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AI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인공지능 바둑 프로그램 알파고(AlphaGo)가 이세돌과의 대국에서 완승하고, 이세돌이 신의 한 수로 승리했던 드라마를 만들 때만 하더라도, 인류에게 남아 있는 시간이 조금은 더 남아 있으리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AI는 현실 세계 바깥의 샌드박스 속에서 빠르게 발전하면서, 어느새 인류가 몇천 년의 시간을 들여 세워 올린 문명의 수준을 따라잡고 있다. 고작 몇 개의 단어만 입력하면 내가 원하는 그림을 그려주는 수많은 일러스트 AI와 앨런 튜링이 제안했던 컴퓨터와 인간의 대화에서 자연스러움에 대한
조지 오웰(George Orwell·1903~1950)의 글은 선명하다. 그의 문장을 읽고 있자면, 쓸데없는 감상 같은 것에 빠질 일은 절대로 없다. 문장이 짧고 간결하다는 의미와는 조금 다르다. 글쓰기를 가르칠 때, 무조건 긴 문장보다는 짧은 문장을 쓰라고 가르치지만, 그것은 길고 느려터진 사유를 다루기 어려워하는 학생들에게나 하는 소리다. 생각이 복잡해질 대로 복잡해지면 문장도 당연히 길게 늘어지게 마련이다. 길고 복잡한 사유를 짧은 문장에 담아낼 도리는 없다. 조지 오웰은 보통 짧은 문장을 쓰지만, 그것은 보통 자신의 눈에 들
#1 근대 이후 한국에서 독서의 사유를 처음으로 전개했던 이는 우리가 이른바 해외문학파로 지칭하는 독문학자 김진섭이었다. 물론 조선시대에 학자로서 책과 독서에 대해 논했던 사람은 수도 없이 많지만, 근대적인 의미에서 독서와 서적, 서재와 장서에 대해 본격적으로 말했던 것은 그가 최초였다. 그는 서적의 취미와 독서의 즐거움을 예찬하면서, 독서를 중심으로 한 사유를 자신의 수필에 담아냈다.#2 세밑에는 너무 진지한 책보다는 가벼운 책이 좋다. 2020년에 작고한 존 르 카레의 스파이 소설 몇 권이라면 추운 겨울밤을 지내기 적절할 것이다
지금, 우리는 책의 시대를 지나가고 있다. 한때 인류 지식 문명의 거의 전부였던 책은 이제는 더 이상 가장 유력한 지식 미디어가 아니다.석판에서 파피루스를 거쳐, 양피지, 종이로 옮겨온 무언가의 빈공간에 문자를 기록해온 인간의 활동들, 그리고 그것들을 겹쳐 한쪽을 묶은 책이라는 미디어가 인간에게 남겨준 문명적 수혜는 이제 전자문명이라는 다른 종류의 문명으로 전환되어 가고 있다.물론, 책의 시대가 저물어가고 있다고 해서, 책이 아예 소멸될 것이라는 진단은 맞지 않다. 책은 물성을 가지고 공간을 점유하며, 인간의 손에 뿌듯하게 들어오는
인류의 역사에서 신의 구원을 찾아 순례를 떠났던 사례는 수도 없이 많다. 종교적 대상이 탄생한 이른바 신성한 영역에 발을 들여보고자 그토록 먼 길을, 심지어 죽을 위기까지도 넘겨 가며 찾아가 마침내 보고 오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단순한 호기심을 해결하기 위한 여정이 아니라 어떤 필연적인 이끌림이라고 해도 좋을 만한 것이라 단지 신앙의 유무나 종교의 형태를 넘어서는 울림을 준다.사실, 순례(巡禮)라는 단어가 지칭하는 어떤 대상을 돌아보는 행위 속에는 이미 그 대상에 대한 예의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신적인 대상이 남긴 흔적을 따라
대학에서 학생들과 강의를 하다 보면, 종종 정해져 있는 길에서 벗어나 도저히 해결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질문을 의도적으로 던질 때가 종종 있다. 문학 전공의 소설론 수업에서 늘 그렇듯 진행되기 마련인, 소설의 플롯이나 시점 같은 이야기들에 학생들이 더 이상 눈을 빛내지도 않고, 선생 역시 슬슬 이야기가 지루해질 때쯤이 되면, 슬며시 이런 질문을 던져 본다. 지금 당신의 마음속에는 어떤 생각이 흘러가고 있는가. 그것은 어떤 형태인가, 또 어떤 색깔인가. 그래, 지금 이 지루한 이야기를 들으며 어딘가 너머에 있는 세계를 더듬으며 딴
요즘엔 문학 전공자가 아니고서는 ‘신소설’이라는 단어에는 그다지 익숙하지 않으실 것만 같다. ‘신소설’이란 이인직의 ‘혈의누’나 이해조의 ‘빈상설’, ‘월하가인’, 최찬식의 ‘추월색’ 같은 소설들처럼 대략 1906년 무렵부터 10~20년 정도를 풍미했던 소설 양식을 가리킨다. 학창 시절 문학 수업에서 들었던 희미한 기억을 떠올리실 분들도 계실지 모른다.애초에 뉴웨이브, 새로운 바람을 의미했던 ‘신파(新派)’가 낡디낡고 판에 박힌 멜로드라마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고, 조선 이래의 고소설과는 차별되는 새로운 ‘신소설’이 이제는 백 년도
가을이 되면, 우리는 언제나 팔꿈치 옆으로 불어오는 바람의 차가움으로 계절이 변화하는 기색을 알아채게 된다. 에어컨이 만드는 인공의 바람을 제외하고는 도통 바람의 시원함이라는 것을 경험하기 어려운 무더운 여름을 이제 막 지나고 난 뒤여서인지, 그렇게 선뜻 불어오는 바람이라는 것은 늘 반갑게 마련이다. 하지만, 서서히 열기가 올라가는 봄, 여름 사이의 시간과는 달리, 무더움에서 선선함으로 바뀌는 가을이라는 계절의 시작에서는 늘 시간의 변화가 느껴져 무언가 조금 아쉬운 기분이 되곤 한다. 가을이라고 해서 특별한 계절은 아니겠지만, 그
요즘 주변에서 더 이상 책을 가까이 하지 않는 세대들의 등장과 그로부터 초래된 문해력의 위기에 대한 우려들이 심심치 않게 들려오곤 한다. 한 세대 내에서 일상적으로 쓰던 말들이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새로운 말들로 채워지는 것은 한 세대가 스러지고 다음 세대가 등장하는 당연한 시대의 변화에 해당한다. 그럼에도 이 위기에 대한 예감을 단지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것은 이 위기가 자연스러운 변화라기보다는 인류가 지금까지 세워 올리고 영위해왔던 문명들이 본질적으로 바뀌어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진단에서 비롯된다.지금 우리에게 제기되고 있는
베스트셀러나 스테디셀러라는 자본주의 문화상품으로서 출판된 책을 가리키는 개념들은 꽤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책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서점의 서가에 요즘 많이 읽히는 책들에는 관심을 갖게 마련이지 않는가. 도시 중심의 커다란 서점에서 많이 팔린 순위대로 진열해둔 책들을 보면서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여론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으며, 사람들의 마음은 어떠한 것들로 구성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가늠할 수 있던 지금보다 조금 더 단순한 시대에 베스트셀러의 의미는 좀 더 각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우리가 읽고
근대의 예술가상을 떠올리자면, 어쩐지 열렬히 불타오르고 금방 사그라들고 만 비운의 작가들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단지 틀에 박힌 스테레오타입화된 사고는 아닐 것이다. 어떤 시대의 공기는 늘 그 공기를 호흡하는 사람들의 묵지근하게 마음을 내리누르고 있지만, 적어도 근대의 예술가들이란 그 시대의 공기를 자연스레 호흡하기보다는 새로운 공기를 불어올 바람을 찾아다니거나 그것을 만드는 사람이니 말이다. 지금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예술가’들 중 대부분이 그의 시대에 앞서 있었거나 혹은 뒤서 있어서 아무런 평가도 받지 못하다가 한참 나중에서야
여름의 책 읽기란 쉽지 않다. 마음먹고 책 몇 권을 싸 들고 시원한 카페로 나와도 종일 후텁지근한 여름날의 공기 속에 파묻혀 있던 마음은 선선히 글자를 읽어내려 들기 어렵다. 어제 다 끝내지 못한 일 생각이나 이런저런 걱정들을 하다 보면 어느새 눈은 글자의 표면 위 같은 곳을 한참 맴돌고 더이상 진도가 나가지 않게 된다. 한여름의 열기에 한 번 데워진 마음이란 깜짝 놀랄 만큼 시원한 방 안에 들어와도 쉽사리 차분해지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여름의 책 읽기는 쉽지 않다. 게다가 인간의 감정에 다가가는 내용을 가진 책이라면 더욱 더 그렇
인간이 무언가를 기록하여 남기려 했던 필사문명의 시대로부터 인쇄문명의 시대로 이어지면서 전성기를 구가했던 문자를 중심으로 한 글쓰기와 읽기라는 인간 지식의 관행은 이제 또 다른, 우리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곳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다. 디지털 이미지와 그것을 주고받을 수 있는 매체에 의해 새롭게 도래된 구술문명의 시대가 열리고 있는 것만 같다. 모두가 ‘지금 현재’에 붙들려 그것을 소비하는 시대에, 인간이 지금까지 쌓아 올린 문학이나 역사, 철학은 과연 어떤 운명을 맞이하게 될 것인가. 혹은 질문을 바꾸어, 인간이 문자를 가지
인류에게 있어 ‘과학’이라는 단어는 마법술과 같이 언제나 각별한 의미를 가지고 기능해 온 것만 같다. 우리가 모두 느끼고 있듯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삶이란 언제나 예측불허이고, 결정 불가능성 속에 놓여 있게 마련이라, 마찬가지로 그렇게 불안하고 두려운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하다. 그럴 때마다 거대한 문자로서의 ‘과학’은 인간이 그런 삶에 일말이나마 단단한 확신의 토대를 마련해온 것이다. 다윈의 진화론의 영향을 받은 “적자생존!”이라는 선명한 선언을 인류 사회로 옮겨 제국주의 시대를 여는 이론적 토대가 되었던 허버트 스펜서의 사회
어딘가 낯선 곳에 처음으로 여행을 하러 갈 때면 그 지역에 관련된 옛사람의 글을 찾아 읽으려고 노력하는 편이다.관동지방을 돌아다닐 때는 정철의 ‘관동별곡’을 꺼내어 읽는다던가, 지리산 근방을 여행할 때는 최남선의 ‘심춘순례’를 꺼내어 읽는다던가 하는 게 그런 것이고, 대구를 갈 때는 대구에서 서울 올라가는 기차 안에서 고향을 떠나온 사람과 만났던 이야기를 다룬 현진건의 소설 ‘고향’을 읽거나 군산에 갈 때는 개항장 군산에서 벌어진 일을 다룬 채만식의 ‘탁류’를 읽고 가는 식이다.물론 아직 옛사람들의 글에 대해서는 공부가 적어 여행하
“그림도 없고 대화도 없는 책을 왜 보는 걸까? 그런 책이 무슨 소용이람?”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시작 부분에 앨리스는 언니와 함께 강둑에 앉아 있다가 언니가 읽고 있던 책을 흘끔거리고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어른들만 읽던’ 글자만 있던 책이 지루했던 앨리스는 환상적인 이미지들이 넘치고 있는 꿈 속 세계로 토끼를 따라 들어가게 된 것이다. 루이스 캐럴 역시 이 아이들을 위한 환상의 동화의 삽화를 소설만큼이나 귀중하게 골라 넣었다. 어쩌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독자들을 끌고 가는 것은 이야기의 힘이 아니라 그
돈키호테(Don Quixote)라고 하면, 우리는 바로 시대착오의 전형적인 인간을 떠올리곤 하지만, 미겔 데 세르반테스(Miguel de Cervantes·1547~1616)가 1605년 처음 발표한 돈키호테의 1권 ‘기발한 이달고 돈키호테 데 라만차’는 말하자면 소설의 원형이자 현대적인 소설의 문을 열어젖힌 최초의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아마 독자분들은 납득하기 어려운 분도 계실지 모르리라. 아동문학전집이나 세계문학전집 사이에 끼워 있던 축약판의 돈키호테를 읽으셨던 분이거나, 비루먹은 말 로시난테를 몰아 풍차를 향해 돌진하는 돈키
무언가를 이름지어 부를 수 있는 언어의 힘이란 결코 간단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세계를 창조해내는 힘을 갖는다. 시에서 메타포, 즉 은유가 갖는 힘이 그토록 대단한 것은 그것이 단지 시라는 문학 장르의 수사적 방법이기 때문이 아니다. 이전까지 연결되어 있지 않았던 언어를 현실적 대상으로 연결하는 시인의 통찰력과 언어적 창조력은 그 언어를 둘러싼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낸다. 이제는 낡은 것이 되어 버린 “내 마음은 호수”라는 은유조차, 호수를 지날 때 문득 떠오르지 않는가. 그 언어가 존재의 집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기계와 상호작
인간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수많은 선택의 순간에 놓인다. 점심으로 무엇을 먹을까 하는 작은 선택부터 자신의 삶을 결정할 중요한 선택까지. 그런 의미에서 선택이란 인간에게 주어진 운명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선택에는 언제나 그에 따른 결과가 기다리고 있고, 그 결과는 타인이 대리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의 선택에는 언제나 내가 선택하지 않은 선택지에 대한 미련과 환상이 해묵은 것이지만 그렇다고 하지 않을 수 없는 이야기처럼 남겨져 있게 마련이다. 죽음이냐, 복수냐 하는 운명적인 선택을 두고 고민했던 햄릿의 고민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미스터리’란 어쩌면 아무 트릭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하나의 그럴 듯한 역설에 불과하다.추리소설에서 호기심을 자극하는 사건도, 그 사건을 일으킨 범죄자도, 범죄에 얽혀 있는 흥미로운 트릭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미스터리라고 불러야 할 이유가 어디에 존재하는가. 요즘 한국에서도 추리소설 독자들이 늘어나고 있지만, 추리소설이란 언제나 사건의 발생과 해결 사이에서 일어나는 서사를 담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그 장르적 정체성을 구성한다. 아마도 추리소설만큼 이 반복적 규칙성에 고집스러운 장르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