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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에는 친구들과의 점심 모임에 나가고, 오후에는 모처럼 딸 아들과 함께 영화를 보기로 했다. 내켜하지 않는 아이들을 구슬려 예매를 하고 일단 점심 모임에 갔다. 저들은 저들대로 시내에서 볼일을 본 뒤 영화관에서 만나기로 했다. 집을 나서는데 진눈개비가 날린다. 설마 쌓이는 눈으로 변하랴 싶었다. 오늘따라 주차 공간이 없다. 상가 동네를 두 바퀴나 돌아도 마땅찮다. 슬슬 짜증이 돋는다. 다른 골목으로 접어드니 다행히 저 안쪽에 빈 공간이 보인다. 얼른 주차를 한 뒤 우사인 볼트처럼 달린다. 여전히 진눈깨비는 날린다. 이십 분이나 늦었다. 그래도 괜찮다. 다른 친구들 사정도 비슷했으니. 점심을 먹으며 창밖을 보니 함박눈이 내린다, 교통 흐름에 방해되지 않을 정도로만 내린다면 괜찮겠다고 생각한다. 그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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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2015.02.02
게재일 2015-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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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과 현실은 다르다. 생텍쥐페리, 라고 말하는 순간 작가의 프로필보다 어린왕자 이미지가 먼저 떠오른다. 금발머리에 길고 푸른 외투를 걸친 어린왕자. 생텍쥐페리의 다른 이름이 곧 어린왕자가 될 정도이다. 어린왕자를 비롯한 등장인물들이 쏟아내는 별빛 같은 명대사들도 곧 생텍쥐페리 자신의 내면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아내 입장을 편집자가 정리한 `생텍쥐페리의 전설적인 사랑`을 읽는다면 그에 대한 무한 긍정의 환상을 지녔던 나 같은 이는 다소 충격을 받게 된다. 어린왕자를 쓴 생텍쥐페리만을 기억하는 일이 독자로서는 행운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마마보이, 우울증환자, 바람둥이, 대머리, 변덕쟁이 기타 등등 인간적 약점이 많은 사람이었다. 아내 콘수엘로 입장에서 그녀의 자취를 따라 편집된 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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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2015.02.01
게재일 2015-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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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들은 우화를 만들고 후손들은 거기에서 지혜를 얻는다. 그렇다고 모든 우화가 개인을 완전히 설득시키는 것은 아니다. 라 퐁텐느 우화 중에 유명한 `참나무와 갈대`편을 보자. 크고 강한 참나무는 개울가의 갈대를 은근히 비웃었다. 저건 뭐, 바람이 없어도 머리를 숙이고 있는데다,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금세 가는 허리를 허공에다 굽실대는 것이다. 저렇게 줏대 없이 살 바엔 콱 죽어버리는 게 낫지, 참나무는 생각했다. 폭풍우가 몰아쳤다. 튼튼한 뿌리와 너끈한 허리로 참나무는 바람을 견디려했다. 웬 걸, 안간힘을 썼지만 뿌리는 통째로 뽑히고 허리는 갈가리 찢어졌다. 떠내려가던 참나무가 죽을힘을 다해 갈대에게 물었다. “니들은 어째 안 뽑혔노?” 맞장 뜨지 않고 흔들리며 바람이 지나는 길을 터줬기 때문이라는 현명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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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2015.01.29
게재일 2015-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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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 바르트의 `밝은방`은 펼치는 순간만은 설렌다. 하지만 사진에 대한 문외한인데다 작가만큼 `엄마`에 대한 궁극의 핍진한 애정을 체화하지 못해서 그런지, 막상 그의 사유를 온전히 내 것으로 옮겨오는 데는 좌절하곤 한다. 난해한 그의 글은 폐부 깊숙이 찌르다가도 어느 순간 리듬이 끊긴다. 번역 탓도 있으리라. 같은 내용이지만 절판된 `카메라 루시다`는 덜하다는데 싶어 검색해보니 중고 값이 무려 15만원! 열 배 이상이나 올랐다. 두 책을 비교해가면서 나름의 독해를 시도하려했던 일은 미뤄진 숙제가 되어 버렸다. 사진에 대한 막연한 매력을 품게 된 것은 롤랑 바르트 덕이다. `밝은방`에 나오는 `스투디움`과 `푼크툼`에 관한 개념을 어렴풋이 이해하고 난 뒤의 일이다. 롤랑 바르트는 지식인 마마보이라 해도 좋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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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2015.01.28
게재일 2015-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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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저마다의 맛과 멋으로 해석될 때 시적 기능을 담보한다. 시 한 편마다 정답의 해설이 있다면 그 시는 시가 아니다. 산문이 되어 버린다. 명쾌한 산문이 되는 순간 장막의 시는 그 매혹을 상실해버린다. 시적 긴장, 시적 함축이란 말 속에는 적어도 `아리까리함`의 용인이라는 포석이 깔려 있다. 따라서 시를 풀이하는 데는 모범 답안이 있어야 할 이유가 없다. 각설하고 고영민 시인의 `입춘`을 묵독한다. “봄은 오네 / 강가에는 한 무리의 철새가 모여 있네 / 모여 있는 곳으로 봄은 오네 / 강물은 반짝이고 / 흐름은 졸리네 / 한 구의 시신을 끌고 오네 / 나는 열두 살 / 오후 세 시” 시적 상황 속으로 감정이입을 한다. 바로 어제도 달려갔던, 지금은 달라져버린 고향의 풍광 속으로 스며든다. 여과지를 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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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2015.01.27
게재일 2015-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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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전염될수록 좋다. 유행가 가사처럼 행복해야해, 라고 소망한다. 큰 변고 없이 살아왔으니 행복하지 않을 이유도 없다. 그렇다고 이소라가 난 행복해, 라고 페이소스 짙은 목소리로 노래할 때 그것이 진짜 행복해서인 것은 아니지 않나. 대부분 행복한 듯 아닌 듯 무덤덤하게 생활한다. 그러면서 문득문득 이렇게 사는 게 행복하기는 한 건가 의문을 가지고 조금 심각해지기도 한다. 한데 아무래도 행복해지려면 깊은 자기성찰과 함께 구체적인 몇 가지 다짐이 있는 게 낫겠다. 우선 소유에서 오는 행복감이 전부가 아님을 깊이, 반복적으로 훈련해야겠다. 샤넬 가방과 모피 코트가 주는 행복감 - 아, 아직까지는 꿈에서라도 이런 소유물에 대한 환상이나 집착은 없다! -은 길어봤자 일주일이나 한 달을 넘기지 못한다. 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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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2015.01.26
게재일 2015-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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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자신이 규정해 놓은 원칙이나 신념에 따라 행동화한다. 오랜 시간을 거쳐 경험하고 축적된 여러 상황들은 자기내면화라는 깔때기를 거치고 그 과정에서 자신만의 개성이라는 고유 행동 패턴을 만들어낸다. 그 행위는 이타적인 것을 지향할 수도 있고, 이기적인 것을 욕망할 수도 있고, 보편타당한 것을 추구할 수도 있다. 그 어떤 방식이라도 타자의 생존을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면 비난 받을 일은 아니다. 고유한 행동 패턴은 옳고 그름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개별자의 행복감과 밀접한 연관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타적이든 이기적이든 보편적이든 누구나 제 좋아서 하는 일에는 신이 난다. 몸과 마음이 절로 그쪽으로 기울어진다. 하지만 삶은 제 좋은 쪽으로만 흘러가지 않는다. 내 좋은 쪽으로만 되는 게 삶이라면 이것이냐 저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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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2015.01.25
게재일 2015-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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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다양성은 시각의 차이에 기인한다. 한류 바람을 타고 `K-팝`못지않게 `K-드라마`도 해외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여기서 흥미로운 분석 하나. 우리 드라마는 서구 시각에서 볼 때에 불편함을 유발하고 의아함을 살 수도 있다는 것. 얼핏 떠오르는 몇 장면. 연적에게서 여주인공을 보호한다는 명목 하에 여성의 손목을 낚아채는 남자, 테스토스테론 과다 분비를 검증 받기라도 하듯 여주인공을 벽에 밀어붙이는 남자, 마음을 열지 않는 여주인공의 내숭만큼 쌓인 제 울분을 자랑하듯 주먹으로 유리창을 내리찍는 남자, 등이 불편 유발 장면의 대표적 예이다. 한국 드라마 시청을 위한 안내 매뉴얼이라도 만들어야 할 만큼 서구적 시각에서 보면 이런 장면들은 이해가 되지 않고 불쾌한 모양이다. 문화는 길들여짐이다. 관습화된 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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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2015.01.22
게재일 2015-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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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 용어에 투사((projection)라는 게 있다. 타인에게 무의식적으로 책임을 전가하는 것을 말한다. 이 말을 일상용어로 바꾼다면 `남 탓`쯤이 될 것이다. 투사에 대한 개념을 지금보다 덜 이해했을 때는 감정이입이란 말과 헷갈렸다. 타자의 상황을 빌려온다는 점에서는 투사나 감정이입이나 같다. 하지만 이 둘은 다른 내용을 담고 있다. 감정이입이 타자의 상황에 동조하고 수긍하고 몰입하는 내 감정이라면, 투사는 타자의 상황을 통해 잘못된 나를 빼버리거나 부정한 채 타자를 비난하는 내 심리를 말한다. 남의 슬픔이나 기쁨 앞에서 내 것인양 동화되는 것은 감정이입에 속한다. 어린이집에 보낸 아이가 열악한 보육 여건에 방치되었다거나 폭행을 당하는 장면을 목도했을 때 보통 사람이라면 그 아이 편에서 분노하고 동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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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2015.01.21
게재일 2015-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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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의 `소설가의 일`에 보면 핍진성(逼眞性)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소설가는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그 구체적 방법은 작가에 의하면 `갈피 너머에 있는 훨씬 뒤쪽의 단어와 표현`을 찾는 행위이다. 두루뭉술하게 뭉뚱그려서 표현하는 것은 개연성을 말하는 것인데 이는 책갈피 앞쪽에 해당된다. 개연성을 바탕으로 구체적으로 섬세하게 표현하는 것이 핍진성인데 이는 갈피 훨씬 뒤쪽에 해당된다. 전체적인 플롯을 통해 개연성이 확보 되면 묘사를 통해 글의 핍진성은 완성된다. 내 식의 예를 들자면 “나는 그 여자가 좋아”라고 말하는 건 개연성에 머물러 있는 거지만 “코를 찡긋하며 웃던 그 모습에도 미칠 지경이었지”라고 말한다면 핍진성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핍진성을 구축하는 데는 더 많은 염력과 생각의 힘을 필요로 한다
칼럼
등록일 2015.01.20
게재일 2015-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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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허삼관` 덕에 소설 `허삼관 매혈기`도 새삼 관심을 끈다. 원작자인 위화만큼 내게 신뢰를 주는 작가도 없다.`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라는 에세이를 읽은 후 단박에 그가 좋아졌다. 그의 글을 인터넷 신조어를 빌려 표현한다면 `웃프다`정도가 된다. 자연스런 웃음을 유발하는데 결코 웃을 수만은 없는 슬픔의 격조가 느껴진다고나 할까. `허삼관 매혈기`에도 그런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학교에서 배운, 문학적 풍자에 관련된 모든 것이 이 한 권에 담겨 있다고 말하고 싶다. 해학, 촌철, 골계, 익살, 조롱, 패러디, 비장, 엄숙 등의 문체적 속살이 잘 드러나는 이 소설에 대한 헌사의 의미로 일찌감치 `허삼관`을 보러 갔다. 영화가 원작을 만족시키지 못한다는 단순한 관람기가 맞는 이유는 일단 원작이
칼럼
등록일 2015.01.19
게재일 2015-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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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둥이 중 누가 장자여야만 할까. 흥미 있는 포스팅을 발견했다. 유럽의 일부 지역에서는 쌍둥이 중 늦게 태어난 아이가 맏이가 된다는 것. 상상으로라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단 일초라도 먼저 태어나면 형이 된다는 동양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그 이야기를 접하니 무척 신선하고 신기하다. 사람의 생각이란 다양한 것. 현대 유럽 사회에서는 쌍둥이가 태어나도 우리만큼 위계질서를 잡아주는데 집착하지 않는다. 형 동생이라는 개념 없이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친구처럼 지낸다. 하지만 전통 왕가에서나 우리식으로 하자면 시골 종갓집 같은 데서는 여전히 그 의미가 퇴색하지 않은 모양이다. 단 그들이 생각하는 형·동생에 대한 정의는 보편 정서와 다르다. 먼저 태어난 아이가 아니라 늦게 태어난 아이가 형
칼럼
등록일 2015.01.18
게재일 2015-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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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집을 지킨다. 남편은 출장 가고, 딸내미는 근무하고, 아들은 놀러 갔다. 낮에는 몰랐는데 밤이 되니 몸이 으슬으슬하고 떠도는 공기에도 한기가 서려있다. 입에서 쓴 내가 나고 어깻죽지에 동통이 밀려온다. 몸살기니 쉽게 잠들 수 있으면 좋으련만 잡념만 뭉친다. 이럴 땐 식구들의 응원보다 나은 기 보충제는 없다. 괜히 가족 대화방에다 투정서린 문자를 남겨 본다. `이 밤 모두 나 빼놓고 잘 있제? 외롭다.` `내일 (집에) 간다.` 애교나 과장을 모르는, 뻣뻣하기 이를 데 없는 딸내미의 답문이 일착이다. 비교적 싹싹한 아들 답문도 나을 게 없다. `어머니, 파이팅.` 선심 보너스처럼 달린 하트 이모티콘이 민망하다.`숙소 들어가는 중` 남편의 답문마저 초간단하다. 그래도 마음 온도만큼은 문자에 비할 바 아니리
칼럼
등록일 2015.01.15
게재일 2015-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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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을 이뤄 산다는 것은 방과 밥을 완성하는 일이다. 편히 쉴 수 있는 우리들만의 공간, 꾸밈없이 마주할 수 있는 가족을 위한 밥상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 갖춘 노래이다. 하지만 순간순간 그걸 잊고 살 때가 많다.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지금 이 순간의 심심함이야말로 최상의 버라이어티 쇼였음은 상실의 고통을 맞이한 후에야 알게 된다. 자책과 상실과 극복에 관한 토론 거리를 준비하느라 본 `아들의 방` 영화가 너무 먹먹하다. 이탈리아 항구 도시, 상담의인 지오반니 가족은 남부러울 것 없는 중산층의 일상을 엮어간다. 휴일 아침 아들과 조깅을 하기로 했지만 응급 환자의 호출에 응하느라 약속을 지키지 못한 새 스쿠버다이빙을 하러 갔던 아들은 익사하고 만다. 함께 있어주지 못한 죄책감에 지오반니는 주저앉는다. 타인
칼럼
등록일 2015.01.14
게재일 2015-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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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 교수의 신작 `비굴의 시대`가 배송되어 왔다. 예상했던 대로 그의 눈에 비친 우리 사회는 암울하다. 하기야 사회학자의 분석이라는 도움을 빌리지 않아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우리가 처한 현실이 얼마나 갑갑하고 절망적인 것인지를 날마다의 경험으로 알게 된다. 우리 현실을 지배하는 가장 큰 흐름은 자본 이데올로기이다. 천민자본주의에 물든 사회는 내남할 것 없이 그것에 경도되어 모든 가치 판단을 돈과 연관 짓는다. 국민 대부분은 중하급 월급쟁이이거나 영세한 자영업자들이다. 그들에겐 능동적 힘을 발휘할 기회도 패기도 없다. 나머지 십 퍼센트도 안 되는 자산 계급이 이 자본주의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돌이킬 수도 부정할 수도 없는 현실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스스로 착각하고 길들여진다. 노력하고 몰
칼럼
등록일 2015.01.13
게재일 2015-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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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창모임을 앞두고 한 친구가 더 이상 모임에 합류하지 못할 것 같다고 한다. 분위기 메이커에다 주변인을 챙기는 넉넉함 덕에 모두 의지하던 친구였다. 멤버들이 전국에 퍼져 있어 겨우 일 년에 한두 번 볼까 말까한 상황인데 못나올 정도로 신변에 무슨 일이 생겼나 싶다. 친한 한두 명은 사정을 알 터이나 대부분은 상황을 잘 모르니 카톡 단체방에는 불이 났다. `희정이가 빠지면 나도 탈퇴다, 회장은 책임지고 희정이를 고대로 모셔 놔라, 희정이 없는 모임은 연탄 없는 난로다.` 등 남자애들의 농 섞인 걱정 문자가 올라왔다. 카톡방에서 나가 버린 희정이가 그 문자들을 못 본다는 게 아쉬울 정도였다. 그 중 한 문자에 눈길이 간다. “웬만해선 안 올 애가 아닌데.” 이 한마디 안에 희정이에 대한 걱정과 애정이 총체적
칼럼
등록일 2015.01.12
게재일 2015-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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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함없이 고만고만하기만 한 저녁, 어두워지는 시간의 깊이만큼 검은 공허감이 밀려온다. 습관처럼 한 편의 시를 읽고, 한 문장의 산문에 밑줄을 긋는다. 길 떠나 한뎃잠 설친 간밤의 피로가 여전하다. 그래도 문맥은 제대로 와 가슴에 꽂힌다. 누가 뭐래도 읽고 쓰는 일의 직속일 때가 가장 평화로운 자극이다. 최승자의 시 한 편을 묵독한 후 글벗이 건넨 김연수의`소설가의 일`을 펼쳤다. 앞장 색지에 빼곡하게 남긴 글벗의 친필이 보인다. “많은 사람들 중에서 님을 알게 된 것, 제 인생의 크나큰 행운입니다. 이 책을 읽으며 밑줄 팍팍 그었고, 도전도 얻었고 용기도 받았습니다. 그리고 끝내 희망에 겨워 울기도 했습니다. 아직 신파에 잘 빠지는 어설픈 초보라 과하게 감격했는지도 모르겠으나, 님께도 분명 의미 있는 책일
칼럼
등록일 2015.01.11
게재일 2015-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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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조조로 개봉영화 한 편을 봤다. `언브로큰`. 일본 극우파들이 자국 내 상영을 결사반대한다는 바로 그 영화다. 감독을 맡은 안졸리나 졸리에 대해서도 입국 금지 서명 운동을 펼칠 정도라나. 호들갑을 떨며 그들이 흥분할 만큼 일본의 국격을 떨어뜨리는 영화일까 싶은 호기심에 개봉 첫날 일찌감치 달려가 보았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의 주된 내용은 베를린 올림픽에 달리기 선수로 출전한 바 있는 한 미국 남자의 일본 제국주의 포로 생환기이다. 예상한 것보다 훨씬 점잖은 수위의 묘사가 이어졌다. 원경험자의 증언을 충실히 반영하느라 그런지 스토리텔링에 과장이 없었다. 밋밋한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처럼 조금 지루했다. 고춧가루와 젓갈이 잘 배합된 김장김치를 기대하고 독을 열었는데 심심한 동치미가 담긴 독을
칼럼
등록일 2015.01.08
게재일 2015-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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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백 여일 망망대해에서 표류하는 소년 파이. 물론 혼자가 아니다. 무시무시한 벵골 호랑이와는 육지를 만날 때까지 함께 한다. 끝내 둘은 살아 돌아온다. 이 어마어마한 진실은 소년 파이에게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진솔한 경험이다. 하지만 누가 파이의 말을 믿어 줄 것인가. 보고도 제대로 믿지 않는 게 사람이다. 아니 보고도 제 식으로만 믿는 게 사람이다. 그런데 어찌 본 적도 없는데 `있을 수 없는 일`을 믿으란 말인가. 있는 그대로만 믿으라고 곧잘 말들 한다. 하지만 그 말조차 믿을 게 못된다. 있는 그대로의 기준자체가 모호하기 때문이다. 존재하는 그 무엇은 본성 그대로의 형상과 내용을 하고 있다. 하지만 개별자의 눈에 비치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은 저마다 다르다. `있는 그대로` 라는 의미는 현실에서는
칼럼
등록일 2015.01.07
게재일 2015-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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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 의심해본 일 없는 그 물리적 진실 앞에서 고개를 갸우뚱한 적이 있다. 강어귀가 내려다보이는 곳으로 이사한 몇 년 전부터 짬이 나면 강물을 관찰하는 버릇이 생겼다. 남달리 풍부한 서정적 심성 때문이 아니라 시시때때로 가늠하기 어려운 물결 방향 때문이었다. 상식으로야 바다가 보이는 쪽이 낮은 쪽이니 그곳으로 강물이 흐른다고 생각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물길은 하루에도 심심찮게 그 방향을 바꾸곤 했다. 아침나절 분명 뭍에서 바다로 흐르던 물줄기가 오후가 되면 바다에서 뭍을 향해 바뀌어져 있곤 했다. 신기하면서도 의문스러웠다. 급기야 `모든 강은 바다로 모인다`는 불변의 진리를 이론으로만 성립하는 헛말이라고 규정하기에 이르렀다. 강 하구에서는 물이 역류해 내륙
칼럼
등록일 2015.01.06
게재일 2015-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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