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의 환관이었던 유약우(1584-?)는 그의 저서 작중지(酌中志)에 ‘나는 석가의 가르침을 극도로 증오한다. 불교는 세상을 미혹하고 백성을 속이는 것(惑世誣民)으로 여겨 가장 먼저 배척하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적고 있다.유약우가 이 말을 남긴 두 가지 이유는, 첫째는 명 황실과 고위관료들의 주자학 숭상이다. 주자학은 주희의 유교 경전 해석을 바탕으로 발전된 것으로 삶의 개별적, 실존적 현상보다는 그 이면의 보편적 이치를 성찰하고 깨닫는 데 주안점을 두었기에 태생부터 귀족적인 학문이었다. 현학적 태도로 만물의 이치를 통달한 자들
공자가 제시한 사람을 관찰하는 방법은, 먼저 그 행위를 보고, 다음은 어떤 동기에서 그런 행위를 했는지를 살펴보고, 진정으로 기꺼운 마음에서 한 행위인지를 자세히 들여다본다면, 사람이 어찌 자신의 속마음을 숨길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하지만 드러난 행위 이외에 그 동기가 무엇인지 진심으로 측은지심이나 즐거워서 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일반인들이 알아내기가 쉽지 않다. 그렇다고 늘 남의 행위에 대해 의심하며 살 수도 없는 노릇이다.세상에서 가장 황당한 것이 위선자가 선인인 것처럼 행세하는 경우일 것이다. 사람들이 그 이면을 다 들여다보고
조선 중기 학자이면서 정치가였던 미수 허목은 남인의 핵심이자 남인이 청남(淸南)과 탁남(濁南)으로 분립되었을 때는 청남의 영수로서 당시 정계와 사상계를 이끌어간 인물이다. 허목의 저서 ‘기언, 허미수자명(記言,許眉自銘)’에 스스로 지은 묘비명이 올려있다. 내용을 살펴보면 ‘말은 행동을 덮지 못하고 행동은 말을 실천하지 못하였네/ 부질없이 성현의 글 읽기만 좋아했지/ 내 허물은 하나도 바로잡지 못하였네/ 이에 돌에 새겨 후인을 경계하노라.’허목은 미수(米壽)를 누리기도 했거니와 글도 많이 남겼다. 미수 스스로도 내가 기언을
조선 중기 시인 어무적(魚無迹)이 지적한 병폐들이 오늘날의 적폐와 겹치면서 시대가 달라도 문제의 원인이나 해결하려는 핵심에는 변함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어무적은 연산군 때 인물로 사직(司直)을 지낸 어효량과 관비 사이에서 태어났다. 서자이기에 신분제의 한계로 과거를 보지 못했지만 뛰어난 재주를 인정받아 면천(免賤)되어 율려습독관이라는 말직을 지냈다. 당시 가난에 시달리는 백성들의 고통을 보고 이 유민들의 탄식을 담아 지은 시가 속동문선(續東文選)에 ‘유민탄(流民嘆)’이란 제목으로 올려 있다. 이 시는 먼저 곤란에 처한 백성이
구한말 유학자 박수는 17세에 학문을 시작하여 초기에는 과거에, 후에는 문장공부에 매진하였으나 모두 소용없음을 깨닫고 도학공부를 시작해 35세에 간재 전우의 문하에 들어갔다. 왕조도 기울고 지탱하던 유학의 도(道)도 스러져갔지만 형세가 한창 굽혀지는 시대에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민족정신의 고취에 일생을 바친 인물이다.박수가 스승인 전우에게 올린 편지에서 당시 유명 인사인 홍승헌의 논설에 대해 변론한 내용을 보면, 새로운 사상과 문물이 내리막길 왕조에 물밀듯이 들이닥쳐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이 흔들리고 있다. 향교와 서원의 자리에
사자성어는 우리의 삶과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기에 기관장이나 기업의 CEO가 신년사나 축사를 할 때 인용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사자성어 사용은 내용을 강조함에 있어 유용하나 전하고자 하는 내용에 맞는 사자성어나 격언을 찾아 쓰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추미애 법무장관이 올해 1월초 법무장관에 취임하면서 현재까지 검찰이나 검찰총장을 향해 분노가 섞인 감정으로 사자성어를 쏟아냈다. 첫째로 줄탁동시(啄同時)이다. 함께 행해지기에 가르침을 받는 제자의 역량을 파악하여 바로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스승의 예리함을 비유한 말이
삶의 여정에는 수많은 길이 있다. 바른길도 있고 그릇된 길도 있다. 대개 그릇된 길은 개인 욕심이나 집단의 그릇된 목표로 인해 본의 아니게 택함으로서 패가망신하거나 목숨까지 던지는 경우도 종종 있다.조선후기 금석학파를 창립하고 추사체를 완성한 실학자인 김정희의 완당집(阮堂集)에 ‘천 리 길을 가는 말(適千里說)’에, 갈 길을 잃은 사람에게 길을 아는 사람이 바른길과 잘못된 길을 자세히 알려주면서, 잘못된 길은 가시밭길이고, 바른길은 반드시 목적지에 이를 것이다, 라고 성심을 다해 알려줘도 의심과 욕심이 많은 자는 이를 믿지를 못해
조선조 당대 명가의 후예로 자유분방한 삶과 파격적인 학문을 했던 인물인 허균의 성옹지소록(惺翁識小錄)에 가까운 집안 서숙(庶叔)이 면앙정 송순에게 말했다. ‘지방에서 올라온 재상 중 죽어서 서소문으로 나가는 사람은 봤지만, 살아 남대문으로 나가는 사람은 여태 못 보았네.’ 권력에 한번 발을 들이면 죽을 때까지 놓지 않으려 하기에 한 말이었다. 후에 송순이 개성유수를 지내다가 고향으로 돌아갈 때, 서숙이 강가로 배웅을 나오자 송순이 말했다. ‘이제 제 발로 남대문을 나갑니다.’ 그리고는 뚜벅뚜벅 문을 나서며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고 기
조선의 선비 중 사람들이 한편에서는 기인이라 하였고, 또 다른 편에서는 법도에 어긋난 사람이라 하여 글은 취하되 사람은 사귀기를 꺼렸던 선비가 있었으니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서예가였던 임제(1549~1587)다. 그는 초서에 능하였으며 호방한 필치로 막힘이 없이 써내려간 풍모를 통해 구속을 싫어하고 불의를 용납하지 않았던 기개와 곧은 정신을 엿볼 수 있다. 글공부에 뜻을 두어 몇 번 과거에도 응시하였으나 번번이 낙방하여 28세가 넘어 벼슬길에 나아갔다. 하지만 당시 조정에서는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서로 다투는 당파싸움을 개탄하여
한말의 의병장 유인석은 국권이 강탈당하는 것처럼 나라에 큰 변고가 생겼을 때 처신하는 방법으로 ‘처변삼사(處變三事)’를 내놓았다.첫째는 의병을 일으켜 적과 싸우는 일이요, 둘째는 해외로 망명하여 옛 정신을 지키는 일이요, 셋째는 자결을 하여 뜻을 이루는 것이다. 제천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그것마저 여의치 않자 만주와 러시아로 망명해 독립에 투신한 유인석은 첫째와 두 번째 방법을 함께 사용한 셈이다. 구한말 3대 시인이면서 우국지사였던 김택영, 이건창은 과거 보러 상경한 구례의 선비 황현을 만나 서울에서 교분을 쌓으며 의기투합했다.
한국사회에서 7~80년대 만해도 어린아이들이 시장바닥이나 버스 정류장, 지하철, 번화가 같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에서 구걸을 하거나 껌 같은 것을 파는 행위를, 어린아이들이 앵앵 울면서 돈벌이를 구걸한다는 말에서 유래한 단어가 ‘앵벌이’다.이러한 행위는 법적으로는 ‘구걸부당이득’이라 하여 다른 사람의 구걸을 통하여 이익을 얻은 사람으로 정의하고 있으며 경범죄처벌법에서 다루고 있다. 과거에는 전쟁고아 등 먹고 살기 어려웠던 시절이라 앵벌이 아동을 자주 볼 수 있었고, 90년대 중반까지도 인신매매와 유괴가 심각했던지라 앵벌이 아동
이규보(1168~1241)에 대해서는 극명하게 상반되는 두 가지 평가가 있다. 13세기 문학의 새 지평을 열었다고 극찬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무인 정권 아래의 기능적 지식인으로 권력에 아부했다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다. 이규보가 태어나고 2년 후인 1170년 무신난이 일어난 난세였다. 천부적인 문재(文才)를 지니고 어려서부터 중국 고전을 익힌 지식인이 살아가기에는 녹록치 않은 시대였을 것이다. 이규보는 아홉 살에 이미 신동이라 일컬어질 정도의 시재(詩才)를 보여 주었고, 성격 또한 자유분방했다. 시대와 어울리기 어려운 개성을 가지고
역사 속에는 수많은 인생을 희생시키며 한 사람의 영웅이 만들어지기도 하고, 그냥 흔적도 없이 소멸되는 한 많은 인생이 수도 없이 많다.조선 역시 병자호란과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스러졌고, 19세기 말 마지막 왕조의 어지럽던 정치상황은 조선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대한제국으로 고쳤으나 14년을 지탱하다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35년의 긴 세월 일제강점기라는 어둠의 터널에서 허우적대다 1937년 시작된 전쟁이 1945년 원자폭탄의 위력에 무릎 꿇자 해방됐다. 이 기간 중 한반도 백성들은 전시체제 하에서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
말을 삼가기를 옥을 손에 쥐듯, 가득찬 물그릇을 들듯이 조심하라. 이 글은 여말선초(麗末鮮初)의 문신인 이첨(1345~1405)의 눌헌명(訥軒銘)으로 동문선에 실려 있는 구절이다. 우왕 1년(1375) 간관이었던 이첨은 당시 권신이었던 이인임 등을 탄핵하다가 하동에 유배되었다. 유배된 지 반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구설에 오를까 염려한 이첨은 유배지의 한구석에 집을 지어‘눌헌’이라 이름 짓고는 스스로를 경계하고자 명(銘)을 지었다.‘질병은 입으로 들어오고, 재앙은 입으로부터 나온다.’는 옛말도 있듯 사람의 처세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
코로나19로 인해 10여 년 만에 미국의 일자리가 70만개가 사라졌다 한다. 통계적인 수치이기에 현재는 아마도 더 악화된 상황으로 예상된다. 호텔과 서비스업 제조 건설 등 3월에만 70만개의 일자리가 공중분해가 됐다. 우리나라도 정부와 지자체들마다 주말이면 외출과 집단모임 등 감염에 취약한 행동이나 모임은 자제하라고 계속적인 주의사항을 국민들에게 전달한다.대부분의 국민들은 힘들지만 빨리 코로나19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정부의 권고사항을 따르며 연장된 사회적 거리두기에 적극적으로 동참을 하고 있다. 이 영향으로 온라인 구매가
‘당 현종이 태평성대를 이루었던 것은/ 허심탄회하게 간언을 수용했기 때문이네/ 황금 상자를 길이 두고 거울로 삼았던들/ 행차가 어찌 서촉(西蜀)까지 이르렀겠나.’고려시대의 문신이며 명문장가인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 실려 있는 개원천보영사시(開元天寶詠史詩) 금함(金函)이다. 당나라 예종을 이어 즉위한 현종은 연호를 개원(開元)이라 고친 뒤에 요숭, 송경, 장구령과 같은 어질고 뛰어난 인재를 재상으로 등용하여 측천무후(則天武后)의 여파로 혼란에 빠진 국가를 안정시키고 30년 동안 태평성대를 이끌었다. 이것이 바로 역사에서 말하는 ‘개원
정조는 세손시절부터 논어에서 증자가 말한 ‘나는 날마다 세 가지 기준을 가지고 스스로에 대해 반성한다.’는 글귀를 좇아 스스로 반성하는 자료로 활용하기 위해 자신의 언행과 학문을 기록한 ‘존현각일기’를 기록한다. 이 책은 1783년부터 임금의 개인 일기에서 규장각 관원들이 시정(施政)에 관한 내용을 작성한 후 왕의 재가를 받은 공식적인 국정일기로 전환되었다. 1760년부터 1910년 8월까지 임금의 입장에서 조정과 내외의 신하에 관련된 내용을 일기형식으로 기록한 ‘일성록(국보153)’은 이 존현각일기로부터 시작된다. 조선왕조실록은
정당에 지급되는 국고보조금은 불법 정치자금 축소 등을 명분으로 지난 1980년부터 시행되어온 제도다. 선거보조금은 정당의 보호와 육성을 규정하고 있는 헌법 규정에 의해 공직선거가 있을 때에 지급한다. 따라서 선거가 있는 해마다 후보자를 추천한 정당을 대상으로 경상보조금 지급기준에 따라 후보 등록 마감일을 기준으로 지급된다.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지난달 30일 제21대 4·15총선에 여야 12개 정당에 선거보조금 440억7천여 만 원을 지급한다고 밝혔다. 또한 선관위는 정치자금법 제26조에 따라 전국 253개 지역구의 30%(76명) 이
중우(衆愚)정치는 고대 그리스의 정치를 고찰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국가론과 정치학에서 민주제의 타락한 정체(政體)에 부여한 명칭이다. 폭민 정치라고도 부르며 올바른 판단력을 상실한 대중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정치를 의미한다. 지성인이나 다수대중이나 똑같이 한 표다.게다가 수적으로 엘리트보다 일반대중이 더 많다. 정치인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수가 월등히 많은 대중의 표를 의식할 수밖에 없으므로 필연적으로 이들의 기호에 맞는 정책이나 포퓰리즘을 쏟아낸다. 투표를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비판기능을 갖춘 소수 엘리트보다 대중의 수가 훨씬
‘오동은 천년을 살아도 그 가락을 간직하고, 매화는 일생을 추워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조선중기 문인인 상촌 선생 문집 야언(野言)에 기록된 시 구절이다.매화는 이른 봄에 추위를 무릅쓰고 먼저 꽃을 피우고, 난초는 깊은 산중에서 은은한 향기를 멀리 퍼뜨린다.국화는 늦가을에 첫 추위를 이기며 피고, 대나무는 모든 식물의 잎이 떨어진 겨울에도 푸른 잎을 유지한다고 하여 이 네 가지 식물의 특유의 강점을 덕과 학식을 갖춘 전인(全人), 즉 군자(君子)에 비유하여 이른바 사군자로 불린다.조선의 선비들은 송, 죽, 매를 겨울철의 세 벗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