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를 자랑해온 민주당이 길을 잃었다. 정당민주주의는 사라지고 ‘이재명의 민주당’이 되었다는 비판이 거세다.김대중·노무현의 관용과 통합정신은 보이지 않고 이재명의 ‘독선과 배제의 정치’가 요란하다. 75년 역사와 전통의 민주당이 처음 가는 길이다.‘민주 없는 민주당’의 현실은 ‘친명횡재, 비명횡사’라는 조어가 웅변으로 말해준다. ‘시스템공천’이라고 자랑하더니 알고 보니 ‘고무줄공천’이었다. 이낙연 전 총리는 민주당이 “1인 정당, 방탄정당으로 변질됐다”고 성토했고, 홍영표 의원은 “민주가 사라진 가짜 민주당”이라고 하면서 탈당했
정치인들은 ‘정치 영화’를 이용해서 ‘영화 정치’를 한다. 대통령이나 정치적 이슈를 다룬 영화가 개봉될 때마다 여야는 ‘영화의 정치화’를 통해서 색깔논쟁을 일으키며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다. ‘선거용 정치 영화’를 만들어서 돈벌이하려는 제작사와 그것을 선거에 이용하려는 정치권의 이해관계가 일치되기 때문이다.정치인들은 영화를 자신의 정치철학이나 메시지를 전달하고 지지자를 결집하는 수단으로 활용한다. 민주화운동을 다룬 남산의 부장들(10·26), 택시운전사(5·18), 1987(6·10), 서울의 봄(12·12) 등이 진보진영의 메시지
총선용 포퓰리즘(populism) 광풍(狂風)이 불고 있다. 선거 때마다 도지는 ‘망국적 고질병’이다. 매표나 다름없는 선심성 공약을 여야가 경쟁적으로 남발한다. 여당이 50을 약속하면 야당은 100을, 또 다시 여당은 150을 던지는 ‘투전판 정치’다. ‘아니면 말고’식의 허황된 공약을 하는가하면, 여야가 야합해서 ‘예타 면제 특별법’으로 대못을 박기도 한다.윤 대통령은 “매표에 가까운 포퓰리즘 정책을 쓰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총선이 다가오자 소상공인들에게 재난지원금 환수면제, 대출이자의 현금반환, 전기료감면 및 신용사
윤석열 대통령은 집무실을 청와대에서 용산으로 옮기는 이유를 “국민과 소통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는 “항상 언론과 소통하고 언론 앞에 자주 서겠다”고 하면서 “질문 받는 대통령이 되겠다”고 약속했다.하지만 ‘도어스테핑’은 6개월 만에 중단됐고, 신년기자회견도 하지 않은지 2년째다. 국민은 왜 청와대를 나왔느냐고 묻고 있다.무엇이 문제인가? 우선 대통령의 소통 대상이 ‘제한적이고 선택적’이라는 사실이다. MBC기자는 대통령 전용기 탑승을 배제한 반면, 조선일보에는 대통령 단독인터뷰라는 특혜를 줬다.소통의 본질
정치권의 ‘사투리 논쟁’이 꼴불견이다. 경상·전라·충청도의 ‘지방 사투리’는 정감이 있지만, 정치꾼들의 ‘패거리 사투리’는 반감만 불러온다.여당의 한동훈 비대위원장이 전·현직 야당대표를 비판하면서 ‘여의도(국회) 사투리’를 쓰지 않겠다고 하자, 야당에서는 법비(法匪)들이 쓰는 ‘서초동(검찰) 사투리’부터 고치라고 했다. ‘내가 쓰면 표준말’이고 ‘남이 쓰면 사투리’라고 하니 ‘내로남불’이다.‘말’로 먹고사는 정치인들은 사투리가 아니라 표준말을 써야 한다. 정치인들의 표준말이란 무엇인가? 권력의 원천인 ‘주권자의 언어’가 표준말이다.
제1야당 대표가 백주대낮에 정치테러로 쓰러졌다. ‘증오의 진영정치’가 초래한 비극이다. 대결의 정치는 대화·타협·공존을 모른다. 거대 양당은 협치의 대상을 섬멸해야 할 적으로 간주해서 ‘전쟁 같은 정치’를 한다. ‘역지사지(易地思之)’를 모르는 양당의 주특기는 ‘내로남불’이다. 국민은 말뿐이고 권력에만 혈안이니 양당에 실망한 중도·무당층의 비율이 역대급이다.그럼에도 양당은 양자택일을 강요하고 있다. 그래서 국민은 총선을 앞두고 분출하는 제3지대 신당들에 관심이 간다. 최근 여론조사(리얼미터, 2023년 12월 18일)는 국민의 48
새해 첫날, ‘바람의 섬’ 제주에서 올레 길을 걸으며 ‘바람이 가르쳐주는 자유의 의미’를 생각해 본다. 삶을 옭아매는 수많은 그물에서 벗어나 대자유인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부처의 가르침이 가슴을 때린다.우리는 ‘바람과 같은 자유’를 원하면서도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살고 있다. 내가 만든 그물에 내가 걸려 허덕이는 것이다. 서로를 연결하는 인터넷은 이제 서로를 옭아매는 그물망이 되었다. SNS는
정치는 대의(大義)와 명분(名分)이 있어야 한다. 대의 없는 권력 추구는 야만이며, 명분 없는 권력 행사는 폭력이다. 정치의 이상이 대의를 구현하는데 있음에도 현실의 정치는 권력투쟁뿐이다. 대의도 명분도 없이 오직 권력에만 혈안이 된 ‘야만의 정치’ 때문에 국민의 고통이 크다.총선이 코앞인데 아직도 ‘게임의 룰’이 확정되지 않았다. 여야가 ‘명분 없는 실리’를 위해 잔머리를 굴리고 있기 때문이다.연동형 비례대표제는 거대 양당이 위성정당을 만들지 않으면 손해고, 병립형으로 돌아가자니 정치적 야합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여야는 자신
총선을 앞둔 정치권의 화두는 또 다시 ‘혁신’이다. 선거 때마다 등장하는 상투적인 구호다. 그 동안 여야가 경쟁적으로 내세웠던 수많은 혁신위원회와 비상대책위원회는 도대체 무엇을 했기에 또 혁신하겠다는 것인가? 아마도 진정성 없는 ‘혁신 쇼’를 반복해왔기 때문일 것이다.권력정치에서 혁신은 혁명보다 어렵다. 마키아벨리(N. Machiav elli)는 “강력한 적과 미온적인 동지, 그것이 바로 혁신이 성공하기 어려운 근본적인 이유”라고 했다. 혁신에 저항하는 기득권세력은 강력한 반면, 그들의 저항을 돌파해야할 혁신파의 힘은 약하고 그 태
총선용 포퓰리즘 광풍이 불고 있다. 보선 참패로 수도권의 싸늘한 민심을 확인한 여당이 총선전략으로 ‘메가시티(megacity) 서울’을 띄웠다.이미 정치·경제·사회·문화가 고도로 집중된 ‘서울공화국’인데 ‘메가시티 서울’은 또 무엇인가? 지방은 소멸위기인데 헌법 제123조에 규정되어 있는 ‘국가균형발전’의 헌법적 가치를 수호할 의지는 있는지 묻고 싶다.서울은 ‘너무나 메가’해서 주택·교통·교육·직장·과잉경쟁의 부작용이 심각할 뿐만 아니라 전국 최저의 출산율을 기록하고 있다. 반면에 지방은 역대 정권의 ‘균형발전정책’에도 불구하고 경
속담에 “죽어봐야 저승을 안다”고 했다. 정부·여당이 강서구청장 선거에 올인 했으나 참패하자 정신이 번쩍 든 모양이다. 이제야 윤 대통령은 “국민은 늘 무조건 옳다”, “나부터 반성하겠다”고 했고, 여당은 환골탈태하겠다면서 혁신위원회를 출범시켰다. 총선을 앞두고 저승이 어른거리니 겁이 나서 허둥대는 모습이 측은하다.필자는 이미 본 칼럼을 통해 여러 차례 정부·여당에 고언(苦言)을 했다. “제주 돌담이 대통령에게”(2022년 8월 9일), “권력이 아니라 국민을 보라”(2022년 9월 6일), “당심·윤심·민심”(2023년 1월 31
가을은 ‘거울’이다. 청명한 하늘, 소슬한 바람, 낙엽 구르는 소리만큼 나를 볼 수 있는 좋은 거울은 없다. 가을에는 사람의 마음도 거울처럼 맑아진다. 내면의 정신세계로 인도하는 가을은 나와 마주하기 참 좋은 계절이다.가을의 고독과 외로움은 고요한 침잠과 사색을 가능하게 한다. 가을은 감상적 상념이 아니라 냉정한 성찰을 요구한다. 위대한 철인들이 품었던 질문을 나도 피해 갈 수가 없다. 우리는 그 질문을 통해서 스스로를 성찰하고 혁신함으로써 삶의 질적 수준을 높여나간다. 그래서 헤르만 헤세(Hermann K. Hesse)는 “가을은
제22대 총선이 6개월 앞으로 다가왔다. 여야 모두에게 사활이 걸린 선거다. 여당이 과반을 얻지 못하면 국정의 동력을 잃고 대통령의 조기 레임덕이 불가피할 것이며, 야당이 대선·지선에 이어 총선까지 패배한다면 최후의 버팀목인 입법 권력마저 상실하기 때문이다.누가 승리할 것인가? 캐스팅 보트(casting vote)를 쥐고 있는 중도층의 표심을 잡는 정당이 이긴다. 총선은 결과가 뻔한 영남과 호남, 그리고 여야 각각 30% 안팎에 묶여 있는 콘크리트 지지층이 변수가 되지는 못한다. 총선의 승패는 전체 지역구의 절반을 차지하는 수도권에
권력과 언론의 관계는 불편한 것이 정상이다. 언론의 사명은 권력을 감시·비판·견제하는 것이고, 권력은 자신의 정치적 목적달성에 유리한 언론환경을 조성하려하기 때문이다. 특히 권력과 언론의 이념적 성향이 다를 경우(진보정권과 보수언론, 보수정권과 진보언론)에는 양자의 갈등관계가 최악으로 치닫는다.권력과 언론은 ‘너무 가깝지도 너무 멀지도 않는 거리(不可近不可遠)’에 있어야 한다. 양자가 너무 가까이 밀착되면 진실에 대한 은폐·조작·왜곡이 일어나고, 너무 멀어져 적이 되면 권력은 언론을, 언론은 권력을 죽이려고 한다.때문에 권력과 언론
권력의 행사에는 반드시 책임이 따른다. 주권자인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력이기 때문이다.‘내 탓’은 없고 ‘네 탓’만 하는 정치는 책임회피이며, 권력을 위임한 국민에 대한 배신이다. 권력을 감당할 인격도 능력도 없는 정치인들의 유체이탈 행태가 가소롭다.‘2023 세계스카우트 잼버리대회’가 실패로 끝나자 그 책임을 둘러싼 네 탓 공방은 가관이었다. 전 정부와 현 정부, 지방정부와 중앙정부 모두 그 책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음에도 여당은 전 정부와 전북도에, 그리고 야당은 정부여당의 비판에 집중했다.심지어 문재인 전 대통령까지 나서
우리의 교육현실이 참담하다. 2년차 신규교사가 학교에서 극단적 선택을 했다.사면초가(四面楚歌)의 환경 속에서 사명감 하나로 버티던 교사들이 정신과 치료를 받는가 하면, 더 이상 버티지 못하면 교단을 떠나거나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추모집회에서 동료교사들은 “교권침해 보험에 가입해야 하는 이 현실이 정상이냐?”고 우리에게 묻고 있다.존경과 감사의 대상이 되어야 할 선생님들이 어찌 이 지경이 되었는가? 학생의 인권이 중요한 것처럼 교권도 중요하다. 수업하는 교사 옆에서 학생이 드러누워 휴대폰을 사용해도 이를 제재할 권한이 없다니 기가 막
‘청춘예찬’에 환호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노년예찬’이 가슴에 와 닿는다. 청춘에 읽었던 에리히 프롬(E. Fromm)의 ‘소유냐 존재냐’와 ‘존재의 기술’은 머리와 가슴에서 분리됐었는데, 나이가 들어서 다시 읽어보니 비로소 하나가 되었다. 존재의 의미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던 고학생(苦學生)은 부·권력·명예의 소유가 곧 행복인줄 알았던 것이다.삶에서 가장 중요한 물음은 “나는 누구이며,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일 것이다. 이 존재론적 물음은 이념·성별·직업·빈부에 관계없이 행복한 삶을 위한 전제이다. 특히 정치인·언론인
‘정치’는 실종되고 ‘정쟁’만 난무한다. ‘후쿠시마 오염수’와 ‘서울양평 고속도로’를 둘러싼 정쟁이 점입가경이다. 정쟁의 외관은 국민의 건강과 편익으로 포장되어 있지만, 사실은 권력의 획득·유지·강화를 위한 투쟁일 뿐이다. 정치인들의 선동·거짓·과장·왜곡이 갈수록 태산이다.후쿠시마 오염수에 대한 정치인들의 행태는 가관이다. 여당의원은 방류를 시작하기도 전에 해수가 안전하다면서 어패류 수조의 물을 마시는가 하면, 야당의원은 ‘핵 폐수’라고 하면서 “차라리 X를 먹겠다.”고 국민을 겁박한다. 2년 전 문재인정부의 합동TF에서는 “오염
의대 광풍(狂風)이 거세다. 사교육 1번지, 대치동 학원가에서 시작된 ‘초등생 의대 진학반’이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다. 과학기술과 첨단산업을 이끌어야 할 우수한 이공계 인재들이 의대 진학을 위해 휴학·자퇴·재수를 서슴지 않는다. KAIST를 비롯한 4대 과학기술원과 포스텍의 재학생 중 매년 200여 명이 자퇴 후 상당수가 의대에 가고 있다.이러한 ‘의대 블랙홀’은 심각한 문제이며 원인 분석과 대책이 시급하다. 의대 광풍의 원인은 무엇보다 고소득·안정성에 있다. 공대는 SKY대라도 취업이 쉽지 않지만, 의대는 지방대라도 취업 걱정은
권력을 감시·견제하고 정의·진실을 위하여 정론직필(正論直筆)해야 할 언론의 ‘정치적 편향성’이 심각하다. 공익과 사실에 충실해야 할 언론마저 정파적 보도를 서슴지 않는다. 편 가르기를 비판하면서도 늘 어느 한 편에 서 있으니 자기모순이다. 상업화된 언론사와 ‘기레기(기자+쓰레기)’가 된 언론인들에게 불편부당(不偏不黨)을 기대할 수는 없다.정파성은 언론의 신뢰를 떨어뜨리는 주범이다. 객관성을 상실한 언론을 누가 믿겠는가.영국 옥스퍼드대 로이터저널리즘연구소의 발표(2023/06/14)에 의하면 한국의 언론에 대한 신뢰도는 조사대상 46