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산 자락에 자리한 작은 원룸에 둥지를 튼 지 어느덧 두 달. 경북대와 전남대 교환교수제에 따라 광주에서 1년을 보내기로 한 때문이다. 광주와 대구의 거점 국립대학으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전남대와 경북대. 그동안 학생교류는 지속적(持續的)으로 진행됐으나, 교수교류는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경북대와 전남대 양교 총장이 교환교수제에 합의함으로써 실질적인 교류가 시작된 것이다. 나는 거기에 첫 번째로 동승(同乘)한 셈이다.예전에 민교협 회의나 국교련 회의차 광주에 들른 적은 있지만, 장기체류는 이번이 처음이다. 관찰자나 관광
4월 16일 노란 ‘세월호 대참사’ 추모배지를 달고 거리에 나선다. 어언 5년 세월이 지나갔다. 5년 전 그날 저녁 구들방에 군불을 지피다가 뒷집 할머니에게 들은 참사는 차마 믿을 수 없는 전갈이었다.촌동네로 이사한 지 한 달 만에 들은 천붕(天崩) 같은 소식. 지금이나 그 시절이나 텔레비전이 없기에 세상의 크고 작은 사건사고는 인터넷이나 휴대전화로 확인한다.당시 대통령과 집권세력이 보여주던 흉악무도함 때문에 세상사와 절연하고 살아가던 터라 참사소식은 상상을 절(絶)하는 것이었다. 열여덟살박이 고2 학생들만 250명을 수장시킨 희대
봄날이 산야를 초록으로 물들이는 시기의 불청객이 산불이다. 녹음(綠陰)이 대지를 완전히 점령하지 못한 4월의 건조함은 산불이 퍼지기 좋은 조건이다. 여기에 강풍이 불면 상황은 걷잡을 수 없다. 2000년 4월 7일 임야 2만3천 헥타르를 태우고, 재산피해 1천억과 이재민 850명을 만들어낸 고성산불을 기억한다. 천년고찰 낙산사를 태워버린 2005년 4월 4일 양양산불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리고 지난 4월 4일 고성-속초-강릉-동해-인제에 산불이 났다.동해가 고향인 지인이 보내온 휴대전화 사진은 언어도단(言語道斷)이다. 무너져 내린
나이 들어 세상과 인간을 들여다볼라치면 문득 허망해질 때가 있다. 인간과 세상에 드리워진 선명한 모순의 그림자 때문이다. ‘사랑’과 ‘이차돈의 사’를 읽으면서 어린 시절 나는 춘원(春園)의 필력에 감읍했다.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을 극복하고 지고지순한 사랑과 지극한 도에 이르는 인물을 형상화하는 대가의 솜씨. 훗날 그가 봉은사에 칩거하며 썼다는 반성문 ‘산중일기’도 친일부역의 흠집을 지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때의 망연자실함이라니!15-16세기 신성로마제국 신민(臣民)으로 거부(巨富)가 된 야코프 푸거(Jakob Fugger)라는 인
분노한 촛불이 새로운 권력을 탄생시킨 지 어느덧 2년 가까운 세월이 지나간다. 2016년 늦가을부터 2017년 신춘에 이르는 장정(長程)으로 우리는 부패, 무능, 타락, 패거리주의로 무장한 대통령과 집권세력을 교체했다. 그것은 낡고 타락한 지배권력을 일소하고, 민주공화국(民主共和國)의 본령에 충실하라는 국민들의 지상명령이기도 하다. 백성이 주인이며, 모든 사람의 입에 쌀밥이 들어가는 나라가 민주공화국이다.사정이 그럴진대 실제 돌아가는 상황은 그다지 탐탁지 않다. 세간에 떠도는 여러 가지 가설이 있지만, 기초연금 문제를 짚어보고자 한
이창동 감독은 과작(寡作)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1997년 ‘초록 물고기’로 데뷔했으니 20년 세월이 훌쩍 지나갔다. 그동안 그는 ‘박하사탕’, ‘오아시스’, ‘밀양’, ‘시’, ‘버닝’을 연출했다. 이상한 일이지만 그는 관객동원 면에서는 열세를 면치 못한다. 2007년 전도연이 ‘밀양’으로 칸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은 덕에 160만 관객이 들었을 뿐, 여섯 편 관객이 340만이 안 된다. 자고 나면 천만 영화가 나오는 세상에 희귀한 경우가 아닐 수 없다.얼마 전에 윤정희가 주인공으로 나온 ‘시’(2010)를 다시 보면서 여러 가
‘도덕경’ 제5장은 우리의 고정관념을 전복시킨다. ‘천지불인 이만물위추구. 성인불인 이백성위추구.’ 간략하게 번역해보면 ‘하늘과 땅은 인하지 않아서 만물을 짚으로 만든 개처럼 여긴다. 성인은 인하지 않아서 백성을 짚으로 만든 개처럼 여긴다.’ 천지를 다른 말로 바꾸면 자연이 된다. 인간을 둘러싼 자연에 내재한 불편부당과 무심을 강조하는 말이 천지불인이다. 노자의 사유에 따르면, 자연의 본원적인 속성은 ‘인하지’ 않다는 것이다.2011년 3월 11일 일어난 동일본대지진은 진도 9.0의 강진으로 1900년 이후 네 번째로 강력한 지진이
경북매일이 흥미로운 알림장을 게재했다. 신문사가 ‘시민기자제’를 도입하겠다는 내용이다. 문자 그대로 신문의 독자가 신문기자가 되어달라는 취지다. 전통적인 종이신문은 신문제작자와 구독자를 엄밀하게 구별한다. 기자와 독자 사이에 기사 생산자와 수요자라는 넘을 수 없는 4차원의 벽, ‘넘사벽’이 존재했다. 그런 강고하고 유구한 은산철벽(銀山鐵壁)을 무너뜨림으로써 언론의 새로운 지평을 열겠다는 것이 경북매일의 의지다.알림장에 따르면, 경북매일은 ‘시민참여 저널리즘’을 추구해왔다고 한다. 어느 일방의 주장이나 입장이 아니라, 독자의 견해를
100년은 긴 세월이다. 100년 전 이 땅에 살았던 민초(民草)들은 100년 후인 2019년을 상상했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1819년 순조 19년을 살았던 조선의 백성들이 100년 후인 1919년을 상정하기 어려웠던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하되 21세기 19년을 살아가는 우리는 2119년을 가늠하려 한다. 시공간의 무한축소와 과학기술문명이 호모사피엔스에게 부여한 선물 덕분이다. 100년 뒤 세상은, 인류는, 지구는, 우주는 어떤 양상일 것인가?!어릴 적 3월이 되면 “3월 하늘 가만히 우러러보며 유관순 누나를 생각합니다.”로
세상 살면서 사통오달(四通五達) 인생을 향수하는 이는 많지 않다.그것은 세상살이가 녹록치 않아서, 나와 같지 않은 타자로 인해, 기획한대로 일이 풀리지 않아서, 혹은 기대치 충족의 불가(不可)로 인해서 발생한다. 어떤 이들은 불의한 시공간과 부당한 억압으로 울분을 느끼기도 한다. 우리가 열사나 위인으로 존숭하는 유관순이나 윤봉길, 김구 같은 분들이 그러하다. 공적인 영역의 거룩한 울분을 제외하면 우리는 일상의 영역에서 울분을 경험한다.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울분(鬱憤)은 ‘답답하고 분함 내지 그런 마음’을 일컫는다. 한자말을 들여다보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하거나 억장이 무너지는 상황에 직면하면 평정심과 분별력이 쇠해진다. 있지도 않은 사실을 무고(誣告) 수준으로 꾸며대며 음해하는 자나, 자명한 사실마저 부정하는 어리석은 자와 대면할 경우가 그러하다. 그런 지경에 이르면 장삼이사들은 분노하거나 대경실색하기 십상이다. 음모와 불의를 참지 못하는 다혈질인 사람이 창졸간(倉卒間)에 그런 상황과 맞닥뜨리게 되면 크게 노하여 붉으락푸르락하기 마련이다.웃음에 관한 서책을 읽다가 혼자 미소짓는다. ‘현자들은 무엇을 보고 웃나’하는 부제(副題)를 가진 ‘웃음의 철학’이 던지는 문
그거 소설 아니야, 정말 극적(劇的)이네, 같은 말과 동의어로 떠오르는 것은 영화 같네, 일 것이다. 드물긴 하지만 발생 가능한 사건을 두고 우리는 문학과 예술을 끌어들여 표현한다. 일찍이 셰익스피어는 “인생은 연극이고, 세계는 극장이다!”라는 공식에 충실한 극작가였다. 모든 것이 열려 있고 가능해진 르네상스 시대를 연극무대로 실현한 인물. 그래서인지 모르되 그의 드라마에는 예기치 못한 발견과 급전(急轉), 희귀한 살인과 배신이 난무한다.영화관에서 ‘가버나움’을 보다가 문득 현실과 영화의 거리는 얼마나 될까, 하는 물음이 들었다.
1월 29일 정부는 사업비 24조원에 이르는 23개 사업의 예비타당성 (예타) 조사를 면제했다. 예타조사는 국가예산으로 추진하는 대규모 공공사업이 경제성, 정책성, 지역균형발전에 부합하는지 여부에 따라 사업실행여부를 평가하는 사전조사를 뜻한다. 그것은 정치권력을 장악한 개인과 정파의 자의적인 국가예산 오남용을 방지하는 최소의 안전장치다. 그런데 촛불로 출범한 정권이 지난 정권들의 그릇된 전철을 밟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정부가 내세운 예타면제 근거는 국가의 균형발전이다. 경제부총리는 “수도권과 여타지역의 격차가 더 심
오래 전에 읽은 책을 다시 만나는 것은 가슴 설레는 일이다. 그때 무슨 생각을 하며 책을 읽었는지, 기억에 남는 것은 있는지, 왜 하필이면 그 책을 읽었는지. 여러 가지 소회가 찾아들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옛사랑이나 까맣게 잊힌 친구와 재회하는 일과는 결이 다른 감정과 추억이 찾아드는 것이다. 더러는 책갈피의 색 바랜 흑백사진이나 잘 마른 낙엽 혹은 행간에 적어 넣은 단상이 젊은 날을 반추하도록 인도한다.연말부터 프랑스 문학을 읽고 있다. 기존에 읽은 위고의 ‘레미제라블’과 위스망스의 ‘거꾸로’, 보마르셰의 ‘세비야의 이발사’와 ‘
책을 불태우고 선비들을 묻어버린 희대의 사건을 분서갱유(焚書坑儒)라 한다. 550년 이어진 춘추전국시대의 종결자 진시황이 학자들의 정치적 비판을 차단하려 저지른 행악질이다. 진나라는 효공 (孝公) 이래 법가(法家)로 부국강병에 성공한다. 전국 7웅 가운데 최약체였던 변방의 진나라를 강성대국으로 인도한 장본인은 상앙(~ 기원전 338)이었다. 그의 행적은 사마천의 ‘사기열전’ 가운데 ‘상군열전’에 빼곡하다.상앙은 가혹하리만큼 엄격하게 법을 집행하다가 효공의 죽음과 함께 거열형(車裂刑)으로 생애를 끝막음한다. 그의 죽음을 재촉한 것은
지난 20세기는 격동의 세기다. 전기와 석유, 내연기관과 플라스틱, 컨베이어벨트 시스템 등으로 대표되는 2차 산업혁명이 풍요로운 물질문명을 가능케 한다.그와 아울러 러시아와 중국의 사회주의 혁명, 1∼2차 세계대전, 한국동란과 베트남전쟁, 사회주의의 퇴조와 소련 및 동구 실존 사회국가들의 몰락 같은 사회·정치적인 격랑(激浪)이 지구촌을 강타한다.미증유의 역사적 사변을 목도한 대중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다.그래서일까. 지난 세기 초중반에 세계적인 반 유토피아 소설이 등장한다.첫 번째는 사회주의 소련의 작가 예브게니 자먀틴이 집필한 ‘
동면(冬眠)에 들어간 반달곰은 무술년이 기해년으로 바뀐 것을 알고 있을까.어제 떠오른 태양과 내일 떠오를 태양은 하나임에도 새해 일출 여행객은 줄어들 기색이 없다. 무엇이 저들로 하여금 무리지어 동해안으로 출정하게 하는가?! 오며가는 누추하고 피로한 여정의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도록 하는 흥분제 성분은 무엇인가. 미련일까, 회한(悔恨)인가 그도 아니면 신년에 거는 다대한 꿈과 기대일까.구랍 31일 동료교수의 반가운 전화를 받는다. 무겁지 않은 덕담과 회고 끝자락에 그의 모친이 요양병원에 입원하셨다는 얘기를 듣는다. 여든한 살 연세에
여덟 살 때 외할머니 환갑잔치가 있었다. 열흘 넘도록 음식준비로 집안이 시끌벅적했고, 어른들 표정은 하나같이 밝았다. 어린 우리들은 구수한 냄새 넘쳐나는 부엌을 날랜 다람쥐처럼 넘나들며 이것저것 입에 넣기에 신이 났다. 우리가 알았던 정보는 ‘환갑’이란 어휘뿐이었다. 그것에 담긴 의미 반추는커녕 기본적인 뜻풀이조차 알지 못했던 천둥벌거숭이였던 시절.추운 겨울날이었지만 그때의 활기와 왁자지껄한 분위기와 흥분이 기억에 새롭다.마침내 그날이 왔다. 은비녀로 곱게 쪽머리하신 할머니가 토끼조끼와 한복치마로 한껏 멋을 내고는 병풍 앞에 놓인
올해 대학 수학능력시험은 상당히 어려웠다고 한다. 특히 국어 31번 문제는 천문학, 역사학, 철학, 과학이 뒤얽힌 기나긴 지문(地文)을 이해한 극소수의 학생만이 풀 수 있었다고 전한다. 인문학과 사회과학, 자연과학과 예술 관련서적을 두루 통독(通讀)해온 사람으로서 문제의 어려움을 통감한다. 거기 덧붙여 한 가지 의문이 문득 고개를 든다. ‘무슨 까닭으로 이토록 난해한 문제를 냈을까?’ 누구를 위한, 무엇을 겨냥한 문제인가, 하는 물음!1913년 3월 러시아의 스물네 살 여류시인 안나 아흐마토바는 ‘저녁에’라는 단출한 서정시를 창작한
1948년 12월 10일 국제연합 인권위원회는 ‘세계인권선언’을 발표한다. 제2차 대전이 끝나고 자유롭고 평화로운 지구촌을 건설하기 위한 인간의 기본권을 명시한 선언이다. 영장없는 체포와 구금, 추방으로부터 자유, 사상과 양심 및 종교의 자유, 평화적인 집회와 결사(結社)의 자유 등이 인간의 기본적인 정치적 권리로 거명된다. ‘인권선언문’ 제1조는 간명하되 대단히 인상적이며 선진적이다.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존엄성과 권리에서 평등하다. 인간은 이성과 양심을 부여받았기에 서로에게 형제자매의 정신으로 행해야 한다.” 어디선가 본 것같은 기시감이 들지 않는가?! 그렇다. 프랑스 삼색기(三色旗)의 영혼과 정신이 인권선언문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자유, 평등, 형제애.’ 자유는 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