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치마를 두른 것처럼 단풍이 요란하다는 적상산(赤裳山), 비가 내리다 그치기를 반복하는 한여름에 오른다. 물안개가 산자락을 휘감고 있어 숲은 신비로움으로 가득하다. 마음이 이토록 평온한 것을 보니 불이문은 벌써 지나쳤는지도 모른다.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양수발전소 댐을 지나도 산은 좀처럼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한참을 올라서야 안국사 일주문을 만났지만 해발 1000m의 고지대라는 게 실감나지 않는다. 금산사의 말사인 안국사는 충렬왕 3년(1277년)에 월인 화상이 창건하였다는 설과 조선 태조 때 무학대사가 복지(卜地)인 적
달이 머물다 간다는 월류봉을 지나 석천계곡을 따라 반야사로 향한다. 불어난 계곡물로 긴장감을 늦출 수가 없는데, 긴 장마를 빠져나온 사람들은 햇살을 업고 백화산 둘레길을 걷는다.줄지어선 잣나무 그늘 끝으로 반야사가 보인다. 반야는 인간이 진실한 생명을 깨달았을 때 나타나는 근원적인 지혜를 말한다. 접근성 좋은 천변에 자리 잡은 널찍한 경내로 들어서는데 계단 옆에서 봉숭아꽃이 무리지어 반긴다. 문턱이 높지 않은 개방적인 절임을 알 수 있다. 템플 스테이로 머무는 참가자들과 관광지에 들른 듯 반바지 차림에 뒷짐을 지고 둘러보는 방문객들
법주사를 찾아가는 길은 후덥지근한 여름 홀로 적적하다. 인적 없는 들길을 개망초가 하얗게 무리지어 밝힐 뿐 모든 게 나른하다. 버려진 땅을 악착스럽게 지켜낸 숱한 고독들이 있어, 귀화식물이란 꼬리표가 결코 밉지 않은, 소박하면서도 사랑스러운 꽃이다.청화산 남쪽자락에 있는 법주사는 은해사 말사로 신라 소지왕 15년(493년)에 심지왕사 또는 은점조사가 창건했다고 알려져 있다. 고려시대 보조국사 지눌이 주석하고 일연이 총림을 세웠다고 하는데 정확하지는 않다. 조선 중기 화재로 법당이 소실되자 1623년 보광명전을 중건하고, 15년 전
문득, 새벽 기도가 하고 싶은 날이다. 한 시간 반을 달려 산사에 도착했을 때는 어느새 아침이 되어 있었다. 이른 아침의 산사는 싱그러웠다. 비가 올 듯 흐린 하늘, 바람에 적당히 몸을 흔드는 7월의 숲에 싸인 주차장, 단정한 어깨를 자랑하는 일주문, 그 안으로 있는 듯 없는 듯 이어지는 길, 모든 게 사랑스러운 아침이다.일주문을 들어서는 마음도 여느 때보다 정갈하다. 다듬어지지 않은 길이 계곡을 따라 누워 있고, 바람 소리에 깨어나는 나뭇잎들의 은밀한 아침 인사가 높은 곳에서 들려온다. 세월이 낸 흔적 사이로 쭉쭉 뻗은 참나무들이
적천사의 은행나무를 보러 떠나라고 누군가 귀띔해 주었다. 초입에서 펼쳐지는 소나무 숲에 한껏 부풀어 있는데 느닷없이 800년을 살아온 은행나무와 마주 선다. 시간을 벗어난 존재의 환희, 푸르고 깊은 눈빛과 마주친 이상 차에서 내리지 않을 수가 없다. 은행나무의 오랜 침묵과 장엄한 자태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살아 있는 화석, 나무에게서 서늘하도록 도도한 기운이 흐른다.천연기념물 제 402호로 지정된 은행나무는 수형이 곧고 반듯하며 큰 상흔 없이 자랐다. 고령의 몸으로 유주를 늘어뜨린 채 손톱만한 은행들을 품고 본분을 다하는 모 앞
지붕 없는 박물관이라 불리는 경주 남산에 보리사가 있다. 불국사 말사로 헌강왕 12년(886년)에 창건된 절로 남산에서 가장 큰 사찰이다. 삼국사기에 ‘헌강왕과 정강왕의 능이 보리사의 동남쪽에 위치한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유서 깊은 사찰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후의 연혁은 전해지지 않는다. 폐사로 남아 있던 절을 1911년 비구니 박덕념 스님이 중창하면서 지금에 이른다.수없이 화랑교를 지나다니면서도 산림환경연구원 뒤쪽 미륵골에 보리사가 있다는 것은 미처 몰랐다. 접시꽃이 예쁘게 핀 작은 마을을 지날 때까지 보리사에 대한
여기저기 전원주택이 들어서 있는 효양산 초입에 차를 세우고 운동 삼아 비탈길을 오른다. 며칠 동안 내린 비로 계곡의 시원한 물소리를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불령사가 보인다. 좋은 친구와 유익한 이야기를 나누며 걷는 길은 물리적인 거리조차 단축시킨다.불령사는 신라 선덕여왕(645년)때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그 중간의 연혁은 전해지지 않고 1912년 봉주 스님이 중창했지만 허물어져 1985년 지선 스님이 요사채와 산신각을 짓고 2000년에 대웅전과 삼성각, 요사채 등을 새로 지었다고 한다.가파른 계곡을 따라 오밀조밀 전각이 들어
산길을 접어들자 더이상 민가는 보이지 않고 차는 하염없이 숲을 빠져들듯 나아간다. 산은 적막감에 싸여 베일에 가려진 듯 조심스럽고, 무성한 나무들의 푸른 눈빛은 너무나 성성하여 두려움조차 인다.네비게이션은 태연하게 그 길을 고집하는데 친구와의 대화는 알 수 없는 두려움으로 말수마저 줄어든다. 흔치 않은 경험이다. 잠시 그늘에 차를 세우고 창문을 연다. 커피를 마시며 애써 숲을 예찬해보지만 하오의 신록은 끊임없이 나를 불안 속으로 몰아넣는다. 용기를 내어 꾸역꾸역 낯선 이름, 부귀사를 찾아 산길을 오른다.부귀사는 신라 진평왕 13년(
예정되지 않는 만남과 계획 없는 여행이 좋을 때가 있다. 휴일 아침 날씨나 컨디션에 따라 불현듯 마음이 통하는 친구와 만날 수 있다는 건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일 년에 고작 서너 번 정도의 만남이지만 그 시간들은 값지고 소중한 추억으로 이어진다.“네가 좋아할 만한 절을 발견했어. 천년고찰이 아니기에 재미있는 전설이나 볼거리는 없지만 꽤 느낌이 괜찮은 절이야. 너도 가보면 분명 좋아할 거야.”깊은 산속에 숨어 있는 작은 절을 떠올리며 나는 온갖 상상으로 행복해진다. 한 달째 허리통증을 호소하면서도 여전히 나를 배려하는 친구의 마음씀
누적된 피로로 절을 찾아가는 몸과 마음이 밝지만은 않다. 결국은 네비게이션의 지시를 몇 번이나 놓치고 헤매듯 죽림사를 찾아간다. 차는 길을 잘못 들었다고 착각할 만큼 어수선한 도로를 달리다 어느 사이 산속으로 숨어든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타난 죽림사 일주문 앞에서 나는 엉클어진 내면의 길을 보고 말았다.양쪽으로 대나무 숲을 거느린 쭉 뻗은 길이 화강암으로 만든 배흘림기둥 안으로 이어진다. 절은 은해사 말사로 신라 헌덕왕 1년(809년) 도선국사에 의해 창건되었다. 하지만 임진왜란 때 사찰이 전소되어 여러 차례 중수되었다가 또 다시
이름만으로도 끌리는 도시 밀양, 영남루 바로 옆에 무봉사가 자리하고 있다. 우리나라 3대 누각으로 불리는 영남루에는 휴일을 즐기는 사람들로 어수선한데, 그곳에서 살짝 돌아 앉은 무봉사 가는 길은 대숲이 밀양강을 막아주어 아늑하고 호젓하다. 일주문을 지나면 가파른 계단 위로 해탈문을 대신하는 무량문(無量門)이 보이고 작은 문안으로 하늘을 나는 봉황 모형이 선명하게 카메라에 잡힌다.무봉사는 신라 혜공왕 9년(773년) 법조(法照)가 세운 절이다. 지금의 영남루 자리에는 영남사라는 절이 있었지만 절이 타고 없어지자, 당시 무봉암이었던 절
거대한 바위와 가파른 절벽, 기암 단애라 불리는 바위 7개가 병풍처럼 늘어서 있어서 석병산(石屛山)이라고도 불리는 주왕산은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이다. 불과 물, 시간이 만들어 낸 경이로운 합작품으로 경관뿐만 아니라 학술적인 가치도 높다.신비스런 계곡을 따라 걷는 탐방로는 완만하고 볼거리가 많아 누구나 쉽게 걸을 수 있다. 대전사에서 10여분 쯤 걷다 갈림길에서 우측 자하교를 지나면 운치 있는 돌계단이 나타나고 호젓한 오솔길이 색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길은 아쉬울 만큼 짧게 끝이 나고, 바위협곡이 시작되는 지점에 주왕암이 보인다.대
해발 437미터의 선방산(船放山)은 마치 배를 띄운 것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구전에 의하면 선방산 꼭대기에 배를 띄우고 놀 만큼 큰 못이 있었지만 당나라 장수들이 그곳에서 뱃놀이를 즐기고는 못을 메워버렸다고 한다. 어떠한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옹달샘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는 설화를 간직한 그곳에 지보사가 있다.지보사(持寶寺)는 신라 문무왕 13년(673년)에 창건되었다고 전할 뿐 그 이후 근대까지 역사는 전하지 않지만 그 옛날에도 그리 큰 절은 아니었던 듯하다. 다만 지보사에는 이름처럼 세 가지 보배가 있었다. 아무리 갈아도
그는 백중날 태어난 크리스천이다. 산사기행을 떠나는 나에게 자기 몫의 기도를 부탁한다며 입버릇처럼 말할 때마다 나는 흘려들었다. 서둘러 떠날 걸 예감조차 못했을 그가 부처님 앞에서 무슨 기도를 하고 싶었을까.농담처럼 주고받던 말들이 가끔은 하나의 의미가 되어 우리를 아프게 할 때가 있다. 북지장사 가는 소나무숲길에 들어서며 그가 무심코 흘린 말들을 나는 또 낚고 있다. 훌훌 털고 일어나지 못했던 그는 가끔씩 휘파람새가 되어 나타나거나 꿈결에 스쳐가듯 다녀가는 게 전부였지만, 그럴 때마다 숙연해질 수밖에 없다.레테의 강을 건너는 자는
비파 비(琵), 거문고 슬(瑟), 비슬산 가는 길은 벚꽃이 지기가 무섭게 화려한 영산홍들이 길을 연다. 비슬산은 갈 때마다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으며, 명산답게 이름의 유래도 다양하다. 나는 인도의 힌두교 신 ‘비슈누’를 한자로 음역한 비슬노(毘瑟怒)에서 왔다는 설을 좋아한다. 왠지 먼 나라의 신화를 떠올리면 평범하던 산은 더 깊고 신비로워 보인다. 8대 적멸보궁으로 이름난 용연사가 그 안에 있다.5대 적멸보궁에 건봉사, 도리사, 용연사를 넣으면 8대 적멸보궁이다. 용연사는 912년(신덕왕 1년)에 보양국사가 창건하였으며 이 절터에
비가 그친 지리산은 봄이 한창이다. 저마다 다른 연둣빛 사이로 산벚꽃이 어울려 꽃길을 연다. 민족상잔의 비극이 서려 있는 골짜기에도 4월의 유순함이 피어나는데 벽송사 가는 길은 가파르기만 하다.지리산 칠선계곡에 위치한 벽송사는 1520년(중종 15년) 벽송 지엄 선사에 의해 창건되었다. 서산대사와 사명대사를 비롯한 기라성 같은 정통 조사들이 수행 교화하여 조선 선불교 최고의 종가를 이룬 유서 깊은 사찰이다. 하지만 일제의 조선불교 말살정책으로 사세가 기울기 시작하여 6·25때는 빨치산 토벌을 위해 방화된 슬픈 역사를 지니고 있다.이
차는 대규모 공사현장 근처에서 길을 잃고 몇 번을 헤매다 쉬엄쉬엄 산길로 접어든다. 끊임없이 개발을 서두르는 도시의 풍경들을 순식간에 따돌리고 고개를 넘어 팔공산 깊은 자락으로 숨어든다. 마치 영겁의 세월을 거슬러 오르듯.파스텔톤의 옷을 갑아 입은 분지형의 명당 터에 벚꽃이 부풀어 올라 무릉도원이 따로 없다. 사위는 조용하다. 선뜻 들어서지 못하고 부도밭을 서성이다 키 낮은 벚나무 아래에 서서 천년고찰을 올려다본다. 바람 한 점 없는 햇살 아래 벌들의 비행소리만 요란하다.환성사(環城寺)는 성처럼 산자락에 둘러싸여 있는 유서 깊은 고
지리산의 봄은 물소리로부터 시작된다. 지리산 가는 길은 온통 봄꽃이 피어 열병을 앓는데 깊은 계곡에 몸담고 있는 내원사는 어쩌면 저토록 차분하기도 할까. 내원계곡과 장당계곡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하여 절의 양쪽으로 지리산의 청정 계곡이 흐르는 까닭만은 아니리라.내원사(內院寺)의 옛 이름은 덕산사(德山寺)였으며 통일신라시대 무염국사에 의해 창건되었다. 무염국사는 무열왕의 후손으로 중국 마조 문하의 법맥을 이루었으며 동방의 대보살로 일컬어졌던 분이다. 무염의 법은 충남 보령에 소재하는 성주사의 일맥을 이루어 구산선문의 하나인 성주산문이
십여 년 전 아들이 공군 훈련병으로 있으면서 장문의 편지와 함께 보내온 벚꽃잎만큼 아련했던 꽃이 있을까. 훈련을 마칠 즈음, 꽃은 간 곳이 없고 무성한 나뭇잎처럼 성장해 있던 아들과의 추억을 떠올리며 차는 진주로 달린다.벚꽃이 만개하기에는 조금 이른가 보다. 연둣빛 새싹과 봄꽃들이 수런대는 시골길은 평범한 들판과 촌락을 지나 집현산 아래에서 싱겁게 끝나 버린다. 접근성이 좋은 응석사(凝石寺)는 신라 진흥왕 15년(554년) 연기조사가 창건했다. 문무왕 2년 의상대사가 강원을 열었고 그 뒤 나옹, 무학 등 이름난 고승들이 거쳐 간 대
신라 법흥왕 2년(515년) 유일 스님이 창건하였다는 각연사. 창건설화에 의하면 유일 스님이 사찰을 짓기 위해 칠성면 사동 근처에 절을 지으려고 공사를 시작하는데, 자고 일어나면 목재를 다듬은 대패밥이 남아 있질 않았다. 이상하게 여긴 스님이 밤잠을 자지 않고 지켜보니 까치들이 몰려와 대패밥을 하나씩 물고 어디론가 날아가는 것이었다. 따라가 보니 까치들은 산 너머 못에 대패밥을 떨어뜨려 메우고 있었다. 그 못에서 이상한 광채가 솟아 들여다보니 석불 한 기가 들어 있었다.스님은 못 있는 데로 절을 옮겨 짓고 못에서 나온 석불을 모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