲)과 포숙아(鮑叔牙) 사이의 사귐이란 말로서 시세(時勢)에 따라서도 변치않는 두터운 우정을 일컫는다. 사기(史記) `관안열전(管晏列傳)` 열자 역명 편 등에 관중과 포숙아의 이야기가 소개돼 있다. 관중과 포숙아는 춘추시대 제(劑)나라 사람들이다. 이들은 어렸을 때 같은 고장에서 자랐는데 포숙아는 관중의 재능을 일찍이 알아보고 가난했던 관중을 늘 도와주곤 했다고 한다. 당시 제나라는 양공 (襄公)이 형인 노()의 환공(桓公)을 죽이고 그의 부인을 차지한 후 정사를 돌보지 않아 매우 혼란스러웠다. 차츰 조야의 기미가 어지러워지자 관중은 공자(公子)규를 모시고 이웃 나라로 포숙아는 규의 이복동생인 소백(少白)과 함께 거나라로 망명했다(BC.686). 예상한 대로 그해 양
죽마고우(竹馬故友) 같이 대나무말을 타고 놀던 어린 시절의 벗. 곧 소꿉동무나 오랜 친구를 일컫는 말이다. `세설신어(世設新語) 품조(品藻)`편 `진서(晉書)은호전(殷浩傳)`등에 전한다. 진(晉)나라 간문제(簡文帝) 때 환온(桓溫)과 은호(殷浩)라는 인물이 있었다. 환온은 일찍이 세상에 나아가 이름을 내고 있었고, 은호는 은사(隱士)로서 자처하고 있었다. 당시 촉(蜀) 땅을 평정하고 돌아온 환온의 세력이 날로 커지자 간문제는 환온을 견제하기 위해 은호를 양주자사(楊州刺史)에 임명했다. 은호는 마침 환온의 어릴 때 친구로서 학식과 재능을 겸비한 인재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환온을 견제하기 위한 간문제의 포석으로 은호가 벼슬길에 오르자 당장에 두 사람은 정적(政敵)이 돼 서로 질시하기 시작했다.
연목구어(緣木求魚) 나무에 올라가 물고기를 구한다. 곧 도저히불가능한 일을 하려고 함을 비유하는 말이다. 잘못된 방법을 목적을 이루려고 하는 경우와 애써 수고만 하고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경우에도 이르는 말이다. 맹자 `양혜왕(糧慧王)`편에 나온다. 전국시대, 제후들을 찾아다니며 유교(儒敎)의 인의(仁義)의 사상과 왕도정치(王導政治)를 설파하던 맹자의 발길이 한때 제(濟)나라로 향했다. 당시 제나라는 서쪽의 진(秦)나라, 남쪽의 초(楚)나라와 함께 대국으로 꼽혔고 선왕(宣王)도 능력있는 군주로 평판이 있었으므로 맹자는 그에게 왕도정치를 일깨워 주겠다는 큰 기대를 하고 찾아간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는 오직 힘있는 자가 최고인 패도정치의 시대였다. 선왕은 왕도정치를 설파하러 간 맹자에게 패도정치에
“한단의 걸음걸이” 곧 자기 분수를 잊고 무턱대고 남을 흉내내는 일을 빛댄 말이다. `장자`, `추수(秋水)`편에서 유래한다. 옛날 연나라의 서울인 수릉에 한 젊은이가 살았다. 연나라는 작은 나라였다. 그젊은이는 보잘것없는 작은나라에 살고있는 처지를 한탄하며 큰 나라인 조나라를 동경했다. 어느날 그는 드디어 조나라의 서울인 한단으로 갔다. 그런데 그곳 사람들의 걸음걸이를 보니 수릉 사람들의 걸음걸이와는 무척 달랐다. 젊은이는 열심히 한단 사람들의 걷는 모양을 배웠다. 그러나 한단의 걸음걸이를 다 배우기도 전에 그만 옛날의 걸음걸이마저 잊어버리고 말았다. 결국 걷는 법을 아예다 잊은 그는 겨우 기어서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 이야기는 `장자`, `추수`편에, 궤변론자인 공손룡과 위나라공자 위모의 대화에서
어부지리(漁父之利) 어부의 이득 곧 둘이서 다투는 사이에 제삼자가 힘들이지 않고 이득을 챙긴다는 말이다. 방휼지쟁과 같은 말이다. `전국책(戰國策)`, `연책(燕策)`에 나온다. 전국시대 진(秦)나라에 대항하는 여러 나라들이 합종연횡(合從連橫)의 대책들을 서로 들고 나와 천하가 한창 어지러운 때였다. 소진(蘇秦)과 장의(張儀)가 대표적인 종횡가 합종 연횡술에 밝은사람 였지만 소진의 아우소려와 소대도 형 못지않은 유세객이었다. 소려는 주의 난왕에게 백발백중의 비유를 인용하고 중국의 동북방에 있었던 연 나라는 이웃한 서쪽의 조 나라와 남쪽의 제 나라와 긴장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한때 연나라에 기근이 들자 조왕은 제나라에 군대를 파병하고 있던 터라 조나라와의 전쟁을 피하고자 했으므로 소대에게 조나
용두사미(龍頭蛇尾) 용의 머리에 뱀의 꼬리 곧 시작은 거창하나 결국은 별 볼 것이 없음을 뜻하는 말이다. `벽암집`의 기록에서 비롯됐다. 송나라 때 원오극근이라는 이가 평석(評釋:시가나 문장을 비평하고 주석 하는 일)한 `벽암집`은 선사들의 선문답을 모아놓은 `공안집(共案集)`이다. 송나라 때는 특히 황실의 보호를 받아 불교 그중에서도 禪宗(선종)이 번성하고 불교 서적도 활발히 출판됐다. `벽암집`도 그중 하나다. 육주(陸州) 땅의 용흥사(龍興寺)에 진존숙(陳尊宿)이라는 이름난 승려가 있었다. 진존숙의 말년의 일이다. 어느 날 그는 한 낯선 행려승을 보고 물었다. 어디서 오셨소이까. 그러자 그 행려승은 갑자기 으악 소리를 질렀다. “허허, 일갈(一喝:한번 큰소리로 꾸짖음) 당하고 말았군
조삼모사 (朝三暮四) 아침에 세개 저녁에 네개, 간사한 잔꾀로 남을 우롱하고 속이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또한 눈앞에 보이는 차별만을 알고 그 결과는 같은 것임을 모르는 어리석음을 풍자하기도 한다. `장자` 제물론(齊物論)편 `열자` 황제(黃帝)편에 나온다. 송나라에 저공(狙共)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저(狙·원숭이)라는 이름처럼 원숭이를 매우 좋아해서 많은 원숭이를 기르고 있었는데 원숭이와 서로 마음이 통할 정도였다. 그데 워낙 많은 원숭이를 기르다 보니 먹이를 장만하기가 나날이 어려워졌다. 그래서 저공은 원숭이에게 나누어 줄 먹이를 줄이기로 했다. 그러나 원숭이들을 불쾌하게 만들지 않으면서도 먹이를 제한하는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그래서 그는 먼저 원숭이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마이동풍(馬耳東風)` 동풍(東風:봄바람)은 말이 귀를 스쳐간다는 뜻, 곧 남이 말을 해주어도 귀담아 듣지 않고 그냥 흘려버리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충고를 들어도 전혀 받아들이지 않거나 남의 일에 상관하지 않음을 비유할 때 쓰인다. 마이춘풍(馬耳春風)이라고도 쓰며 우이독경(牛耳讀經:쇠귀에 경읽기), 대우탄금(對牛彈琴:소 앞에서 거문고 타기) 등도 같은 말이다. 이 유명한 말은 이백(李白)의 장시(長詩) `답왕십이한야독작유희` 가운데 나오는 구절에서 비롯되었다. 당나라의 시인 이백은 그의 친구 왕십이(王十二)로부터 `한야독작유희(寒夜獨酌有懷)`라는 시를 받자, 그 답시로 `답왕십이한야독작유희(왕십이의 한야독작유희라는 시에 답하여)`라는 시를 지어 보냈다. 마이동풍은 그 두 번째 수에 나온
삼인성호(三人成虎) 세 사람이면 호랑이도 만들어낸다, 곧 한 두 사람이 거리에 호랑이가 나왔다고 하면 곧 이 든 지 않아도 세 사람가지 그렇게 말하면 참말로 믿기기 쉽다는 말이다. 거짓말이라도 여러 사람이 하면 곧이들린다는 것을 비유한다. 시호(市虎) 시호삼전(市號三傳:저잣거리 호랑이를 세 번 전함) 삼인언이성호(三人言而成虎:세 사람이 말하여 호랑이를 만들어냄) 등도 다 같은 말이다. (한비자, 내저설 편 전국책 위책 혜왕 편) 등에 나온다. 전국시대 위나라 혜왕(惠王)때에 있었던 일이다. 위나라의 중신 방공이 태자와 함께 인질로 조(趙)나라의 한단으로 가게 되었다. 출발을 앞두고 방공은 혜왕을 찾아갔다. 전하 지금 어떤 사람이 저잣거리에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하면 믿으시겠습니까. 방공의
물방울이 돌을 뚫는다. 곧 적은 물방울이라도 끊임없이 떨어지면 돌에 구멍을 뚫을 수 있듯이, 작은 노력이라도 끈기 있게 지속하면 큰일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점적천석(點滴穿石)이라고도 한다. 송대(宋代) 나대경(大經)의 학림옥로에 소개돼 있다. 이밖에 작은 것이 모여 큰 것을 이룬다는 뜻의 다른 고사로는, 수적성천(水積成川:물이 모이면 내를 이룸) 우공이산(愚公移散:우공이 산을 옮김) 적수성연, 적토성산, 적우침주(새털이 쌓이면 배를 물 속에 가라앉힐 수도 있음) 등이 있다. 북송(北宋)때 장괴애(張乖崖)라는 사람이 있었다. 숭양현령으로 있던 그는 어느 날 관아를 돌아보다가 한 말단 관원이 창고에서 나오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장괴애를 보고 흠칫 놀랐다. 아무래도 거동이 수상하다고 여긴
`마부작침` 도끼를 갈아서 바늘을 만든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참고 노력하면 언젠가는 반드시 성공한다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끈기있게 학문이나 일에 정진하는 것을 비유할 때도 쓴다. 철저성침(鐵杵成針:쇠공이로 바늘을 이룸)·마저작침(절굿공이로 바늘을 만듬)·마저성침(磨杵成針)이라고도 한다. 당서(唐書) 문원전 방여승람 등에 소개돼 있다. 시성(詩聖) 두보와 함께 쌍벽을 이루었던 시선(詩仙) 이백은 어렸을 때 아버지를 따라 촉(蜀)땅의 성도(成都)에서 성장했다. 그때 그는 학문을 대성하기 위해 상의산(象宜山)이란 곳에 들어가 공부했다. 어느 날 공부에 싫증이 난 그는 산을 내려와 집으로 가는 도중에 어느 냇가에 이르러 한 노파를 만났다. 그런데 노파가 무엇인가를 바위에
`천재일우(千載一遇)` `천재일우(千載一遇)`란 천 년에 한 번 만나는 기회, 곧 다시 만나기 힘든 좋은 기회를 이르는 말이다. `천재일시(千載一時)`, `천세일시(千世一時)` 등도 다 같은 뜻이다. 문선(文選) `삼국명신서찬`에 나오는 말이다 동진시대의 학자로 원굉이란 이가 있다. 그는 빈한한 생할을 하던 젊은 시절 어느 날 밤 자작시를 낭송하고 있다가 장군 사상(射尙)의 눈에 띄어 발탁되었으며 그후 환온 밑에서 서기(書紀), 이부랑 등 동양태수 등을 지냈다. 원굉은 뛰어난 저술가로서 후한기 후한기죽림명사전 등을 저작하였고 그 외에도 많은 시문을 남겼는데, 그중에서도 문선에 수록된 삼국명인서찬 이 유명하다. 이것은 삼국지에서 위촉오의 명신 20명을 뽑아서 그 행장을 찬양한 것인데 그중
중석몰촉(中石沒鏃) 중석몰촉(中石沒鏃)은 쏜 화살이 돌에 깊이 박힘을 의미한다. 돌을 호랑이로 오인하고 쏘았더니 화살이 돌에 꽂혔다는 고사에서 비롯된 말로 곧 정신을 집중하여 전력을 다하면 놀라운 힘을 발휘 할 수 있음을 뜻 하는 말이다. 원말은 사중석몰촉. `화살을 쏘다`라는 뜻이다 또는 `석석위호``석석음우`등으로 쓰이기도 한다 `사기` 이장군전 여씨춘추 한시외전 등에 전한다 전한(前漢) 문제(文帝) 때 이광(李廣)이라는 뛰어난 무장이 있었다. 어느날 그는 들판을 지나다가 저만치서 몸을 웅크리고 있는 호랑이를 발견했다. 그는 숨을 죽이고 온 신경을 집중하여 활을 힘껏 당겨 쏘았다, 화살은 명중 했으나 웬일인지 호랑이는 화살이 박힌 채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상히 여긴 그가 다가가 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