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석 정본 작업이상옥 선생님을 처음 뵌 것은 지난 2012년 5월께로 이효석 전집을 재출간하는 일에 참여하게 되면서이다. 전집을 처음 출간하는 것도 아니고 재출간하는 데 이렇게 많은 시간이 걸린 것은, 원문과 이본 등을 비교하고 교정하여 원문에 가장 가까운 정본(定本)을 출간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검토한 내용을 가지고 매주 만나 토론하여 텍스트를 확정하는 이 지난한 작업에 참여하는 사람은 채정 선생님, 그리고 대학원 동료 두 명, 그리고 나, 이렇게 다섯 명이 팀이 최종적으로 팀을 이끌게 되었다. 이상옥 선생님은 70대에 뵈었는
시인 최승자는 1952년 충남 연기에서 태어나 고려대 독문과를 졸업하고 1979년 ‘문학과 지성’ 가을호에 다섯 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시인활동을 했다.‘이 시대의 사랑’(1981), ‘즐거운 일기’(1984), ‘기억의 집’(1989) 등의 시집을 발표했고 이 시집들은 모두 베스트셀러에 올랐다.그녀는 많은 시인들에게 영감과 영향을 주었다. 진은영 시인은 언젠가 최승자를 ‘우리들의 시인’이라고 칭한 바 있다( 진은영, ‘우리는 매일매일’, ‘시인의 말’ 중).그녀는 1994년 국제작가회의(International Writing Pro
△제4차 산업혁명과 3D 프린터제3차 산업혁명은 아날로그 정보 중심의 사회를 디지털 중심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를 통해 정보를 담을 수 있는 특정한 매체나 디바이스를 여러 개 가질 필요 없이 한 곳에 담을 수 있었다. 그것이 컴퓨터다. 이런 정보를 네트워크를 통해 빠르게 전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보자면 제3차 산업혁명의 중심에는 디지털, 컴퓨터, 인터넷이 있다. 그리고 이런 시대를 이끄는 물질적 기반은 반도체다. 반도체는 정보의 저장용량을 증대시키고 정보 처리속도를 향상시킴으로써 디지털이 일상화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그렇
희곡이나 시나리오를 읽을 땐 배우들의 목소리를 상상적으로 떠올려 보면 좋다. 내가 연출가가 되어서 이 장면은 이렇게 연출하면 되겠구나 이런 생각을 하면서 읽으면 훨씬 재미있다. 얼마 전엔 사람들과 모여서 이런 희곡 읽기를 했다. 사람들과 같이 책을 읽는 일은 참 좋다.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들을 만날 수 있으니까 말이다. 많은 희곡을 읽었지만 그 중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과 몰리에르의 ‘상상병 환자’이다.‘상상병 환자’가 기억에 남는 이유는 이 희곡을 번역한 정연복 선생님이 우리의 책 읽기를 풍문
△문학과 예술에서의 모방그리스 철학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문학과 예술의 핵심을 ‘미메시스’ 즉 모방으로 보았다. 철학자의 말이라고 해서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늘 모방하며 재현하고 있으니까.엘라 윌콕스(Ella Wheeler Wilcox ·1850~1919)의 시 ‘고독’은 “웃어라, 온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울어라, 너 혼자 울게 될 것이다”로 시작한다. 이 생소한 시인의 시는 영화 ‘올드 보이’를 통해서 널리 알려졌다. 이렇게 멋진 대사는 따라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미메시스는 곧 따라하기다.당황스럽거
영어의 댄디(dandy)는 ‘멋쟁이’를 뜻하며 댄디즘(dandyism)은 ‘멋쟁이 취미’를 뜻한다. 하지만 이들은 천박한 멋쟁이가 아니라 속물주의를 배격하며 정신적 귀족주의를 자칭하는 ‘진짜’ 멋쟁이를 일컫는다. 이러한 멋쟁이들은 지금도 프랑스에 많이 살고 있는데, 과거에는 조금 심했던 것 같다. 그들은 얼마나 멋쟁이였을까? 이를 위해서라면 댄디에 대한 묘사를 한 번 따라가 보는 것이 좋겠다.“귀금속 세공사 르콩트가 세공했다는 발작의 지팡이는 신화가 되었다. 끝이 금으로 된 그의 등나무 지팡이 끝에는 수많은 터키석이 박혀 있고 중앙
△쓸모없는 기계여기 디지털을 잘 설명할 수 있는 기계가 있다. 이 기계를 본 공상과학소설가 아서 클라크(Arthur C. Clarke)는 이 장치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이보다 더 간단할 수 없다. 시거 상자 크기의 조그만 나무상자위에 한 개의 스위치가 달려있다. 만약 스위치를 올리면, 분노의 목적성 있는 진동이 일어난다. 뚜껑이 천천히 열리며, 바닥에서 손이 떠오른다. 그 손은 스위치를 아래로 내리고 상자 안으로 도로 들어간다. 관이 최후에 닫히듯이 뚜껑은 철컥 닫히고, 진동은 멈춘 후에 이전의 평화로움으로 돌아간다.”클라크 아
△1980년대의 알레고리로서의 ‘살인의 추억’봉준호 감독이 칸에서 황금 종려상을 받았다. 봉준호는 그 이전부터 주목을 받았는데, 그를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영화가 화성 연쇄살인 사건을 소재로 한 ‘살인의 추억’이다. 이 영화가 상영되었을 때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던 것은 이 소재의 특수성도 있었을 것이나 무엇보다 제목에서 오는 낯섦 혹은 불편함 때문이었다. ‘살인’이라는 말과 ‘추억’이라는 이 어울리지 않는 말의 조합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비록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연쇄 살인자가 피해자 발견 장소에 다녀갔음을 암시함으로
△‘노킹 온 헤븐스 도어’혼자 간 영화관에서 본 기억도 게슴츠레한 ‘노킹 온 헤븐스 도어’라는 영화를 떠올린다. 뇌종양을 앓고 있는 루디와 골수암으로 죽어가는 마틴은 죽음의 언저리에서 바다를 향해 달려간다. ‘천국은 너무도 지리멸렬하여 바다이야기 밖엔 할 이야기가 없다’라는 이상한 믿음과 함께. 이것은 어쩌면 독일에서는 가능한 이야기인지도 모른다.독일에서 바다까지는 너무도 멀고, 그들은 겨우 바다에 이르고, 파도소리는 너무도 청명하여 어떤 기계음으로도 그것을 대신할 수 없다. 엄마가 섬 그늘에 굴을 따러 간 사이 혼자 남은 아가가
△유행은 강물처럼 흐른다산업혁명은 값싸고 질 좋은 옷을 대량으로 제공했고, 덕분에 많은 사람이 옷을 입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인간의 욕망은 멈출 줄 모르고 흐르며 변화한다. 원시인은 입을 거리를 두고 ‘무엇을 실로 쓸 수 있을까’ 같은 가장 기본적인 것을 고민했다. 산업혁명시대에는 ‘어떻게 하면 옷을 대량생산할 수 있을까’를 생각했다. 모두 옷을 입게 된 지금, ‘어떻게 하면 편안하고 질 좋은 옷을 만들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 재화가 부족하고 소비가 많으면 물가는 상승하고 구매욕은 증가한다. 반대로 재화가 많고 소비가 적으면
△왜 우리는 억압에 저항하는가?‘인간들은 태어나자마자 기계들이 만들어낸 인공 자궁(Matrix)안에 갇혀 AI의 생명 연장을 위한 에너지로 사용된다. 인간의 즐거움, 슬픔, 분노 등 이런 것들이 AI의 에너지로 쓰인다. 그런 에너지를 얻기 위해 인간의 뇌세포에 매트릭스라는 프로그램을 입력시킨다.’이것은 1999년에 나온 ‘메트릭스(The Matrix)’라는 영화의 줄거리이다.이 매트릭스라는 프로그램은 현실과 꼭 같은데, 자신이 있는 곳이 현실이 아니라 프로그램 속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사실을 깨닫게
언젠가 황현산 선생님의 강연을 들은 일이 있다. 강의가 끝나고 질문시간이 있었다. (황현산 선생은 불문학자이자 문학평론가이다. 1945년 목포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에 입학해서 박사학위를 받고 그곳의 교수로 재직했다. 선생은 언뜻 배우 신구를 닮은 듯한 평안한 인상을 지녔고 말소리도 그윽하다. 학자로도 평론가로도 손색이 없다. 선생은 이 시대의 문장가로 그의 글을 읽으면 한 문장 한 문장이 몸속에 각인되는 느낌이다. 그의 책 ‘밤이 선생이다’를 추천한다.)그때 누군가 이런 질문을 했다. “선생님은 글을 읽다보면 사람들이 잘 사용하지
△물질이 사고를 결정한다우리는 흔히 역사는 발전한다고 말한다.이 말은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1770∼1831)로부터 왔는데, 헤겔이 쓴 정확한 단어는 ‘발전’이 아니라 ‘전개’였다.발전과 전개는 다르다. 발전이란 어떤 목표를 가지고 나아간다는 말이지만 전개한다는 말에는 그런 목표가 없다.역사가 전개된다는 의미는 더 나은 쪽이나 더 못한 쪽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단지 펼쳐진다는 말이다.인류의 문화는 진화한다. 이때 진화라는 말도 하나의 종이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갈
△블랙홀과학과 공학은 이렇게 말한다. ‘마음만 먹으면 풀지 못할 문제는 없다.’ 정말 그런 걸까? 최근 블랙홀 사진을 관측했다는 뉴스가 연일 화제가 되었다.이게 뭐 대단한 뉴스냐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간단히 말해 블랙홀은 어마어마한 중력을 가지고 있어서 빛마저 빠져 나올 수 없는 거대한 구멍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진을 찍는다고 할 때 물체가 방출하는 빛을 찍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빛을 비롯한 모든 파동을 삼켜 버리는 블랙홀 그야말로 방출하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고 오로지 흡수하는 것만 있는 블랙홀을 촬영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럼
1. 나오래전, 그러니까 거의 20년쯤 전에 나는 ‘좀머 씨 이야기’를 처음 읽었다. 아니 읽었다고 말하기도 민망한 것이 한 두어 페이지를 읽고는 덮어버렸다. 그 이유는 순전히 이 문장들 때문이다.“오래전, 수년, 수십 년 전의 아주 오랜 옛날, 아직 나무 타기를 좋아하던 시절에 내 키는 겨우 1미터를 빠듯하게 넘겼고, 내 신발은 28호였으며, 나는 훨훨 날아다닐 수 있을 만큼 몸이 가벼웠다. 정말 거짓말이 아니었다. 나는 그 무렵 정말로 날 수 있었다. ….중략…. 어쨌든 나는 그때 날 수 있었고, 내가 만약 외투의 단추를 풀고
△망각의 속도영화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의 공안부의 간부와 배관공은 이런 대화를 한다. 배관공으로부터 대화는 시작된다.“그 거북이 분명 어디서 본 건데….”“생각 안 나나?”“분명 어디서 봤는데….”“산다는 건 생각나지 않는 게 늘어가는 걸지도 몰라.”“왜 그런 말을 하시나요.”“아니, 그냥.”“방금 뭐라고 하셨나요?”“인생이라는 건 생각나지 않는 게 늘어가는 것. 어?…. 이게 아니잖아.”망각의 속도는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빠르다. 그러하다면 ‘생각나지 않는 것이 늘어가는 것’이 삶이 아니라 그러한 말조차도 잊어버리는
△미메시스: 배움의 작동 방식지금으로부터 1만2천여 년 전 인류가 수렵채집의 문명에서 농경 사회로 옮겨가는 인류문명의 시작기인 구석기시대의 원시인을 상상해 보자. 머리는 산발을 하고, 한 손에는 돌도끼나 창을 들고 있다. 그러면 그들의 스타일은? 트렌치코트를 입고 바람머리를 휘날렸을 리는 만무하다.수렵생활을 했던 원시인은 나뭇잎이나 가죽으로 몸을 가리고 살았을 것이다. 그런데 구석기시대의 유물 중에는 뼈로 만든 바늘이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 구석기시대에도 옷을 만들고 깁는 의류생활을 했으리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이력-나다이력은 신발을 뜻하는 ‘리(履)’와 역사를 의미하는 ‘역(歷)’이라는 한자를 사용한다. 그러니 이력은 말 그대로는 “신발을 끌고 다닌 내력” 정도다. 그래서 ‘이력’은 발자취 곧 ‘족적’이다. 이 단어는 흔히 ‘나다’라는 동사와 결합한다. ‘이력(이) 나다’는 버릇처럼 익숙해지는 행동을 뜻한다. 이때 이력은 ‘이골’이라는 단어와 맞바꿀 수 있다.하여, 이력은 나의 행적이자 족쇄이기도 한 셈이다. 어떤 일을 통해 이력을 쌓을 수도 있지만 어떤 일에 이력이 날 수도 있는 법이니까. 이력이라는 단어는 이런 식으로 분화하여 벌어
△순환논증의 비순환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순환논증의 오류를 범하는 곳이 적지 않다. 이를 테면, “행동자는 필연적으로 성격과 사상에 있어 일정한 성질을 가지게 마련이다. 왜냐하면 이 양자에 의하여 우리는 그들의 행동을 일정한 성질의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와 같은 부분이 그렇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동자가 성격과 사상을 갖는 이유를 ‘필연적’이라고 설명하고 있다(51면). 성격과 사상은 일정한 성질을 갖고 있는데,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그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이런 아리스토텔레스의 순환논증 중 가장 압권은 이것이
△제주의 밤하늘제주의 밤하늘은 장막과도 같아서 바람이 불면 별빛과 함께 흔들린다. 바람이 셀 때는 별빛이 한 뼘씩 흔들려 밤하늘이 검은 장막이라는 것을 더욱 분명하게 확신하게 된다. 나는 둥근 의자에 누워 오래도록 하늘을 올려다본다. 별은 바람에 쓸리듯 조금씩 조금씩 오른쪽으로 흐른다. 나는 간만에 찾아온 느긋한 휴가를 이 의자에서 모두 탕진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한용운은 어떤 시에서 밤을 ‘올 없는 검은 비단’이라고 했는데(“이별은 미의 창조”), 그의 이런 시를 읽으며 질투를 할 때도 있었다. 그는 을사늑약 이후의 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