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의 묘를 지키고 제사 지내는 재사(齋舍)는 조상숭배가 삶의 일부분인 조선시대는 어떤 가치기준보다 우선했다. 또한 거대한 문중의 단합과 세 과시도 된다. 여러 제도와 가치기준이 변해도 조상숭배만큼은 형식적이라도 이어질 것이다. 안동은 어느 지역보다도 혈연으로 연결된 강한 유대감과 조상숭배는 거의 종교적인 수준이라 유독 재사가 많다.#. 진성이씨 도솔원 재사하늘도 코로나에 감염되었는지 예전 같지 않게 지리한 장마가 이어지고 있다. 전국적인 장마로 경주 집을 나설 때도 빗방울 정도였는데 영천, 군위, 의성을 지날 때는 쏟아지는 폭우에
충과 효는 빛바랜 전통이라고 하지만 인간이 살아가는데 최소의 단위가 가족이라면 최대의 단위가 국가이다. 그 국가를 지탱하는 것도 가족과 사회이고 국가는 가족과 사회를 보호하면서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충과 효의 갈림길에서 어떤 행동을 취하느냐가 그 사람의 진면목이 나타난다. 원주 변씨들의 충과 효를 실천한 안동 동호정과 간재 종택을 살펴보자.#. 원주 변씨 시조 변안렬과 굴불가“내 가슴에 구멍 뚫어 동아줄로 길고 길게 메어/ 앞뒤로 끌고 당겨 감키고 찢길망정/ 임 향한 그 높은 뜻을 내 뉘라서 굽힐 소냐.”“이
사람이 숭고한 것은 신념을 위해 죽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신념이 자신보다 국가나 더 나은 사회를 위해서라면 더욱 옷깃을 여미는 것이다. 단계 하위지(1412~1456)는 사육신중의 한 명으로 당시 유학자들의 최고의 가치인 불사이군의 원칙을 철저히 따른 것이다. 모든 가치기준은 시대마다 달라 그 시대상황을 우선 고려하고 지금의 시대와 견주어야 된다.그리고 멸문지하를 당했는데 후손은 어떻게 이어졌는가. 사육신 중 순천박씨 박팽년과 진주 하씨 하위지만 드라마보다 더 극적으로 후손이 이어진다. 그 하위지를 모신 창렬서원은 후손으로 명맥
지금은 건축가가 설계하고 건축주는 돈만 주기 때문에 건축주 자신의 혼을 담은 집이라기보다 건축가의 작품이다. 옛날 사람들은 건축주가 건축가였다. 스승 퇴계가 5채를 직접 터를 골라 지었듯이 제자들도 스승을 닮아 송암 권호문(1532~1587)도 자신의 뜻대로 집을 짓는다.문학하는 선비학자로 평생을 자연에 묻혀 살면서 덕망이 높아 송암을 모신 청성서원은 1608년(선조41)에 세웠다가 1767년(영조 43)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짓는다.#. 청운의 꿈을 접고충과 효가 절대적 가치를 차지하는 조선시대, 부모를 기쁘게 해드리는 최고의 효
우리나라 수많은 마을 중에 가장 많이 알려진 마을이 안동 하회마을이다. 우뚝 솟은 절벽, 마을을 감싸고 유유히 흐르는 강물에 옛 마을의 형태가 고스란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국난 극복의 명재상 유성룡이란 대스타 때문이다. 스승 퇴계가 건축에 깊은 애착을 가졌듯이 서애도 30살에 낙수(落水)의 서쪽 언덕 밑에 서당을 지으려 할 정도로 건축에 일가견이 있다. 뜻은 이루지 못했지만, 자신의 호를 서애(西厓·서쪽 언덕)라 했다. 서애는 풍산에서 옮긴 병산서원 장소도 정해주었고, 원지정사도 지었으며 말년에 옥련정사도 지었다. #. 흐르
우리나라 서원 중에서 가장 낭만적인 아름다움을 던져주는 서원이 병산서원이다. 이 병산서원은 속세의 극락같이 저만큼 앞에는 병풍이 두른듯 병산이 펼쳐져 있고 그 아래 강물은 소리 없이 흐느끼며 백사장을 적시고 흘러간다. 화산(花山), 이름하여 꽃의 산에 앉은 병산서원은 크지도 작지도 않게 알맞은 규모로 당당하게 앉아있다. 많은 사연을 안고 기막힌 환상적인 조화를 이루어 자연과 조화로운 이상적인 건축의 실체를 여실히 보여준다.#. 드라마틱한 병산서원병산서원 가는 비포장 길 입구에 들어섰다. 산허리를 끼고 도는 비포장 길은 고맙기도 하면
#. 여강서원에서 호계서원으로1575년(선조8년) 여산촌(안동댐으로 면자체가 없어진 월곡면 도곡동) 오로봉 아래 백련사 절터에 지방 유림들의 공론으로 퇴계의 위폐를 봉안하고 후학들에게 학문을 강론하기 위해 여강서원을 건립한다. 그러다가 1605년 대홍수로 유실되어 1606년 북쪽 100보 위에 다시 지었다. 1620년(광해군12년) 추가로 위폐가 봉안된 학봉 김성일(1538~1593)과 서애 유성룡(1542~1607)의 좌 배향 자리다툼이 시작된다. 즉 누가 상석인 퇴계의 좌 배향에 영의정(국무총리) 지낸 서애를 두느냐, 관찰사(도
이 땅에 유학이 들어온 삼국시대부터 훌륭한 유학자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유교적 이상사회를 꿈꾸는 청정한 마음으로 향촌사회를 교화하고 학문을 닦을 때까지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날수록 타락의 구렁으로 빠진다. 급기야 향촌과 관위에 군림하면서 온갖 피해를 주어 국가의 기틀까지 흔드는 지경에 이른다.#. 서원의 발생과 비약적인 발전삼국시대부터 도입된 유학은 시험(과거)으로 관리를 선발하기에는 공평하면서 효율적이었다. 고구려 말기에 도교가 수용되어 세력을 떨쳤지만 삼국시대와 고려시대는 불교가 국교였다. 조선은 고려 말에 타락
학봉 김성일을 떠올릴 때마다 마음이 무겁다.임진왜란과 학봉은 피와 살 같이 붙어다니는 인연의 원죄로 고통스런 아픔이다.의성 김씨 문중의 입장에서는 퇴계학을 정통으로 받은 긍지이고 자랑스러운 선조이다. 퇴계와 서애, 학봉은 오늘날까지 추앙받고 있는 안동의 3대 스타이다. 이 학봉종택은 지금의 자리에 있다 오른쪽 멀지 않은 곳에 옮겼다가 다시 지금의 자리로 옮겨온 것이다. #. 임진왜란과 학봉 김성일1592년 4월13일 20여 만 명의 왜군이(왜군의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는 700여 척의 배에 1만8천 명) 부산에 상륙한다. 부산과 동
현대 삶의 조건에서 주거지역은 산지보다 넓은 평지를 선호하지만, 농경사회에서는 산이 있고 냇물이 흐르는 산골이 살기가 더 좋았다. 영양은 높고 낮은 산이 감싸고 맑은 냇물이 흐르면서 바닷가에서도 적당히 떨어져있는 그야말로 현실 속에 무릉도원을 꿈꿀 수 있는 곳이다. 영양은 글자 그대로 영양가 높은 곳이다. 그래서 병자호란의 치욕을 당하자 1640년, 석계 이시명과 장계향은 영해에서 가솔 30여 명을 데리고 이 마을에 정착한다. 그때부터 재령이씨 집성촌이 된다. 이런 연유로 주곡고택과 유우당고택을 석보 주남리에서 이곳으로 옮겨온다.
댐으로 마을이 수몰되고 대규모 공단으로 마을이 사라질 때 옮기는 고택이 많지만 예전부터 우리의 한옥집들은 필요에 따라 많이 옮겨지었다. 안동의 경당 종택도 인근 마을에서 옮겨지은 것이다. 집은 누가 살았고 어떤 사람이 태어난 것도 중요하다. 경당종택은 퇴계학을 정통으로 이어받은 경당 장흥효가 나고 살았고, 경당의 무남독녀 딸로 최초의 한글 요리서 ‘음식디미방’의 주인공 장계향이 태어나 자란 곳이다.#. 시대를 뛰어넘는 아버지와 딸의 파격적인 아름다움세상의 모든 아버지들 대부분은 딸을 사랑하고 아낀다. 그러나 시대의 상황이 남존여비.
물은 이념을 초월하여 국경을 넘고 인위적인 행정구역을 무인지경으로 거침없이 달려간다. 산이 막히면 돌고 돌아 산을 배려해주고, 절벽에 닿으면 몸으로 부딪치되 되돌아 나오는 수용과 공존을 반복하면서 유유히 흘러간다. 그래서 안동 임하댐으로 안동 지역만 수몰된 것이 아니라 이웃 청송 진보면 일부도 수몰된다. 갈암 이현일 종택도 청송 진보 광덕마을에서 영덕 창수면 인량마을로 1992년 옮겨 짓는다. 유서 깊은 종택을 옮길 때는 함부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 여러 여건을 고려한다. 갈암이 인량마을에서 태어나 유년시절을 보냈고 태실을 묻은 곳이
#. 구미 해평과 일선리 문화재마을 가는 길안동 임하댐으로 수몰지역인 무실, 박곡, 용계, 한들 마을에서 70여 가구의 대규모로 옮겨온 일선리 마을을 입체적으로 보기 위해 군위군 소보면 시골 산길로 하여 해평으로 들어갔다. 해평(海平), 이름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직역하면 바다 평야다. 내륙이지만 산을 등지고 흘러내리는 물은 습문천이 되어, 기름진 평야를 끼고 유유히 젖줄 되어 흘러가는 낙동강에 온몸을 맡긴다. 두 물줄기가 기름진 충적평야의 옥토를 만들어 주는 곳이라 이름에 걸맞다. 해평에서 일선리 문화재 마을에 가기 전에 길 좌,
안동댐과 같이 임하댐 물속에도 여러 마을과 집성촌이 있었다. 대부분 그대로 수몰되고 일부고택들만 다른 지역으로 옮겨지었다. 그러나 온갖 사연과 애환이 묻어있는 정겨운 집들과 골목까지 옮겨온 것이 아니기에 그 아련한 향수는 고향 잃은 실향민들의 가슴에 멍들어 있을 것이다. 그중 박곡, 무실(수곡)마을의 전주 류씨 무실 집성촌의 집들 중에 수몰지 근처로 옮겨지은 기양서당, 무실 종택과 수애당, 그리고 강(임하댐) 건너 언덕으로 옮긴 정재 종택을 찾아 나섰다.안동에 8주째 매주 가다 보니 봄을 두 번이나 만끽하는 즐거움을 누린다. 남쪽
임하댐으로 의성김씨 지례파 집성촌 지례마을이 수몰되면서 마을위의 산으로 옮겨지은 고택들이 ‘지례예술촌’이라면 나머지 고택들은 각자의 길을 가듯이 여기저기 흩어져 옮겨지어졌다. 그러나 머나먼 타향객지에 떠난 것이 아니라 수구초심(首丘初心), 즉 근본을 잃지 않고 죽어서라도 고향땅에 묻히고 싶어 하는 마음으로 의성김씨가 임하에 뿌리내린 내 앞(천전)마을이나 옆 마을로 옮겼다. 국탄댁과 오류헌 고택은 근처 임하마을로, 치헌 고택은 내앞 마을로 옮겨지었다.코로나19 때문에 전국이 우울한데 안동은 큰 산불까지 겹쳐서 가는 마음 찹찹하다. #
할아버지의 재력과 아버지의 무관심, 엄마의 정보력이 지금시대에 최고의 조건이라지만, 산업화 이전 1980년대 까지만 해도 잘난 조상 덕에 ‘에헴’ 하면서 폼 재고 살았다. 주로 조선시대 학식이나 벼슬로 이름을 알린 조상이 한명 나오면 중시조가 되어 그 이름의 음덕으로 오늘까지 긍지를 갖고 산다. 중시조에서 시조보다 더 큰사람이 안 나오면 경주최씨 설씨 등과 같이 신라 최치원과 원효와 설총까지 소급하여 이어온다. 해남 윤씨들은 고산 윤선도로, 손소, 손중돈, 회재 이언적은 양동 손씨, 양동 이씨의 후손들은 자부심을 안고 살았다. 안동
#. 벚꽃 속에 파묻힌 안동민속촌과 열녀 서씨봄을 더욱 봄답게 하는 벚꽃들은 잎에게 물려준 경주와 달리 안동에는 벚꽃이 절정을 이루고 있었다. 대단한 독립운동가 석주 이상룡의 생가 임천각과 군자정, 7층 전탑을 가로막아 철길을 낸 일제의 만행은 흉물이지만, 강 건너 민속촌 주위는 울긋불긋 꽃동네를 이루고 있었다. 80~90년대 수학여행이나 산업시찰, 답사 때 필수코스가 춘천의 소양강댐과 안동댐이었다. 안동댐을 의미 없이 보고 민속촌으로 갔다.안동댐 수몰지에서 옮겨온 고택들 대부분이 기와집들이지만, 안동민속촌에는 초가집들이 몇 채 옮
흔히 죽음에 대해서 아무도 모르는 3가지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를 모른다는 것이고, 누구나 아는 것 3가지는 누구나 죽고, 오는 순서 있어도 가는 순서 모른다는 것과 아무도 동행해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그러나 죽음을 스스로 선택하는 사람도 있다. 인생은 무엇을 먹고 사는 것 보다 어떻게 사느냐가 더 중요하듯이 국가와 민족을 위하던 자신을 위하던 죽음은 숭고한 의미를 지닌다. 이육사!그 이름만으로 우리민족의 가슴에 뜨거운 불덩어리 기운을 안겨 주었다. 이육사가 나고 자라 혁명적 자양분을 흠뻑 받았던 고향 원촌마을과 묘소, 안
사람은 위기에 처했을 때 어떤 처신을 하는가가 그 사람의 진면목을 알 수 있다. 특히 나라를 잃었을 때 조국과 민족을 배반하고 자신의 영달을 꾀한 짐승보다 못한 사람이 있는가하면, 전 재산을 독립운동에 쏟으면서 자신의 목숨도 버린 가슴 뭉클한 독립투사도 있다. 사람을 보는 기준은 다양하지만 죽음부터 역 추적해 보면 그 사람의 진면목을 강렬하게 알 수 있다. 안동은 기초단체로는 제일 많은 353명이 독립운동으로 포상 받은 독립운동의 성지다.향산 고택과 치암고택 가기 전에 향산 이만도((1842~1910) 선생이 순국했던 예안 인계리
집은 장소와 터가 중요하다.아무리 좋은 집이라도 본래의 장소를 떠난 집은 무미건조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진기한 보물들을 모아놓은 박물관을 ‘명작들의 공동묘지’라 하지 않던가. 오늘 가는 오천문화재단지의 군자마을도 1972년 안동댐 수몰로 광산 김씨 예안파의 중요한 고택 20여 채를 옮겨놓은 곳이다. 같은 수몰지에서 옮겨온 것이라도 농암 종택이 분천마을과 비슷한 상류의 가송리로 옮겼다면 군자마을은 인근 산중턱으로 옮겨와 주위의 자연환경은 볼품 없지만, 집 그 자체에서 풍기는 고택의 향기는 대단하다. 우선 군자마을 주위를 살펴보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