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에서 경주로 직장을 옮기게 됐다.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사람들은 종이상자나 캐리어 하나 달랑 들고 가뿐하게 떠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학교라는 특성도 있지만, 나는 늘 짐이 많았다. 옮길 때마다 책 때문에 애를 먹었다. 그러지 말자고 다짐을 해도 일 년이 지나면 생각지도 못한 책들이 한가득 쌓여있다. 책뿐인가. 잡동사니는 왜 그렇게 많은지. 이건 뭐지, 싶을 것도 부지기수다. 100리터 쓰레기봉투의 위력(?)이 아니었다면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버리지 않으면 정리가 안 된다. 보이지 않게 숨길 뿐. 최고요의 책 ‘좋아하
몇 해 전에 행운목 한 토막을 샀다. 길가에 늘어놓고 파는 것을 지나다가 별 생각 없이 산 거였다. 세 개의 순이 돋아 있는, 팔뚝 굵기로 한 뼘 가량인 행운목 토막을 수반에 세워 두고 가끔씩 물을 갈아 주었다. 어둡고 비좁은 내 방에 생기를 나눌 수 있는 이웃이 있다는 건 흐뭇한 일이었다. 그런데 아쉽게도 몇 달을 못 가서 두 개의 순이 시들어 버렸다. 하나 남은 순도 곧 시들 것 같아서 에멜무지로 떼어서 작은 화분에다 옮겨 심었더니 뜻밖에도 잘 자랐다.내가 보탠 것은 이따금 물을 준 것 밖에 없는데, 몇 년이 지난 지금은 크고
2월 한 달 내내 마음이 어수선하다. 졸업식과 명절을 집어삼킨 코로나도, 진흙탕 싸움에서 헤어날 줄 모르는 정치인도 원인이지만, 가장 큰 이유는 아이 때문이다.“아빠, 이제 설날 없어지는 거 아니야? 추석에도 못 갔는데, 할아버지 어떻게 해?”설날임에도 할아버지 집에 가지 못하는 것이 아쉬운 둘째 아이의 걱정 가득한 말이 잠시 잊고 있던 명절에 대한 생각을 일깨워주었지만, 필자는 거실에 쌓여가는 상자의 무게에 눌려 아이의 말을 금세 잊어버렸다. 한동안 집 안은 한숨 소리로 가득했고, 한숨에 어지럼증이 났다.상자 주인은 서울살이를 준
지난해 12월 11일, 청하읍성이 있는 포항시 북구 청하초등학교 북쪽 도로변에서 포항시 주관으로 회의가 열렸다. 어린이보호구역 내 보행로 개설공사 관련 발굴조사 설명회였다. 여기에는 포항시 관계자, 발굴조사업체 전문가, 문화재위원을 지낸 심정보 박사 등 10여 명이 참석했다.발굴 현장 설명을 듣고, 청하읍성을 둘러본 심정보 박사는 두 번 놀랐다고 했다. 문헌상으로만 보던 청하읍성이 이렇게 양호한 상태로 남아 있다는 사실에 놀랐고, 이처럼 잘 남아 있는 청하읍성이 국가사적은 물론, 지방기념물로도 지정되지 않은 채 방치되고 있다는 사실
‘장모님! 제가 누구인지 알아요.’ ‘누구세요 몰라요.’ 눈을 마주치지 않고 피하면서 고개를 떨구고 만다. 6남 1녀의 유일한 사위 권서방을 몰라본다. 지금까지 권서방! 권서방! 했던 장모님이 치매라는 판정을 받은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다.고령화 시대에 접어들면서 필연적으로 치매 환자도 급증하고 있다. 치매는 고령화 시대의 숙명이라고도 한다. 우리나라는 빠른 속도로 고령화 시대에 접어들어 65세 이상 노인 10명 중 1명이 현재 치매를 앓고 있다고 한다. 엄청 빠른 속도이다.칠십대 후반인 큰형님이 장모님을 모시고 있다. 하지만 농사를
내 이별의 처음은 7살 때였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질 않아 외증조할머니 손에 맡겨진 나는 걸음을 떼자마자 할머니가 데리고 다녔다고 다들 나를 할머니 껌딱지라 불렀다. 초등학교 입학을 한 달쯤 남겨둔 어느 날 할머니는 옥상계단을 오르다 발을 헛디뎠고 얼마 후 영영 내 곁을 떠났다.요즘도 가끔 내 말투를 들으며 고향이 어디인지 묻는 사람이 있는데 부산에서 왔다고 하면 사투리를 쓰지 않는다고 신기해한다. 서울 분이셨던 외증조할머니의 고운 말투를 들으며 유년을 보낸 나에게 내 말투는 그녀의 흔적으로 고스란히 남아있다.내게 두 번째 이별은
“방역은 핑계 같다. 모이면 정부와 정치인 욕하니까, 욕 듣기 싫어서 모이지 말라고 하는 것 같다. 재보궐 선거가 있어서 더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근데 국민이 욕하는 거 알기나 할까?”우연히 들어간 식당에서 중년의 손님들이 하는 말을 잠시 옮겼다. 물론 비속어들은 모두 제외했다. 단어 사이가 모두 비속어라고 생각하면 된다. 비속어도 그냥 비속어가 아니다. 감정이 최대한 고조될 대로 고조된 상태에서 마음 저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한이 서린 비속어! 말이 비속어지, 실제로는 울분이고 절규였다. 만약 청와대에 있는 사람과 여의도에서
세상은 바뀌었다. 신축년 2021학년도 새해는 코로나19로 졸업식이 온라인 졸업식으로 바뀌었다. 3년간 함께한 친구들과 대학 진학의 기쁨을 나누며, 부모님의 축하 꽃다발을 받으며, 친구와 함께 사진도 찍고, 담임 선생님과 이별의 인사도, 추억의 사진을 남겼던 축하의 졸업식이 바뀌었다.올해는 텅 빈 교실에서 담임 선생님 혼자 인사를 하고 졸업식을 진행했다. 교장선생님의 인사 말씀도, 부모님의 축하인사도, 친구와 교정에서 마지막 나눌 이야기도, 선생님과 마지막 감사의 인사도, 강당에서 상을 받는 친구에게 보내는 큰 박수 소리도, 교복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으로 인해 사람들이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짐에 따라, 술 소비량이 증가하게 되면서 알콜중독환자도 늘어날 것이다.어린 시절 우리 집의 뒷집에도 술을 많이 마시는 한 남성이 살았다.그는 딸기코의 붉은 얼굴, 술 취한 목소리, 건들거리는 발걸음으로 온 동네를 휘젓고 다녔다.사람들이 알코올중독자라고 하였다. 그의 아내는 결국 도망가 버리고 외동딸은 외롭게 할아버지와 할머니 손에서 자라났다. 그 아이는 우리 집에 와서 내 여동생과 자주 어울리며 놀았다. 결국 딸기코의 붉은 얼굴의 그 남성은 어느 추운 겨울날 젊은 나이에
우리나라는 12월부터 석 달 동안을 겨울이라 한다. 그 때가 연중 가장 추운 기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절기상으로는 2월 초에 입춘(立春)이 들었다. 우수와 경칩을 지나 실지로 봄이 시작되는 3월 초순과는 한 달가량의 시차가 있는 셈이다.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이 월급을 가불해 쓰듯이, 겨우살이가 혹독했던 시절에 봄이란 절기라도 미리 당겨 온 게 아닐까 싶다. 봄이 선다는 입춘은 태양이 지나가는 길이라는 황도(黃道)를 24등분해서 만든 24절기 중 하나다. 그런 절기는 설이나 단오, 한가위 같은 음력을 기준으로 한 명절과는 맞지 않는
2월이다. 학교에서는 사회 달력으로 치면 12월에 해당하는 달이다. 학교 송구영신(送舊迎新)의 달 2월. 지금은 아니지만, 2월의 가장 대표 행사는 졸업이었다. 코로나 19 전에도 1월에 학년을 마치면서 졸업식도 같이하는 학교가 많았다. 그래도 그때는 졸업생과 재학생이 한자리에 모여서 석별의 정을 노래했다. 아쉬움 가득한 눈물은 새 출발을 위한 최고의 선물이었다.하지만 지금은 그런 졸업식을 상상하는 것조차 죄가 되어버렸다. 안타까운 것은 그런 상상을 하는 학생은 물론 교사도 거의 없다는 것이다. 많은 교사는 방역을 핑계로 졸업식 따
정재찬 교수와 정재승 교수를 착각하여 지난 글에 정재승 교수의 ‘우리가 인생이라 부르는 것들’이라고 오기를 했다. 정재찬으로 정정한다. 정재찬 교수는 ‘시를 잊은 그대에게’라는 베스트셀러가 있다. ‘우리가 인생이라 부르는 것들’은 2020년 2월에 출간했다.책은 ‘밥벌이’, ‘돌봄’, ‘건강’, ‘배움’, ‘사랑’, ‘관계’, ‘소유’로 나누어 모두 7장으로 쓰여졌다. 정재찬 교수가 생각하는 ‘인생이라 부를 만한 것들’의 목록이다. ‘토요일의 인천공항’이 재미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SNS 속 텍스트에 나타난 감정 어휘를 위치 기반
구랍 13일 밤늦은 시간까지 포항중앙아트홀 전시실에는 훤하게 불이 밝혀져 있었다.화가로서 절정의 기량을 꽃피울 무렵 안타깝게도 우리 곁을 떠난 이병우의 유작전(遺作展) 설치작업이 늦게까지 이어진 것이다. 밤 10시가 훌쩍 지난 늦은 시간이었지만 의미 있는 전시회를 정성껏 준비하던 포항미술협회장을 비롯한 회원 친구들이 디스플레이를 마치고 흐뭇한 마음으로 전시장을 한 바퀴 휘돌아 보던 중 포항문화재단 관계자로부터 전시장 폐쇄 통보를 받았다. 코로나 감염의 재확산으로 사회적 거리두기 적용 단계의 전국적인 격상이 발표된 까닭이다. 그의 작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온 세계를 떠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의 입과 손발을 묶어둔 지, 약 1년이 되어간다. 지금 생각해보면 사람들은 과학기술이 가져다준 문명의 이기를 활용하여, 여기저기 참 많이도 돌아다녔다. 북구에서 남극까지, 바다에서 하늘까지 사람들이 가지 못하고 만나지 못하는 사람이 없었다.코로나19 바이러스가 그 모든 이동, 만남을 중지시킨 지 1년이 되어간다.자연의 재앙 앞에서 인간은 한없이 나약해지면서 홀로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그 홀로 있는 시간에 어떤 이는 공부를 시작하고, 어떤 이는 사랑을 하고, 어떤 이는 기도와 명상을
발명왕으로 불리는 에디슨은 ‘천재는 1퍼센트의 영감과 99퍼센트의 노력으로 이루어진다.’고 했다. 흔히들 그 말을 ‘천재는 영감보다 노력에 의해서 만들어 진다’는 뜻으로 알고 있으나, 에디슨은 ‘1퍼센트의 영감이 없으면 99퍼센트의 노력도 소용이 없다.’는 의미로 한 말인데 와전되었다는 것이다. 아무튼, 타고난 재능이 없이 노력만으로 천재가 될 수는 없는 건 분명한 것 같다. 같은 노력을 해도 타고난 소질과 재능에 따라 현격한 기량의 차이를 보이는 게 사실이니까.각 분야마다 신동(神童)으로 불릴 만큼 뛰어난 재능을 보이는 아이들이
코로나19에 무너진 세상은 1년이 넘도록 여전히 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는데, 시간은 벌써 1월 달력을 넘기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 비장한 각오로 시작한 2021년이지만, 그 시작부터가 쉽지 않다. 올 1월에 대한 기억은 최강 추위와 코로나, 그리고 저질 정치 이야기뿐이다.2021년 1월 1일, 국가 지도자들은 저마다 새해 희망 메시지를 발표했다. 내용이 복사 수준이어서 아쉬웠지만, 희망이 멸종된 사회에서 희망이라는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좋았다.“‘느릿느릿 걸어도 황소걸음’이라 했습니다. 모두의 삶이 코로나로부터 자유로워질 때까지
코로나19의 영향일까? 최근 들어 홀로 또는 따로 하는 문화가 부쩍 늘어나고 있다. 바이러스의 전염을 우려한 한 줄 칸막이 식사를 한다거나 한 칸 띄어 앉기 등으로 거리두기를 하다 보니 저절로 혼자 하는 행위가 많아지게 된 것이다. 정부의 방역지침에 따라 먹거나 어울리고 활동하는 자체에 많은 제약과 기준의 적용으로 다소의 불편과 움츠림 속에서도 자구책(?)으로 나타난 것이 홀로 하는 문화라 할 수 있다.그러나 혼자 하는 식사나 행동, 작업 등은 이미 한참 전부터 우리의 생활 저변에 나타나거나 스며든 삶의 양식이라 할 수 있다. 다만
국민이 정치를 걱정하고 있다. 적폐청산을 기치로 내세운 현 정부 들어서 전직 두 대통령이 구속됐고, 그들은 아직도 옥살이를 하고 있다. 힘센 여당이 각종 개혁정책을 밀어붙이면서 국회의 생명인 ‘협상’은 실종돼 버렸다. 지금도 여야는 이런 저런 정치 이슈로 피 튀기는 싸움질을 하고 있으니, 지지하는 성향에 따라 국민도 편이 갈려 사회관계망서비스 상에서 처절한 싸움을 벌이고 있다.이 갈등은 단순히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기에 치명적이다. 사사건건 진영 간 싸움으로 번져 버리는 구조 속에 놓여 있다. 아무리 논리가 옳더라도 그 주장을 하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한다. 무리를 지어 산다는 뜻이다. 원시시대에는 사바나의 초식동물들처럼 혼자 떨어져서는 살아남기 어려웠을 것이다. 여럿이 힘을 합치면 적이나 맹수의 공격을 막기도 쉽고 큰 동물을 사냥할 수도 있으니 그만큼 생존확률이 높아지는 것이다. 그럴 필요가 없는 지금도 고립되거나 소외되면 왠지 불안해지는 것은 아마 그런 습성이 유전자에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요즘 들어 무슨 동호회나 팬덤이 성행하는 것도 그런 까닭일 터이고.팬덤(Fandom)이란 공통의 관심사를 공유하는 사람들, 즉 어떤 대상의 팬(fan)들이 모
“수업이 달라요. 지금 학교에서는, 학교에서 수업도 얼마 안 했지만, 애들이 수업 시간에 다 자요. 왜 수업을 들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여기는 수업이 너무 재밌어요.”지난 주말 산자연중학교에서는 입(전)학을 위한 겨울 예비학교가 열렸다. 참가 학생들에게 필자는 왜 입(전)학을 하려고 하는지 꼭 묻는다. 그러면 거의 모든 학생이 위와 같이 답한다. “수업 시간에 자도 괜찮니? 선생님들께 혼나지 않니? 수업 시간에 왜 자니?” 이 질문에 대한 답도 필자는 잘 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어보지만 역시나 답은 똑같다.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